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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레시아 : 이계의 방문자
작가 : 지나다가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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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중재
작성일 : 17-11-27     조회 : 288     추천 : 0     분량 : 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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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는 준석과 프린 공작을 중재시키기 위해 밤을 새웠다.

 

 우선 프린 공작에게는 아이린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문자의 도움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만약 방문자의 도움이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그 현명한 아이린이 어찌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방문자를 소환했겠는가. 그리고 방문자가 사는 세상에는 귀족, 평민 같은 계급이 없이 모든 자가 평범한 세상이라는 것도 열심히 설명했다.

 

 -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범하다면 영지는 어찌 일구며 전쟁은 어떻게 치른다는 말이냐. 그런 말도 안 되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프린은 계급이 없는 국가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유렌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국가 정도가 아니라 큰 땅덩이를 가진 왕국이 어찌 상하간의 계급조차 없이 운영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들 사이의 질서는 하늘이 내린 것으로 마땅히 이에 따르고 순종하여야만 번영과 안정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이 프린의 오랜 믿음이었다.

 

 - 방문자가 사는 세상의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없는 평민들의 천거를 통해서 몇 년의 기간을 정해 임명된다고 하더이다.

 

 - 무슨 괴변이냐. 평민들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 왕을 천거하며, 설사 그들에게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이 모두 다를 터인데 어찌 자신들 모두를 통치할 수 있는 왕을 뽑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기간을 정한다는 것은 무슨 해괴한 소리냐. 당초 왕국을 다스리는 것은 한 평생을 바쳐도 모자라는 일이거늘, 고작 몇 년짜리 왕을 앉혀두고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냐.

 

 베르나르는 프린의 말에 연신 머리만 긁어댔다.

 

 - 소인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옵고…….

 

 - 그런 곳에서 살다 왔으니 저 자의 성품이 저러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 네네. 전하의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주시니 망극할 뿐이옵니다.

 

 베르나르는 준석을 찾아가서는 프린이 다른 귀족에 비해서는 평민과 하인들을 엄청나게 배려하는 성품임을 설득했다.

 

 - 그 배려라는 것은 똑같은 사람사이에서 자신을 희생해서 행하여야 칭찬을 받을 일이지요. 그 귀족이라는 작자는 저 하늘 위에서 자신의 것은 하나도 내놓지 않고 배려라는 것을 입으로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배려입니까.

 

 프린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농노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지 아니해서 세드릭 지방에서는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많은 다른 귀족들이 프린에게 귀족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손가락질 하였지만, 프린은 아무리 하인이고 노예라고 할지라도 같은 신의 자손으로서 행복한 삶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온 준석에게는 이마저도 고깝게 들렸다. 준석은 프린의 재벌 2세 같은 거만함과 안하무인한 행동자체가 싫었다.

 

 - 당신이 어서 아이린의 숙원을 이루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저 프린 공작과 에르윈 백작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오. 부디 싫어도 내색하지 말고 그냥 꾸벅꾸벅 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그래도 메이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 그건 내가 다시 윗분들을 잘 설득해 보겠소.

 

 준석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 그런데 서기관님이 이렇게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베르나르는 갑작스러운 준석의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 내가 평원의 감옥에서 당신을 만나 실버포트의 화를 피한 것도, 그리고 여기까지 당신과 함께 온 것도 아마 루나 여신의 뜻일 것이오. 당신을 도와 아이린 아가씨의 숙원을 이루고 당신이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마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고, 나의 마지막 일이라는 느낌이 드오.

 

 일? 준석은 이 사람에게 일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준석이 사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모든 임무는 돈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물든 준석의 눈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이나 그들의 일은 신성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치장되고는 있지만 결국 모두 돈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쪽 세상에서 자신을 돕는 이 서기관의 일은 돈과 연결되는 것이 없을 터였다. 대가 없이 하는 일을 과연 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대가가 없는 것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자신이 잘못된 것일까. 준석은 혼란스러웠다.

 

 밤새운 베르나르의 노력으로 그들은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프린은 잘못된 세상에서 온 준석을 이해하기로 하되 베르나르와 함께 그에게 이 세상의 질서와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그리고 준석은 자신이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을 따르되 메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르켄의 스트렌 대학으로 가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중재의 결과 준석은 메이의 아버지인 나모와 함께 메이를 스트렌 대학까지 데려가기로 했고, 프린 공작은 베르나르와 함께 에리스 평원으로 가서 키르테스의 행적을 찾기로 했다. 어전회의에 참석하여야 하는 에르윈 백작은 당분간은 아스트리드에서 발더그린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프린 공작이 준석을 교화시키는 첫 번째로 지시하는 것은 그에게 이름을 내리는 것이었다.

 

 - 그런 요상한 이름을 가졌으니 품행이 그럴 것이다. 가장먼저 그 방문자에게 내가 이름을 내리겠다.

 

 베르나르가 이 말을 준석에게 전하자 준석은 무슨 소리냐며 반대했다.

 

 - 아니. 지가 뭔데 내 이름을 짓겠다고 설치는 겁니까!

 

 베르나르가 거의 삼십분을 넘게 설득한 끝에서야 겨우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 우리와 헤어져 먼 길을 가야되는데 그런 이름으로 나돌아 다닐 것인가? 차라리 이마에 ‘나는 방문자요’하고 써 붙이고 다니시게.

 

 준석은 자의반 타의반 베르나르에 이끌려 프린 공작 앞으로 갔다. 물론 공작 앞에서 어떤 반항도 하면 안 된다는 수십 번의 주의를 받은 터였다. 베르나르가 준석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고, 준석은 썩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프린 공작은 준석의 표정을 보았지만 못 본 채 하고 말을 이어갔다.

 

 - 네가 방문자로서 중대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왔으나 아직 이 세상의 질서와 예절을 알지 못하여 그 행동거지가 상스럽고 방탕하기 이를 떼 없다. 하여 오늘 너에게 이 세계의 새로운 이름을 내리니 앞으로는 그 이름에 걸맞게 풍습과 예의를 배워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린이 더 큰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 알겠느냐!

 

 준석은 베르나르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모기만한 목소리라고 네 라고 대답했다. 프린은 준석의 대답을 듣고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앞으로 너의 이름은 제이슨이다. 이제 제이슨으로 일어서라.

 

 프린은 나름 준석의 이름과 최대한 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고른 듯 했다. 준석은 이름을 듣자 맷 데이먼이 나오는 첩보영화가 생각났다. 준석이 일어나니 베르나르가 징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 축하하네. 제이슨 경.

 

 - 성은 없나요?

 

 베르나르는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성은 귀족들에게나 주는 것이지. 자네는 작위를 받은 게 아니라 이름을 받은 걸세. 공작에게 이름을 받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네.

 

 이름 수여식이 끝나자 백작의 공관은 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준비로 부산했다. 메이의 아버지인 나모는 먼 길을 떠나기 위해 메이를 싣고 갈 수레와 양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르윈 백작이 한참 양식을 나르는 나모에게 다가갔다. 나모가 백작이 오는 것을 보자 얼른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했다.

 

 - 딸자식을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그 은혜가 난망(難忘)하옵니다.

 

 - 어느 길로 가려는가? 뱀의 길로 가려는가?

 

 백작은 나모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나모는 가르시아 출신의 출중한 무사로서 많은 전쟁터에서 백작을 도왔고 목숨을 살린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영지를 통틀어 백작이 믿을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자였다.

 

 - 메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로 가야할 듯하옵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 테지. 뱀의 길로 갈 것이라면 영지를 들르게 내 영지에 자네를 도와 같이 갈 사람을 준비시켜두라고 일러두겠네.

 

 - 어찌 이런 작은 일로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겠습니까? 방문자인 제이슨 경께서 같이 가주시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으니 전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소서.

 - 어쨌든 뱀의 길로 간다면 영지는 지나가는 길일 터이니 꼭 들르게.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음날 일행은 각각 길을 나섰다. 나모와 준석은 세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탔다. 나모는 맨 앞의 말의 등에 올라탔고 준석은 메이와 함께 뒤에 수레를 탔다. 스트렌 대학까지의 여정은 아득하기만 했다. 브리스톨의 동쪽 해안가를 따라서 가는 길이 편했지만 둘러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나모는 그래서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뱀의 길이라고 불렸다. 수천 년 전 브리스톨의 바위산 속에서 잠자던 미트가르트라는 뱀이 있었는데, 이 뱀이 잠에서 깨어나 네트레시아의 남쪽 바닷가로 기어갔다는 전설이 있었고, 그 뱀이 지나간 흔적이 이 뱀의 길이었다. 뱀의 길은 이름처럼 깎아지른 절벽사이의 구불구불한 좁은 협곡이었고, 뱀에게서 빠진 비늘이 변했다고 하는 괴물들이 협곡을 따라 곳곳에 즐비했기 때문에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 길로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베르나르에게 얼핏 뱀의 길에 대한 설명을 들은 준석은 무사히 스트렌 대학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는 출발하자마자 나모에게 말을 걸었다.

 

 - 그 뱀의 길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나요?

 

 나모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그 길을 끝가지 가본 적이 없습니다.

 

 - 그렇군요.

 

 준석은 아직 잠들어 있는 메이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 제이슨 경, 저는 뱀의 길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에서 살아남아 본 적도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설마 아비 된 자가 딸자식을 데리고 죽을 자리로 가겠습니까?

 

 나모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준석은 다소 걱정이 줄었다.

 

 - 메이가 그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네요.

 

 나모는 준석의 말에 호방하게 웃었다.

 

 - 메이는 사실 저의 친 딸은 아닙니다.

 

 준석은 메이가 친 딸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놀랐고, 이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나모의 태도에 또 놀랐다.

 

 - 이 사실은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죠. 사실 저는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본 다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죠.

 

 준석은 뭐라고 대답하기가 애매하여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타고 있는 나모는 준석이 듣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자기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메이는 십년도 전에 제가 가르시아에 있을 때 불탄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입니다. 저는 메이를 처음 보고는 한 번에 아라나 신이 저에게 주신 딸이라는 것을 알았죠.

 

 - 결혼은 메이 때문에 일부러 하지 않으신 건가요?

 

 - 하하. 전 원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이 저의 일인데 어찌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겠습니까. 하지만, 그 전부터도 자식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제 뜻을 신이 어찌 알았는지 저렇게 고운 아이를 보내주셨죠. 저는 원래 가르시아를 떠날 생각이 없었는데 메이를 만나고서는 생각이 바뀌어서 네트레시아로 넘어 온 것입니다. 다행히 백작 전하께서 제가 쓰일 때가 있다 하시어 이렇게나마 살게 된 것이지요.

 

 이 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을까. 준석의 그 의문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앞으로는 준석을 위해 산다고 했고, 나모는 메이를 위해 살고 있다. 프린은 일 년 전 죽은 아이린을 위해 아직 살고 있었다.

 

 … 난 뭘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울퉁불퉁한 길에 흔들리는 수레위에서 중요하지만 생각하기 싫었던 주제의 물음이 준석의 머리를 계속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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