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석은 서울 자신의 집 앞에 와있었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갔다. 항상 그랬듯이 투 룸 빌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극심한 피로가 온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바로 침실 문을 열자 한 여자가 흰색 드레스에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 누구시죠?
그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준석이 그 여자의 면사포를 걷었다. 면사포 뒤에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여자의 얼굴은 죽은 사람의 얼굴마냥 전혀 핏기가 없었다. 여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얼굴색과 달리 그 눈빛은 소름끼치도록 형형했다.
여자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는 단검이 거꾸로 들려져 있었다. 여자는 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새빨간 피가 하얀색의 드레스를 붉게 물들였다.
- 뭐야!
준석은 잠을 깼다. 꿈이었다.
… 어디서부터가 꿈인 거지?
준석은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어느 생소한 잔디밭에 누워있었고,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메이였다. 눈앞에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호수 뒤로 아침 해가 이제 막 떠오르는 참이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군데군데 불에 그슬린 흔적이 있었지만, 칼과 도끼와 화살을 받았던 몸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지? 꿈이 아니었나?
메이가 준석을 보고 말했다.
-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준석 또한 포도밭에서의 일이 너무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송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준석의 표정에 메이는 기가 막혔다. 메이는 쓰러진 준석을 등에 업고 밤새도록 걸었었다. 귀밑으로 느껴지는 준석의 숨결에 한편으로는 안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
호숫가에서 메이는 정신을 잃은 준석을 한참을 지켜보았다. 몇 번을 그냥 떠나려고 일어섰지만 메이는 차마 잠든 준석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숲에서 처음 만나 함께 걸었을 때 까지만 해도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만 보였다. … 방문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그런 생각이 커져 갔었다.
그러나 어젯밤 포도밭에서 보여준 준석의 모습은 사람 같지 않았다. 어젯밤 불에 활활 타며 비명을 지르던 병사들과 그것을 무표정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소름끼치던 준석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흡사 숲에서 만났던 악령 기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잠들어 있는 모습은 평안해 보였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밤새 떠날지 말지를 고민했던 메이는 준석이 깨어나면 바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나도 잘 모르겠어.
준석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석은 어젯밤에 자신이 대충 어떤 짓을 했었는지 희미하게 기억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마치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벌인 일이 아니었고 자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했던 것처럼 다가왔다. 메이는 자신이 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준석이 더욱 두려웠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신이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은빛그림자회의 수도사들은 실버포트에 있어요. 실버포트는 여기서 북쪽에 있는 나디브 산맥 기슭에 있고요.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시간인 것 같네요.
메이는 뒤통수가 누가 잡아끄는 것 같은 느낌을 뿌리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준석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 생소한 세상에서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잠깐만!
준석의 외침에 메이가 걸음을 멈춰 섰다.
- 좀 더 도와줬으면 좋겠어.
준석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 뭐라고요?
메이가 준석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 네가 좀 더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 제가 왜 그래야 되는 건데요?
준석이 잠시 동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 여기선 나를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메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준석은 별말 없이 메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메이는 준석이 따라오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사람은 충분히 두려웠지만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이 사람을 헤어지는 것을 애써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메이는 자신의 뒤로 들리는 준석의 걸음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
둘은 하루 종일 호수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메이의 목적지는 호수의 서쪽에 있는 프린 공작 저택이었다. 모시고 있는 마르테스의 에르윈 백작이 프린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메이는 편지의 내용을 보지는 못했지만 백작은 편지를 누구에게도 보여줘서는 안 되며, 반드시 프린 공작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방문자가 없었다면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이전에도 공작의 중요한 편지를 배달한 적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중간에 공격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호수가 엄청 넓어 공작저택에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브리엔 호수를 바라보는 흰색의 3층 저택이었다. 저택 벽은 온통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었다. 메이와 준석은 정문으로 곧장 들어가서 백작의 편지를 전하러 왔음을 알렸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붉은 코트를 입은 공작의 집사 뒤르만이 나와 시간도 늦었고 공작의 몸도 편치 않아 지금은 공작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공작이 내일 두 사람을 만날 테니 오늘 밤은 저택에서 묵으라고 했다.
메이와 준석은 저택 2층 서쪽 방을 받았다. 대학교 강의실 크기의 넓은 방에 침대가 여섯 개나 딸려 있었다. 집사 뒤르만은 준석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었다. 우중충한 회색의 튜닉과 바지였다. 준석은 엉망진창이 된 옷을 벗고, 생전처음 보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뒤르만은 시종들을 시켜 저녁으로 포도주 한 병과 빵과 치즈를 가져다주었다. 둘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준석은 남녀 구분 없이 그냥 큰 방 하나만 내어주는 것에 의아했지만,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준석은 이틀을 같이 지낸 메이였지만, 같은 방에 누워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처음 입어보는 까끌까끌한 옷과 딱딱한 침대 그리고 생소한 방의 천정을 보니 예전 군대 훈련소에 처음 입소했던 밤이 생각났다.
잠을 청하는 준석의 머릿속에 어젯밤 꿈에 보였던 아름다운 얼굴의 여자가 다시 떠올랐다. 여자의 얼굴은 잊히지 않았지만, 준석은 그 꿈을 다시는 꾸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