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뭘 걱정하는지 몰라도, 육촌 누이라면 믿을 만해. 저래 봬도 한양 육의전을 꽉 틀어쥐고 계시지. 넌, 여기 있어.”
“응? 그럼 너는.”
“후우……. 우선 돌아가 봐야지. 영규가 걱정되기도 하고.”
영규라는 말에 다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날 공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이렇게 내려와 버렸다.
“조, 조심해.”
“걱정하지 마. 육촌 누이님. 작작 굴리세요. 뼛속까지 홀딱 빨아먹으려고 하지 말고.”
“흥! 내가 홍화공님께 그럴 것 같습니까? 빨리 가버리세요.”
민찬은 한숨을 내쉬며 안채에서 나갔다. 채경은 그가 나가길 기다렸다는 듯 다연을 이끌고 안채 안쪽 방안으로 갔다. 굳게 닫힌 문을 열자 그 안은 별천지였다.
온통 그림으로 방안이 빽빽했다. 조선, 청, 일본의 그림부터 멀리서 온 서역의 그림들 까지 없는 게 없었다. 다연은 어린아이처럼 이 그림 저 그림 보기 바빴다.
“이, 이 그림은 뭐에요?”
다연은 딱 한 점 있는 유화 앞에 멈춰 섰다. 심장이 요동치고 피가 들끓었다. 세상에 이런 그림이 있었다니. 충격 그 자체였다.
“조선말로 번역하자면 유화에요.”
“유, 유화?”
“조선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죠. 조선은 선을 강조하는 그림이라면, 서역은 면을 강조합니다. 이런 과일을 표현한 것도 가까이서 보면 그저 안료 덩어리에요.”
채경의 말에 다연은 코를 박듯 유화를 가까이 뜯어보았다. 정말 멀리서 보았을 땐 방금이라도 사과가 뚝 떨어질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봤을 땐 사과 같지도 않았고, 안료의 두께감이 들쭉날쭉이었다.
“왜 이렇게 안료 두께가 차이가 나는 거죠?”
“아무래도 안료 자체도 다르고 그리는 방법도 다르니까요. 조선그림과는 다르게 안료를 퍼서 바르듯 그리기 때문에 가난한 화공들은 그린 그림 위에 다시 안료를 덮어 새로 그리기도 한다더군요.”
다연은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이 그림을 봐도 저 그림을 봐도,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지칠 줄 몰랐다. 그런 다연을 보니 채경은 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설명해주기 바빴다.
그렇게 한참 그림 구경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청월에게서 연통입니다.”
율의 부름에 채경이 고개를 돌려 서찰을 받았다. 재빨리 훑어 내려간 서찰의 내용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아? 세, 세자 저하가? 말도 안 돼!”
“아가씨?”
채경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연은 놀라 그림구경을 잠시 멈추고 채경을 바라봤다.
“후우……. 뭘, 어떡하겠어. 나 같은 게 무슨 힘이 있다고. 청월에게 출입패 내드리라고 해.”
“네, 아가씨.”
율은 대답을 하고 안채를 나갔다. 율과 교대하듯 들어온 홍연은 채경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고민하세요?”
“……세자저하는 왜, 오는 걸까? 하아, 강세훈. 분명, 명월관 시위대 소동이 조정까지 들어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올 리가 없잖아.”
채경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말, 남자들은 쓸모가 없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남자 중 자신과 호적수는 없었다. 오히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빽 소리만 지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정말이지, 저런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니 조선이 지금 풍전등화인거야.”
어둑어둑한 도성 밤거리에 명월관은 오늘도 북적였다. 멋들어지게 비단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젊은 세 남자 때문에 더욱 시끄러웠다.
명월관에 가까워질수록 기녀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크흠…….”
유달리 더 도포가 화려한 가운데 남자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저, 저……아, 아니 훤군. 이 쪽으로 가시죠.”
어정쩡하게 군을 붙이며 말을 더듬는 꽉 막힌 사간원 홍헌납을 보더니 문우는 피식 웃었다. 명월관 경매장 출입구에 다다르자 호위무사에게 출입패를 보여줬다. 호위무사는 셋의 출입패를 확인하더니 안으로 들여보냈다. 훤군이라 불린 사내는 신기한지 온통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었다.
문우는 괜히 머리가 아파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명월관내 숨겨진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빽빽이 경매만을 기다리는 양반들이 즐비했다.
“오늘은 무슨 그림일까? 난, 그저 여기 와서 그림만 구경해도 좋네.”
“저도 그렇습니다. 대감.”
한켠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훤에게 들려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경매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도통 그림을 경매한다는 개념이 생소해 감도 잘 오지 않았다.
청월은 전각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크게 했다. 며칠 전 세훈을 통해 출입패를 줬고, 그 출입패가 조문우를 통해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문우가 처음 보는 젊은 사내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하아……. 팔자에도 없는 세자저하라니.”
청월은 한숨을 짧게 쉬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명월관 행수의 당당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등장에 세자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양반네들이 소리를 질렀다.
“청월! 이 경매장의 주인을 소개시켜달라니깐.”
“주인이고 뭐고, 이 경매장 크기부터 늘리시게. 점점 사람이 몰려들어오니. 이거야 원.”
아우성이 자자했다. 청월은 익숙한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치맛단이 흩날렸다.
“송구합니다. 경매장 주인은 소개시켜드리기 힘듭니다.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경매장 크기에 대한 것도 검토 중이십니다.”
청월은 한 번 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검은 장막 앞에 섰다.
“바로, 그림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뒤에 서있던 운은 익숙하게 장막을 걷어냈다. 차르륵. 검은 장막이 사라진 곳에는 눈을 의심하게 할 그림이 걸려있었다.
“청에 있는 서역화공의 그림입니다. 이것도 어렵게 구한 그림이죠. 보시다시피 방금이라도 화폭에서 튀어나올 듯 한 생생한 묘사가 도드라지는 그림입니다.”
세자 훤은 그림을 보고 숨을 멈춘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궁에 있는 자신도 힘겹게 한번 본 것이 다인 서역의 그림을 쉽게 경매장에 내거는 자가 궁금했다.
민찬은 위작공장으로 돌아와 다연의 처소를 살폈다. 챙겨줘야 할 짐들을 갈무리할 때 영규가 다가왔다.
“도련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요?”
“뭐가?”
“아니, 산에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도대체 요 며칠 내내 어딜 가시고 이제 오십니까요?”
붓을 정리하던 민찬은 영규를 돌아봤다. 화가 났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영규는 마당에 서있었다.
“어련히 잘 했으려구, 이런 일이 한 두 번이냐? 녀석들은 어찌했어?”
“어른신이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투전판 오가는 심마니였답니다.”
“투전판?”
민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전판과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소문이 도나봅니다. 아무래도 위작이 시장에 나도는 것 같아서, 어르신 심기가 안 좋습니다.”
위작이 시장에 나돈다. 민찬은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번 그림을 소장한 자들은 쉽게 그림을 되팔지 않았다. 그림을 다시 팔려면 거간꾼이 있어야하는데, 그림 장사를 한 두 번 해본 자들이 아니니, 위작인지 아닌지의 안목이 있었다. 그래서 위작은 앵간해서 잘 팔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성규가 위작을 쉽게 파는 건 박성규 밑에 있는 거간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중인놈들에게 팔아재끼고 그 수익을 일부 거간꾼이 받아갔다. 그래서 위작을 그간 팔수 있었던 거다.
“위작이 어째서 시장에 나돌아? 어르신 안채에 계시냐?”
“네, 도련님.”
민찬은 안채로 내달렸다.
안채에는 애체를 닦고 있던 성규가 심드렁하니 앉아있었다.
“어르신!”
“김민찬! 너는 또 예의란 걸 탕반에 말아 먹었느냐?”
“크흠……. 상황이 급해서 그러니 용서하십시오.”
민찬이 뒤늦게 예를 갖춰 앉았다. 성규는 애체를 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영규에게서 들었습니다. 위작이 나돈다니요.”
무슨 소리하려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나 했더니, 위작얘기에 성규는 곰방대를 찾았다. 천천히 담뱃잎을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쳐들어온 그 새끼들 족치니까 그러더라. 빌어먹을.”
부싯돌로 몇 번 불을 붙이더니 이내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 새끼들 뭐, 요즘 삼도 제대로 못 캐고 투전판이나 기웃거리던 것 같아서. 여기서 허드렛일 시켜준다니 좋다고 하겠다더군. 우두머리는 심마니고 나머지는 그저 하루 빌어먹고 사는 놈들이었어.”
“그렇습니까? 이상한 낌새는 없구요?”
“그래서 종호에게 따로 잘 지켜보라고 시켰다.”
공장 호위를 총책임지는 종호를 거론하자 민찬은 안심이 되었다.
“위작 건은요?”
“글쎄, 자기도 그냥 주어들은 거라 잘 모른다더라.”
성규도 답답했는지 한숨 쉬듯 담배연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채경의 집에 머물며 이것저것 그림구경을 실컷 한 다연은 너무 행복했다. 더는 위작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화공님은 나이가 어찌 되십니까?”
채경의 물음에 다연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열여덟이요.”
“저랑 같네요. 이 홍연이도 같습니다.”
다연은 붉은 머리의 홍연을 바라봤다. 또 신나게 약과를 집어 먹고 있었다.
“화공님만 좋으면 친구할까요?”
채경의 말에 다연은 순간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조선에 태어난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바깥구경 제대로 못해보고 규방에서 늙어죽었다. 그래서 친구라 해봤자 유모나 시종정도였다. 친구가 있는 규방아씨들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아무리 홍연과 지낸다 한들 홍연은 조선인이 아니었다. 조선인 친구가 생긴다는 게 가슴 떨렸다.
“좋아요. 채경 아가씨만 좋으시다면.”
“좋아! 이제부터 그럼 말을 놓자! 아가씨는 무슨! 홍연, 술이다! 오늘 밤은 술을 마시자!”
“술이요? 좋아요!”
홍연이 부랴부랴 챙겨온 술잔을 대청마루에서 기울이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느덧 만월이 떠있었다.
“남자들만 의형제를 맺나! 우리도 해보자. 다연아!”
“응?”
“거 보면 나오잖아.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 맺는 거. 우리는 이렇게 셋이 하자!”
“도, 도언겨리? 그게 뭐에요?”
홍연의 물음에 채경은 머리가 아팠다.
“하아……. 크흠, sister-in-law.”
“아하! 좋아요!”
“뭐, 복숭아밭은 없지만 저 보름달과 다연의 그림이면 충분하겠지.”
채경은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제일먼저 잔을 들었다.
“저 달이 증인이 되는 거야. 우리 셋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전혀 이해가 안 돼는 홍연만 벙쩌 있었다.
“조선식으로 하는 거야. 조선식! 조선에 왔으면 조선 법을 따라야지!”
그렇게 말해도 이해가 안 돼는 홍연 때문에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었다.
“에휴, 내 팔자야! 좋아, 그냥 대충하지 뭐, 별 거 있어. 오늘부터 우리 셋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같이 웃고 우는 사이가 되는 거다.”
“누가 언닌데?”
“몰라, 생일 순으로 따지면 내가 홍연이보다 먼전데?”
다연은 홍연을 바라봤다.
“난 3월.”
“그러면, 막내는 홍연이네.”
“네에? 제가 제일 막내라고요? 말도 안 돼!”
“자자 불만은 그만, 각기 잔 들고 달 보며 마셔!”
채경을 시작으로 각기 둘이 따라 술을 들이켰다. 은빛 달이 제각각 빛나는 셋을 향해 내려왔다. 안채 안에 걸린 다연의 꽃그림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