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르강은 만년설에 덮여 높이 치솟은 로도나산의 남북의 각 계곡에서 시작해서 네트레시아 천년 고도인 아스트리드 동쪽에서 합쳐진다. 하나로 합쳐진 그 강은 롤스이스트의 벌판을 넓고 낮게 흘러 동쪽의 잉걸만으로 빠져나갔다. 눈 녹는 봄날에는 강의 수량이 늘어나 아스트리드에서 회색의 뿌연 냉기를 뿜어내며 세차게 흘렀고, 아스트리드의 많은 평민들은 성 밖의 강가로 나와 겨울 내내 묵혀두었던 의복 같은 것을 강물에 빨았다.
아스트리드 왕성의 하인들은 북리베르강과 연결되어 있는 수로를 청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검은 색 옷을 입고 겨울동안 쌓인 갖은 낙엽과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왕성 안에 있는 지하 물 저장고에 다시 물을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메이는 분주한 왕실의 하인들을 보며 봄이 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새롭게 찾아온 봄과 함께 그녀 또한 백작에게 올해의 첫 임무를 받고 성을 떠나고 있었다. 이번 업무는 롤스이스트 북쪽에 있는 세드릭의 공작 프린에게 백작의 서신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르시아의 무사였는데 그 땅에 일어난 난리를 피해 십년 전 무렵 네트레시아로 넘어와서 백작의 호위무사로 들어갔다. 메이 또한 10살 무렵이었던 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네트레시아로 넘어왔다. 메이 또한 무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단검을 쓰는 방법을 배웠고, 열일곱 살이 된 이후에는 그녀 또한 백작가문을 위해서 무언가 역할을 맡아야 했는데, 백작은 그녀에게 전령의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네트레시아의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던 마르테스의 백작 에르윈은 은밀하게 서신을 전달할 일이 많았고, 여자였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단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메이는 그러한 일에 적격이었다. 메이는 백작의 서신을 전달하는 일들을 꽤 훌륭하게 수행했고, 작년에는 백작에게 새로운 단검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 간 메이가 자주 다녀온 곳은 아니었다. 그 전의 서신의 수신자는 대부분 마르테스 영지가 있는 아스트리드 남쪽 브리스톨 지방에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프린 공작의 저택은 롤스이스트 벌판의 북쪽에 있는 브리엔 호숫가에 있었다. 메이는 북쪽으로 거기까지 올라가본 적은 없었다.
북쪽으로의 여행이 더 어려운 것은 아스트리드와 롤스이스트 사이에 있는 아벤트로숲 때문이었다. 그 숲은 리베르강의 북쪽으로 강을 따라 동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네트레시아의 대부분의 여행자는 그 숲을 지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그 이유는 그 숲 속을 배회하는 저주받은 악령기사들 때문이었다. 숲의 기사들은 아주 오래전 사악한 마법사에게 대항하던 30여명의 기사들이 그 마법사에게 저주를 받아 악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 기사들은 죽지 않는 불사였고 숲을 지나가는 사람을 다짜고짜 죽인다고 했다.
메이 또한 아벤트로숲을 둘러가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 악령기사에 대한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전달하는 서신에 기한은 없었고 백작은 반드시 수신자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메이는 숲을 지나지 않고 숲의 남쪽 길로 에우더로프까지 간 이후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사실 그 길은 숲을 통과하는 길을 제외하고는 아스트리드에서 북쪽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메이는 성문을 나오면서부터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북문 앞의 다리를 건널 때까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숲의 남쪽 길로 접어들면서 확실히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들키는 것을 괘념치도 않는 지 한적한 길에서 대놓고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이전에도 서신을 전하러 가는 길에 미행이 붙은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떼거지로 쫓아오는 미행을 메이는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미행이라기보다는 아예 강도짓을 하려고 쫓아오는 자들 같기도 하였다. 메이는 해가 저문 이후에 그들을 따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모른척하고 계속 길을 갔고 그들 또한 밤을 기다리는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메이를 뒤따랐다.
해가 서쪽의 먼 산 너머로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자 메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벌써 수년간 많은 여행을 다녀 온 메이는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걸었다. 그녀의 보폭은 가벼우면서도 넓어 순식간에 추격자들과의 간격을 벌렸고, 어느 정도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될 때 아벤트로숲의 기슭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윽고 메이는 자신을 미행하던 추격자들의 모습을 달빛아래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검신이 얇고 휘어진 곡도를 허리에 차고 커다란 장궁을 등 뒤로 맨 행색을 보아서 그들은 오런트 지방에서 온 용병들로 보였다. 그냥 모르고 지나가줬으면 하는 메이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은 메이가 숨어있는 장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그 근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그 일대를 수색했고 그 중 한 녀석이 메이가 숨어있는 장소로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달빛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면 들킬 것을 안 메이는 조용하게 그 용병이 오는 방향과 반대로 다시 움직이지 시작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용병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가 달아나는 속도보다 용병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고, 메이와 용병간이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메이는 용병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 명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특히 유렌시아 땅의 오랜 내전에 단련되어온 오런트 용병은 그 싸움 실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뒷걸음으로 빠져나가는 메이는 결국 나뭇가지를 밟아 그 용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인기척을 느낀 용병은 뭐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메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용병이 거의 다가왔을 무렵 메이는 단검을 뽑아들고 바로 그 용병을 덮쳤다. 용병은 어둠속 풀숲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메이에게 대항하지 못했고, 메이는 단검으로 그 용병의 다리를 베었다. 그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메이를 비껴갔다. 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쏜 화살이었다. 다른 용병은 곡도를 빼들고 메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메이는 이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을 것임을 알고는 재빨리 뒤돌아 달아났다. 그 순간 무언가에 물린 것 같은 따끔한 통증이 다리에 느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용병이 쏜 화살이 메이의 종아리를 스친 것이었다. 다행히 화살은 비껴갔지만 오랫동안 달아날 수 없을 정도의 상처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메이는 별 수 없이 절뚝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메이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메이가 숲속으로 들어가자 용병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는 듯하더니, 메이에게 상처를 입은 용병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의 용병이 메이를 쫓아 숲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