2.
“아, 알겠네. 알았으니 그것 좀 그만 들이밀게. 대, 대신 잘, 잘 좀 싸주시게. 선물 할 것이야.”
민찬이 전낭을 열어 돈을 꺼내면서 말하자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비단수건에 노리개를 쌌다.
“좋아하시는 분께 드리기라도 하시나 봅니다?”
민찬은 눈을 부라리며 30냥을 주인에게 들이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좋아하기는 내가, 그 콩알을? 개뿔! 그, 그냥. 어, 어? 그냥, 그냥 주는 거야!”
“그, 그러신 겁니까? 이 놈이 잘 몰라 그랬습니다.”
주인은 예쁘게 싼 노리개를 민찬에게 내밀었다. 민찬은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잡아 소매 안에 넣었다.
민찬은 힘겹게 노리개를 사서 투덜대며 위작공장을 향해 산을 올랐다. 말복이 가까워선지 평소보다 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아……. 이 길이 이렇게 멀었나.”
걸음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던 차였다. 멀리 검은 인영이 몇몇 움직이는 게 보였다. 더운 사실 조차 싹 잊어버릴 만큼 등골이 송연해졌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쳤다. 위험해.
뇌리를 스쳐지나간 단어 하나가 민찬의 지친 두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속으로 수십 번을 되 뇌이며 지름길로 다연을 향해 내달렸다. 폐가 터져나갈 듯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헉헉! 홍윤! 어딨어!”
위작공장 마당에 서서 민찬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다연의 처소로 발을 다시 옮기면서 소리쳐 다연을 불렀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평소라면 금세 얼굴을 보여줬는데 오늘은 왜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보이질 않는가. 다행이도 수상한 패거리들보다 민찬이 먼저 도착한 듯 했다.
“김민찬, 왜? 시끄럽게!”
방문을 벌컥 열고 다연이 인상을 찌푸린 채 얼굴을 내밀었다. 오른손에는 붉은 안료가 묻은 붓이 들려있었다.
“잔말 말고 당장 나와!”
“무슨 소리야? 한창 그림 그리고 있는데…….”
민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다연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다연은 달려야만했다.
“어디 가냐고!”
민찬은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다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도망친다. 다연을 데리고 산을 빠져나간다. 이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공장을 빠져나와 산속을 거칠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억센 수풀이며 나뭇가지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민찬은 계속 다연을 끌고 달렸다. 푸드덕 거리는 새의 날갯짓 하나에도 민찬은 사납게 주변을 경계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계속 달리던 다연은 소리쳤다.
“어디 가냐고! 설명도 안 해주고 뭐하는 짓이야?”
“일단 가! 지금 위험하다고!”
“나랑 장난해? 내가 소, 돼지도 아닌데! 위험하다 그러면 묻지도 말고 질질 끌려가야해?”
“하아! 미치겠네! 그냥 따라와!”
민찬이 다연의 손목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다연은 거칠게 뿌리쳤다.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제발!”
“됐어, 나는 제대로 설명 듣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야.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우 씨! 젠장! 일단 가자고! 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사람 속 뒤집으려고 환장을 했나? 어?”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다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더욱 눈을 새파랗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두 사람 뒤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위작공장 쪽이었다. 뒤를 돌아보며 놀란 다연의 손목을 다시 억지로 잡아 내달렸다.
“김민찬! 방금 저 소리 뭐야? 뭐냐고!”
“조용히 해!”
“하아, 김민찬! 너야말로 내 속 뒤집…….”
민찬은 다연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놀란 다연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다연의 입을 막고 몸을 낮춰 총총걸음으로 가다 풀숲에 가려져 쓰러진 거목을 발견했다. 멀리서 점점 들려오는 발걸음소리에 민찬은 다연의 손을 잡고 거목 뒤로 재빨리 숨었다. 급박하게 숨느라 민찬의 손이 온통 여기저기 쓸려 생채기 투성이었다. 그 거친 숲길을 내달리면서도 다연은 다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민찬의 손을 보며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쓰벌, 어딨다고 지랄이여. 쥐새끼 한 마리도 없구만. 뭐땀시 여기까지 보초를 스라마라 지랄이여! 새파랗게 어린노무새끼가! 캬악, 퉤.”
가래를 뱉고선 사내는 생긴 것과 다르게 여기저기 꼼꼼히 쑤시고 다녔다.
“쓰벌, 있으면 있다카고 싸게싸게 튀어나온나. 내가 찾아서 나오면 조져불랑게.”
사내의 말에 다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민찬은 미세하게 떠는 다연의 어깨를 한참 머뭇거리다 감싸 안아줬다. 다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민찬의 얼굴엔 온통 경계심이 가득했다.
사내는 이곳저곳을 칼로 쑤시며 욕을 해댔다. 어느덧 민찬과 다연이 있는 거목 쪽으로 발걸음이 다가오다 멈춰 섰다. 칼을 민찬이 숨은 수풀 쪽으로 사내는 쑤셨다. 시퍼런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민찬의 도포를 스치고 갔다.
“쓰벌, 뭣이여? 여기도 없능가? 여기 쥐새끼도 없는기 맞잖어! 쓰벌노무새끼!”
돼지 같은 사내는 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손, 괜찮아?”
다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오자 민찬은 그제 서야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다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헤집고 다녀서인지 그간 아무런 감각도 못 느꼈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소리를 내질렀다. 머쓱해진 민찬은 손을 감췄다.
“……방금, 그 사람 뭐야?”
“나도 잘 짐작이 안 되네, 위작단속인가 했는데……. 산적 같지는 않고…….”
“공장은? 영규는? 그, 그림 그리다가 나왔는데…….”
다연은 두려움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옆에서 떨고 있는 다연을 보자 민찬은 다연을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큰일 없을 거야. 사흘 뒤로 날 잡았는데 안 되겠다. 그냥 오늘 중으로 내려가자.”
“오, 오늘 중이라니!”
“공장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그래? 어르신이 잘 처리할 거니까 영규걱정 하지 말고 내려가자.”
“하, 하지만 내, 내 그림도 있고…….”
“지금 그림이 먼저야? 어?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새끼들이 공장 쪽으로 갈 때 내가 널 얼마나 걱정하면서 뛰어왔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다연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큰 눈만 깜박였다. 민찬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니 더욱 머쓱해져서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후우……. 나중에 니 짐들 챙겨서 가지고 갈게.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민찬은 거목 뒤에서 나와 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연은 머뭇거리다 민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산을 내려와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덧 하늘은 어슴푸레 물이 들어갔다. 슬슬 시간이 밥시간이 다가와 민찬은 다연을 한번 쳐다보았다.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어느덧 도성 안 저자에 다다랐다. 방물점, 포목점 등을 지나쳐 주막 근처를 지날 때였다. 안에서 탕반 끓이는 냄새가 다연의 코를 자극했다.
“하아, 배고파.”
푸념하듯 말한 다연의 말에 민찬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래? 뭐라도 먹고 갈까?”
다연의 손을 잡아 주막으로 들어갔다. 싫지는 않은지 다연은 민찬이 이끈 자리에 앉았다.
“주모, 여기 탕반 두 그릇만 주시오. 탁주도!”
“네네, 나리.”
주모는 민찬의 주문을 받고 부엌으로 향했다. 다연과 마주한 민찬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새하얀 다연의 목선이 어슴푸레 빛나는 달빛에 빛났다. 뽀송한 작은 솜털 하나하나가 다연의 숨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으흠…….”
괜히 시선을 애먼 하늘로 돌렸지만 자꾸 다연에게로 가는 시선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주모가 상을 내왔다. 턱하니 앞에 놓인 밥상에 민찬의 기분이 환기가 되었다.
“먹자. 여기 탕반 맛이 끝내줘.”
민찬은 숟가락을 들어 푹 탕반을 떠먹기 시작했다. 다연도 배가 무척 고팠는지 망설이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몇 번 떠먹더니 민찬이 탁주를 들이켰다.
“캬하, 시원하네.”
다연은 밥을 떠먹다가 민찬이 마시는 탁주가 궁금했는지 눈을 깜빡이며 바라만 보았다. 민찬은 그런 다연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조금만 맛볼래?”
“어? 응.”
민찬이 탁주를 따라주자 다연은 웃으며 들이켰다. 시원한 탁주 맛이 기분이 좋았다. 홀짝홀짝 차마시듯이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해.”
“알아, 나 술 쎄. 걱정 마. 저번에도 같이 마셨잖아.”
“그때 뭐, 얼마나 마셨다고.”
민찬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연은 탕반을 먹어가며 탁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렇게 탁주를 홀짝이던 다연은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어이, 홍윤!”
어깨를 흔들어 보아도 뺨을 토닥여보아도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젠장. 오늘 왜 이러냐. 주모, 여기 돈 놓고 갑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리. 조심히 가세요.”
이미 날은 껌껌해져 어두웠다. 민찬은 한숨을 내쉬며 다연을 몇 번 흔들어보다 포기했는지 업었다.
“으쌰! 으이구, 내가 그래서 걱정했구만.”
다연을 업고 터덜터덜 민찬은 걷기 시작했다. 저자 끝 모퉁이만 돌면 채경의 집이었다. 조금만 걸으면 된다고 그렇게 위안하며 걸었다.
“하아, 채경이나 얘나 뭔 계집애들이 이 모양이래.”
민찬은 투덜대다 어느덧 인적이 없는 곳에 다다르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다연은 취해있었다.
“후우……. 내가 오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는 하고 자는 거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너 없는 세상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더라. 하아.”
다연을 업고 가는 민찬 위로 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은빛 그림자가 땅위에 선명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나 걱정시키지 마라……. 후우……. 들을 리가 없겠지. 으휴, 누가 그렇게 마시래.”
한참 더 달빛아래를 걸어, 길가에 홀로 핀 꽃을 스쳐지나 채경의 집 앞에 섰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나오너라!”
민찬의 몇 번의 외침에 굳게 닫힌 대문이 열렸다.
“도련님?”
“어이, 율! 채경이 있냐?”
“아가씨는 계시죠. 이 시각에 무슨, 뒤에 업고계신 분은 뉘십니까?”
“니 아가씨에게 빨리 말해주지 않겠냐? 화공님 데려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