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찬이 다연과 돌아왔을 때 마당에는 채경이 서있었다. 어딘가 묘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크흠……. 왜 넌 거기 있냐?”
“화공님 만나러 왔는데 없어서 다시 돌아갈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오셨으니 잘 되었네요.”
채경은 냉큼 다연의 손을 잡고 끌고갔다. 그때 민찬이 외쳤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 거야? 집으로 가는 건 어렵냐? 조선에서 여인 혼자 사는 거 팍팍해.”
“그 걱정은 접어두시죠. 육촌 오라버니?”
단호하게 채경이 말하자 민찬은 가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슨 말이신지요? 육촌 누이님?”
“다연이 작업장 알아봤습니다. 호위도 상단 애들로 쫙 깔아둘 거고요. 편히 쉬면서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바로 옆에 있으면 그림그리기 힘들겠죠. 저 또한 그림 그리는 거 구경한다고 며칠 상단 일은 손도 못 댔습니다.”
너무나도 솔직한 말에 다연은 웃었다. 그림 그리는 게 신기한지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는 채경 때문에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다.
“콩알, 넌 좋냐?”
“좋지. 그리고 콩알콩알 그만해!”
다연이 큰 눈을 뜨고 노려보자 민찬은 고개를 돌렸다. 여자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적응이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숨 쉬는 걸 까먹을 정도로 다연이 눈부셨다.
“후우……. 그래서 언제 옮기면 되는 거야?”
“다연이만 좋으면 언제든 가능해요. 싹 준비해뒀으니까요.”
“그렇다는데 어쩔 거야?”
“그러면, 이것만 마무리 하고 준비할게요.”
채경은 아쉽다는 듯이 다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민찬을 노려보았다.
“둘, 죽어도 둘이 어디서 뭐하다 만나게 되었는지는 말 안해 줄 건가요?”
“크흠! 모르는 게 약이라니까.”
“저 송상의 보옥 한채경입니다. 애들 풀면 금세 알아내요. 일 키우지 마시고 말씀해주시죠?”
다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민찬을 바라봤다. 민찬은 턱을 매만졌다. 분명,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의 소유자가 채경이다. 물론 공장의 경비는 철두철미하니 오래 걸리겠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거라면 무력도 불사하는 여걸이 채경이었다.
민찬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다는 말 해줄 수 없어.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다연이가 위작을 그렸다는 것, 그걸 일부 내가 도와줬다는 점 정도다.”
“위, 위작이라니! 오, 오라버니가 뭘 도와줘요?”
“거기까지, 질문은 사절. 더 조사하지도 마. 그게 다연을 위해서다. 이유는 뻔하겠지. 왜 그렇게라도 해서 돈을 모아야했을까?”
민찬의 말에 채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라도 해서 돈을 모아야해? 벌어야해? 벌지 못하면 채경은 채경 자신으로써 있을 수 없었다. 분명, 다연도 그런 것이다. 홍다연으로 있기 위해.
“후우……. 됐어요. 더는 조사하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오라버니도 처신 앞으로 잘 하세요. 위작은…….”
“내 걱정 마라.”
그는 다연을 보며 씩 웃었다.
며칠 후 약조했던 날이 되었다. 채경은 괜히 옷에 힘을 줬다.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기다렸다.
“게 없느냐?”
대문 밖의 목소리에 율이 빼꼼히 문을 열자 비단도포 차려입은 사내 셋이 서있었다.
“며칠 전 약조 했던 자다. 주인 아가씨는 계시느냐?”
“네, 따라오시지요.”
율이 안채로 안내하자 따라가던 주윤이 놀라 소리쳤다.
“대뜸 안채라니, 듣기로는 아가씨 혼자 계신다 들었는데.”
“아가씨 명령이니 저는 따를 뿐입니다.”
무뚝뚝하게 율이 안채로 계속 향하자 주윤은 괜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림에 조예가 깊으시다는 저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들이 안채에 있어서 이리로 모셨습니다.”
채경이 깍듯이 설명하며 안채 마당에서 큰절을 올렸다. 제일 화려한 도포를 입고 있던 사내가 흡족하게 웃었다.
“송상의 보옥 한채경 낭자이신가?”
“소녀의 부족한 별칭이 저하께 까지 알려지다니, 광영일 뿐입니다.”
“그간 해왔던 행적을 듣자하니 전혀 부족해보이지 않는 재원일세.”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채경이 깍듯한 예법으로 안으로 들라하자 세자는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들어갔다.
제일 상석에 세자가 앉고 그 옆으로 문우와 주윤이 자리했다.
“호오?”
미처 치우지 못했던 서역그림들이 서안 위에 올려져있자 세자는 흥미롭게 바라봤다. 섬세한 묘사, 조선에는 없는 필법이었다.
“이것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들여온 서역그림입니다.”
“양인의 그림은 실로 신묘하군. 이렇게까지 섬세하다니.”
세자는 그림을 더 보다가 내려놓았다.
“그림경매를 하겠다는 생각은 직접 하였나?”
“네, 부족하지만 소녀의 생각입니다.”
“조선의 근간을 흔들 문제가 될 거라고도 짐작했고?”
“……네. 어쩌면 문제 삼을 사대부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파격이었다. 주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채경을 바라만 봤다. 이 여자가 과연 조선여자인지 의심스러운 대답이었다.
“하하하하하! 재밌네. 재밌지 않나? 조집의.”
“재밌으십니까? 저하?”
“나는 유쾌하네. 지금 조정은 자네가 시작한 그림경매로 시끄럽네. 성리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까지 말하는 대신들도 있지. 만약 전하께서 경매장이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패악한 것이라고 하며 철폐했다면 어쩌려고 그런 일을 시작한 거지?”
“철폐될 거였다면, 이 하찮은 계집애를 만나러 직접 걸음 하셨겠습니까? 소녀의 판단이 옳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오히려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채경이 당황스러운 주윤은 눈만 껌뻑였다. 어딘가 그리운 누이 다연이를 떠올리기까지 했다.
“나라에서 보자면, 그렇게 큰 돈을 벌면서 그 어떤 세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네. 성리학의 근간을 흔든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네. 조선의 그림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장이 될 거라고 믿고 있어.”
채경은 세자가 자신의 생각을 알아준다고 생각했다.
“송상에게 국가에서 부여한 경매장이라는 공식적인 인증을 내리지. 그만큼 세금을 걷을 거지만. 위작을 경매에 내거는 불법 경매장을 단속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그 단속은 누가하는 겁니까?”
“새로 부서를 만들어야겠지.”
“위작 경매장을 신고하면 포상금 제도는 생각하고 계십니까?”
포상금이란 말에 세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뭐는 누가 가져간다고, 갑자기 세금을 걷어 가신다니. 송상 쪽 감식안을 돌려 위작 경매장을 신고하면 도성에 씨를 말려버릴 수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위작을 감식할 감식안이란 게 하루 이틀 만에 키워지는 것도 아니구요.”
세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졌다. 졌어. 역시 장사치를 이길 순 없겠군. 당장 위작 단속할 사람이 없긴 하지. 송상쪽 사람을 쓸 수 있다면 수월할 거야. 그거에 대한 대가를 아니 줄 순 없겠군.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저하.”
채경은 싱긋 웃으며 세자와 열띤 대화를 해 나갈 때 홍연이 다과상을 들고 들어왔다. 시뻘건 머리카락에 세자도 놀라 기이하게 쳐다봤다.
“이 양인은 누구지?”
“윈슬릿가의 장녀 스칼렛입니다. 조선이름으로 홍연이라고 합니다.”
“홍연이라.”
홍연이 가져다준 다과를 먹으며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인 말에 능숙한가?”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다보니 적당히 하는 정도입니다.”
“앞으로 더 자주 찾아올지도 모르겠네.”
“네?”
채경이 놀라 반문하자 세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세자와의 만남이 끝난 채경은 부랴부랴 별채로 넘어갔다. 하필 세자가 오는 날 다연이 작업실로 옮겨가게 돼버렸는지 기가 막혔다.
채경만을 기다렸던 민찬과 다연은 채경을 보자 안도한 눈빛이었다. 다연은 그리던 그림이 드디어 마무리가 되었는지 짐을 미리 챙겨놓았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고 이렇게 길어져? 세자저하가 어엿한 처자 있는 집에 대낮부터 들이닥치고…….”
민찬의 핀잔에 채경은 슬쩍 흘겨볼 뿐 무시했다.
“가마 태워줄게. 멀어.”
“가마, 느리고 더워 그리고 말 탈줄 아니까. 타고 싶지만…….”
조선에서 여자가 말을 탄다니,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말을 탈 정도의 신분이라면 가마를 타는 게 기본이다. 집 담장하나 넘기 녹록치 않았다. 다연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손에는 채경이 그간 챙겨준 치마와 댕기가 잔뜩 들려있었다.
“마련해준 작업장에 가면, 챙겨준 예쁜 비단옷 입고 그릴게.”
“후우……. 그게 낫겠다.”
채경은 민찬에게 눈짓을 하며 별채에서 끌고 나갔다.
“그럼, 예쁜 비단 도포를 홍연이에게 준비해주라 할게! 기다려!”
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위작 같은 건 거들떠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저절로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채경이 챙겨준 도포를 걸치고 도성 안으로 걸었다. 난생처음 비단 도포자락을 걸치니 넓은 소맷부리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채경이가 너무 힘을 줬어. 이게 뭐야.”
“왜, 좋은데. 이렇게 소매도 넓고.”
“에휴……. 좋으면 됐다. 율, 얼마나 더 가야돼?”
“우선 도성 밖에 있습니다. 송상주막에 맡겨둔 말 있으니까 그거 타고 가면 됩니다.”
다연의 짐보따리는 율이 들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찬 장검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보따리였다.
다연이 가고 텅 빈 별채를 둘러보던 채경에게 홍연이 다가왔다.
“아가씨?”
“흠…….”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 살던 집에 왁자지껄 떠들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그간 밀린 일이 한가득이었다. 청월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오는 보고와, 경매장 크기 및 운영문제. 거기다 전시회를 할 가옥선정이 문제였다.
“으휴……. 일 하자 한채경!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