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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레시아 : 이계의 방문자
작가 : 지나다가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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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음의 불
작성일 : 17-11-21     조회 : 31     추천 : 0     분량 : 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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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은 밤에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져 잠을 자지 못했다.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소리에 아이린과의 추억들이 함께 밀려들었다.

 

 … 왜 발더그린은 약혼자인 나에게까지 자살임을 숨겼을까?

 

 … 아이린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내가 했을 그 무언가를 막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처럼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새 이어졌다.

 

 … 내가 유렌시아에 있을 때 도대체 아이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밀려오기만 할뿐 다시 돌아가지 않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잠들지 않는 그 밤에 프린은 아이린이 죽은 직후의 시간으로 자신을 되돌렸다.

 

 다음날 아침 프린은 준석과 베르나르를 먼저 아스트리드로 보냈다.

 

 - 너희는 먼저 아스트리드로 가서 에르윈 백작의 집에서 머물며, 그 문양에 대해서 알아보아라.

 

 준석은 해라체의 프린의 말투가 항상 귀에 거슬렸다. 마치 회사에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상사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재벌2세들이 이런 느낌일까 하며 생각했다.

 

 둘은 아침에 출발해서 리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멀리 로도나 산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은 낮고 넓게 흘렀다. 강 건너 남쪽으로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베르나르는 틈이 날 때마다 준석에게 마법연습을 시켰다.

 

 준석은 불길을 다루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바닥에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렀는데, 일어난 불길을 오랫동안 살리지는 못했다.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면 금세 준석의 집중력이 흩어졌다.

 

 또한 불길을 화살에 실려 날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자마자 불꽃은 사라졌다. 준석은 바람에 불꽃이 꺼지는 듯싶었다. 옆에서 베르나르는 이런 준석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말했다.

 

 - 그 불은 바람에 꺼지는 불이 아니오. 당신이 꺼트리는 거지.

 

 준석은 베르나르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실천할 수는 없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저것이 불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믿어야 했다. 하지만 그 불은 자신이 알아왔던 것과 똑같은 불이었다. 바람이 불면 꺼져야 하고 물이 닿으면 꺼져야 하는 그런 불꽃이어야 했다.

 

 준석이 일으키는 불길은 뜨겁지 않아 다른 것을 태우지도 못했다. 어찌 일어난 불길이 다른 것을 태우지도 못하고 옮아 붙지도 않는 지 준석은 알 수 없었다.

 

 - 불꽃의 겉모습만 보고 있을 뿐 그 속을 보지 않으니 보기에만 불이요 그 실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허상인 게지.

 

 베르나르는 준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혀만 끌끌 쳤다.

 

 둘이서 길을 나선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강의 북쪽으로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숲은 준석이 이 세계에서 처음 왔던 방문자의 숲이었다. 울창한 삼나무 숲을 보자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날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스트리드는 북리베르강과 남리베르강이 만나는 사이에 우뚝 솟아있었다. 서쪽의 로도나 산과 남북의 강 사이에 있는 이 성은 천애의 요새였고 네트레시아 최대의 도시였다.

 

 성의 북문과 남문은 강을 건너는 다리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다리를 건너면 높고 낮은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왕과 귀족들이 거주하는 왕성은 도시의 서쪽에 들어서 있었는데 높은 내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은 성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다리 근처의 여관에 말을 맡겨두고 성안으로 걸어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 북쪽 성문으로 들어서면서 부터 준석은 퀴퀴한 오물 냄새에 코를 막았다. 검은색의 판석이 깔려 있는 중앙대로는 그나마 나았지만, 주택들 사이사이에 뚫려 있는 골목길은 시궁창 그대로였다.

 

 사람들 사이로 닭과 개, 돼지가 돌아다녔고, 그것을 잡으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북새통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따금씩 말을 탄 사람들이 오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준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계속 코를 막고 있자 옆에서 베르나르가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 그 쪽 세상에는 도시가 없는가 보오?

 

 - 제가 사는 세상의 도시에서는 이런 냄새가 안 나거든요.

 

 - 도시의 냄새가 없다면 그건 도시가 아닌 게지.

 

 베르나르의 말에 준석은 다소 황당했지만 자신이 살던 도시를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킬 자신은 없었다.

 

 베르나르는 준석을 데리고 이리저리 좁아터진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찾아가는 곳이 있는 듯 했다.

 

 -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문양을 보여주며 아는 지 물어볼 수는 없지 않는가. 알 만한 사람을 만나볼 생각이오.

 

 한참을 골목길을 휘젓고 돌아다닌 그들은 어느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한산해지자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잦아짐을 느꼈다. 길가에 나와서 앉아있던 늙은이들이 준석의 일행을 유심히 지켜보며 자신들끼리 무언가 수근 거렸다.

 

 어느 골목길 앞에서 뻐드렁니에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준석과 베르나르의 앞을 막아섰다.

 

 - 어디서 온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부터는 사유지라 출입할 수 없소.

 

 베르나르는 태연하게 말했다.

 

 - 우리는 드미트리를 만나러 온 사람들일세.

 

 그 사내는 못 믿겠다는 듯 베르나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사내는 둘을 어떤 집안으로 안내했다.

 

 -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사내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들어온 문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나무 몽둥이를 든 여러 명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 준석의 일행을 둘러쌌다.

 

 베르나르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 뭔가 잘못아시고 계시나 본데, 우리는 드미트리를 만나러 왔소. 그에게 안내해주시오.

 

 가장 키가 큰 사내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지 연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 요즈음 길드마스터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 몇 푼을 뜯어보자고 하는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여. 네 놈들도 보아하니 몇 푼 뜯어보자고 찾아온 모양인데. 아주 혼 줄을 내주라는 명령이시다. 오늘 잘 걸렸다. 네놈들.

 

 말이 끝나자 사내들이 몽둥이를 쳐들었다. 순간 당황한 베르나르는 준석을 쳐다보았고 준석은 허둥지둥 정신을 집중해서 바닥에 불길을 일으켰다.

 

 준석과 베르나르의 주위로 푸르스름한 불길이 올랐다. 사내들은 갑자기 일어난 불길에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 자들도 있었다.

 

 준석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불길을 죽이지 않고 계속 유지시켰다. 정신이 흐트러질까 두려워 입을 열수는 없었다. 베르나르도 이것을 눈치 챘는지 자신이 나서서 사내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 나는 실버포트에서 온 사람이다. 후딱 가서 드미트리를 데려오지 않으면 상회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

 

 사내들은 들어올 때처럼 우르르 몰려서 나갔다. 서로 먼저 나가려고 잠시 동안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사내들이 나간 후에도 준석의 불길은 계속 타올랐다. 준석은 불길을 보며 이제야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타올라서 불이 아니면서도 불과 같았다. 자그마한 촛불을 그리면 불은 낮고 푸르스름하게 일었고, 대보름날 태워지는 달집을 그리면 시뻘건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마음이 따스한 여름의 햇살을 그리면 불은 따뜻하게 번지기만 할뿐 아무것도 태우지 못했고, 화재처럼 맹렬한 불길을 그리면 불은 삽시간에 주변을 태우고 녹였다.

 

 하지만 언제 꺼질지 모를 정도로 시뻘겋게 타오르더라도 준석의 마음에 불이 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길은 사그라졌다. 불길은 준석의 마음의 장단을 읽고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추는 듯 했다.

 

 준석은 불길에 점점 빠져들었다. 불길을 일으키는 동안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고, 불길이 커질수록 꿈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베르나르가 준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 그만하시오. 이러다 정말 불바다를 만들겠소.

 

 간신히 꿈에서 벗어난 준석은 불길을 물렸다. 준석이 불길을 물릴 때 쯤 몰려나간 사내들이 누군가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매부리코에 얼굴이 넙적하고 땅딸한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는 베르나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는 베르나르를 보자마자 욕설을 지껄였다.

 

 - 이놈아. 오랜만에 와서 홀라당 다 태워버릴 작정이냐!

 

 - 이 어르신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그 정도로 갚을 수 있겠느냐.

 

 준석이 베르나르를 곁눈으로 봤는데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그리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짓는 웃음임을 준석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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