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랜만에 채경의 집은 아침부터 시끌시끌했다. 채경의 제안에 안채에 둘러 모여 아침을 들었다.
“이거 먹고 바로 가봐야 해. 너는 여기 있어.”
민찬이 신신당부하자 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을 집어먹던 홍연이 입을 열었다.
“둘이 사귀어요?”
큰 초록 눈을 껌뻑이며 대놓고 말하자 민찬은 사래가 걸려 켁켁 대고 다연은 화들짝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왜 그래요?”
“크흑……. 괜, 괜찮아.”
민찬의 손이 부자연스럽게 허공을 휘젓자 다연은 물 잔을 서둘러 건넸다. 다연이 준 물을 마시고 그나마 진정한 민찬은 홍연을 빤히 쳐다봤다. 채경은 이 상황에 어이가 없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조선이야. 그렇게 물어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는 몇 년 째 조선에 살면서 아직도 모르니?”
“왜요? 아가씨? 개성에 있을 때는 문제 없었잖아요.”
“그건, 상황이 다르지.”
다연이 떨어뜨린 젓가락으로 다시 밥을 그냥 먹으려고 하자 민찬이 뺏었다.
“밖에 게 없느냐?”
민찬의 부름에 여종 시월이 들어왔다.
“새 젓가락 하나 가져와. 놀라서 먹다 떨어뜨렸으니까.”
“네, 도련님.”
시월은 재빨리 나가 새 젓가락을 갖고 들어왔다. 민찬은 새것을 다연에게 주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 넓은 집에 젓가락 새거 하나 없을 줄 알고?”
“내 여자에겐 자상하다 뭐 그런 겁니까? 오라버니에게 그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 몰랐습니다.”
민찬은 채경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 시끄러워서 도저히 어? 못, 못 있겠네! 내, 내, 내 여자?”
“아닙니까? 아니면 저는 너무 좋겠습니다. 다연이가 오라버니에게 가당키나 합니까?”
“식사나 마저 하시지요. 누이님?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올 테니까, 너는 다연이 잘 데리고 있어!”
“네네, 새언니가 될 분인데 제가 감히 함부로 하겠습니까? 어서 가시지요? 육촌 오라버니.”
새언니라는 말에 다연은 딸꾹질을 했다. 민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위작공장으로 향했다.
민찬이 위작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영규를 찾았다.
“도련님! 도대체 어딜 그렇게 다니십니까?”
화가 난 영규가 소리치자 민찬은 씩 웃으며 봐주라는 듯이 어깨를 토닥였다.
“저는 그렇다 쳐도 어르신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화공님 그렇게 보내고 대타할 사람도 안구하고 그림도 연구안하시고 화가 단단히 다셨습니다!”
“니가 내 마누라냐? 앙? 우리 엄마보다 더 하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일 봐.”
민찬은 깊은 곳에 위치한 안채로 들어갔다.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성규는 싸늘한 눈빛으로 민찬을 맞이했다.
“김민찬, 요즘 매우 바쁜 것 같은데 뭐가 그리 바빠서 나는 얼굴 한번 볼 수가 없는 게냐.”
“아하하하, 어르신. 우리 이제 여기서 그만 접읍시다.”
“접어? 뭘?”
곰방대 재를 탁 털어내며 성규가 민찬을 쳐다봤다. 민찬은 난색을 표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어르신, 확실한 소식통으로 들은 정보니까 서둘러 위작을 접고 한동안 몸을 숨기셔야 해요. 그리고 저는 여기까지만 하려고 합니다.”
“도유를 그렇게 허망하게 빼돌려놓고 뭐어? 접어? 그 얼마나 대단한 소식통이길래 이러는 거야?”
“하아……. 답답하네! 조정에서 경매장을 공식으로 인정했잖아요! 그에 따른 위작단속을 하겠다고 사헌부 조집의가 나섰습니다. 그 사람 일처리 방식으로 따지면 어린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할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그 위작단속의 감식안에 동원된 곳이 어딘 줄 아십니까? 송상입니다. 송상! 육촌 누이에게 듣고 오는 길이에요!”
송상이란 말에 성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돈이 된다면 뭐든 하는 곳이 송상이었다. 공짜로 위작단속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위작단속을 해서 단속된 것만큼의 보상을 받지 않고선 절대 움직일 리 없었다.
“그래도 그건 불법경매장단속이라고 니가 그러지 않았어?”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불법경매장 뿐만 아니라 단순 위작단속이 도성 밖까지 시작했어요! 어르신! 여기서 엉덩이 붙이고 있을수록 달아나는 건 돈이 아니라 목숨입니다! 네?”
심각성을 인지한 성규는 쥐고 있던 곰방대를 냅다 던져버렸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석에 처박혔다.
“철수 준비해!”
민찬은 성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채를 나가 공장 곳곳을 살폈다.
조선 최초의 그림전시회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고 채경은 경매장에 내놓을 다연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이건, 내놓지 않을래.”
채경이 매화도 앞에서 말하자 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곧, 조선 일 마무리 되면 갈 거잖아. 이거라도 있어야 내가 홍다연을 만났다는 걸 기억할 수 있겠지.”
“채경아.”
채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머지 그림을 율에게 가져가라고 시켰다.
“세상은 도유라고 기억하겠지만, 나 한채경만큼은 홍다연이란 사람을 기억할거야!”
한편, 나가사키에서 빈둥대던 데이비드는 헨리의 끈질긴 요구에 마지못해 드디어 조선으로 향했다.
“정말, 자네는 신의 사도가 아니라 악마의 사도같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헨리도 데이비드와 함께 하면서 숱한 경험으로 단련이 됐는지 주눅 들지 않고 맞받아쳤다.
“우리는 조선 어디로 가는 건가?”
“개성으로 갑니다.”
“계송? 그게 어디 붙어있는 건데?”
“저도 잘 모릅니다. 그분이 거기에 계신다길래 바로 가려고요.”
점심이 지나 늦은 오후 무렵 채경의 대문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다연은 별채에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누가 오나 싶었지만 채경의 손님이기 때문에 함부로 알아보기도 예의에 어긋났다.
“아마, prince일거예요.”
“푸, 푸리수?”
“아, 아 조선말 생각이 안나요. 그, 그 왕 아들.”
홍연이 억지로 머리를 굴려서 설명하자 다연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또, 세자저하가 온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율은 약속한대로 찾아온 세자를 안채로 모셨다. 이번에도 안채인 사실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세자는 개의치 않았다.
채경은 미리 나와 예를 갖춰 맞이했다. 도통 세자의 방문목적이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찜찜했지만 사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상석에 앉은 세자는 자신이 못 올 곳을 왔냐며 뜸을 들였다. 채경은 어색하게 또 사업용 미소를 지으며 녹차를 올렸다.
채경이 내려준 녹차를 음미하며 안채를 살펴보던 세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력이 좋은 화공을 소개받을 수 없겠는가?”
“무슨 일로 화공을 찾으십니까? 조선에서 제일 실력 있는 화공들은 모두 도화서에 있을 텐데요.”
세자는 채경이 올린 찻잔만 한참 만지작거렸다. 채경이 답답한지 눈에 힘을 주어 빤히 쳐다보았다.
“곧 영국대사가 온다. 조선의 문화를 모르는 양인에게 백마디 말보다 빠른 건 그림이 아니겠느냐. 대사에게 보여줄 좋은 그림이 있었는데 사고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 그림을 복원할 화공이 필요하다.”
“그림으로 외교를 하시렵니까?”“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국대사는 예술에 조예가 높다고 하더군.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보는데. 추천할 인물이 없는가?”
퇴폐적인 그림이라며 갈기갈기 찢어버린 예판만 아니라면 건재했을 그림이었다. 세자는 채경이라면 복원할 만한 화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이 채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네. 알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게!”
“저하, 저는 그 복원할 그림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물건도 모르는데 계약을 진행할 상인은 송상에는 없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자 세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괜한 시간을 낭비했나보네. 그래도 혹시 나중에 생각나는 인사가 있다면 주저 말고 조집의를 통해 연락 주시게.”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는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하다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채경을 바라봤다.
“듣자하니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전시회의 그림은 지금 볼 수 없겠는가?”
“네? 전시회라니요.”
“도성이 그 전시회 때문에 시끄러웠지 않았나.”
채경은 안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보여주기도 어려웠다. 난색을 표하던 채경은 어쩔 수 없이 병풍을 치웠다. 거기에는 명월관 경매에 보내지 않은 다연의 매화도가 걸려있었다.
당장이라고 흩날릴 것 같은 생생한 매화도에 세자는 넋이 나간 듯 했다.
“이 화공이 누구냐?”
“도유라고 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실력이 출중한 자가 있다니, 이 자를 소개시켜다오.”
채경은 소개시켜줄 수 없었다. 다연은 불법속신자의 신분에 위작제작에 참여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개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 국운이 달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하는 것이냐!”
“설령, 이 한 채경의 목이 떨어진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자는 바닥에 엎드려 알려줄 수 없다고 읍소하는 채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채경과 매화도를 몇 번을 바라보던 그는 한 발짝 양보했다.
“지금은 가지만 언제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조선팔도를 뒤져서라도 데려올 것이다. 그림에서 화공의 절개가 느껴지니 오늘은 더 말하진 않겠다.”
세자는 그렇게 일갈하고 궁으로 돌아갔다. 세자가 지나간 안채는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거처럼 정적만이 흘렀다. 별채에서 안채의 얘기를 듣던 다연과 홍연이 안채로 건너왔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저하께서 나를 찾아? 왜?”
채경은 다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널 일본에 갈 때까지 지켜줄게! 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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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객님/ 빌리이브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뒷구멍으로 본선에 진출한 거라.. 본선의 영광까지는 큰 기대가 없습니다. ㅠㅠ 로망띠끄에서 출간제의가 오긴 했는데.. 완결도 전에 선계약 후 불상사를 겪은 경험이 있기에 어떤식이든 완결후 출간을 원칙으로 하고 있긴 합니다. ㅠㅠ
앞부분 1권정도의 분량이 스토리가 좀 너무 퍼지고..(채경이가 주인공 같고, 로맨스는 쥐똥만큼이고..조문우나 기타 조연이 매력적이고.. 다연이는 쩌리같고..) 원래의 시놉대로 흘러가지 않은 경향으로 예선에 고배를 마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연재를 그만두고 휴재하기에는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랄까 네이버, 로망 포함) 연재는 쭉 그대로 가고.. 열심히 원고를 앞부분 퇴고중입니다... 퇴고하며 동시에 진도를 빼고 있는데.. 이러다 글이 산으로 가나.. 또.. 걱정이 하아;; -0-
영국대사를 공사로 고치긴 해야하는데 연재중간에 고치면.. 혼동이 올것 같아.. 그냥 갑니다. ㅠㅠㅠ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연재는 토요일 꼬박꼬박 최대한 휴재없이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