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포트의 참사 소식에 네트레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은빛그림자회 소속의 수도사들이 삽시간에 모였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참살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성채 앞의 공동묘지에 묻었다.
비록 화염에 휩싸였지만 석재로 튼튼하게 지어진 성은 온전했다. 하지만 성안에 있던 서적은 물론 먹을 음식과 가재도구 같은 것들은 대부분 불에 탔고, 성채 내벽 또한 시커먼 그을음에 덮여 버렸다. 살아남은 수도사들은 불타버린 가재도구를 밖으로 들어내고 벽의 그을음을 닦아내고 있었다.
프린과 베르나르가 실버포트에 도착하자 남은 수도사들이 그들 주위로 모였다. 모인 그들은 누구도 말이 없었고 모두 참담하고 비통한 얼굴이었다. 베르나르를 알아본 수도사 한명이 그들을 수도사들이 묻힌 묘지로 안내했다. 베르나르는 하룻밤사이에 갑절이나 늘어난 공동묘지에 할 말을 잃었고, 거의 한나절을 새로 생겨난 묘지 앞에서 꺼이꺼이 하며 울었다. 프린은 이런 베르나르를 지켜만 보았다. 많은 자잘한 전투와 싸움에 익숙한 프린이었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수도사들이 이유도 없이 학살당한 참혹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덤들 앞에서 한나절을 보낸 베르나르는 성채를 수습하고 있는 수도사들 중 가장 연장자를 만났다. 그는 베르나르보다는 서열이 낮은 서기관 다에몽으로, 참사 당시 수석서기관의 지시로 아스트리드로 가던 길에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다에몽은 침통함에 빠져 멍하니 성채만을 바라보고 있는 수도사들을 다독여 성채 수습을 진행하여 왔다.
베르나르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자네라도 화를 피해 다행이네.
- 서기관님께서도 다행히 화를 면하셨습니다.
-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일세.
다에몽이 참사 직후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에 탈 것들은 모두 타버린 상황이었다. 성채 앞에 있던 수도사 몇 명을 데리고 성채 안으로 들어가 본 그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시체가 모두 한 덩이가 되어 새카맣게 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 난장판에서 동료 수도사들의 유해를 골라내었다. 그나마 형체가 있는 것은 별도로 안장했고 아예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합장했다. 많은 시신들이 엉겨서 불에 타 그 수를 셀 수도 없었다.
- 방문자의 짓이라는 것은 자네들이 판단한 것인가?
다에몽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왜 방문자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지 저희도 궁금합니다.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시신들은 모두 창검에 당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한두 명이 저지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베르나르는 고개를 끄덕 그렸다.
- 살아남은 자는 없던가?
- 제가 도착했을 때는 물론 가장 먼저 도착한 자도 살아남은 자는 보지 못했다 하더이다.
- 모조리 불에 탔는가?
-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하서고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지하서고를 찾지 못하였다면 외부인의 소행임은 틀림없었다. 외부인의 소행이라면 대체 누구의 짓인가. 베르나르는 참사를 저지른 것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에리스 평원에 많은 도적떼가 있지만 그들은 서적과 종이만 가득한 실버포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도적떼는 가끔 상처를 입거나 질병에 걸린 자를 실버포트에 데려와 치료를 구걸하기도 하였다. 수석서기관 윌로드는 그 자들이 자주 찾아오자 아예 도적떼와 그것을 빌미로 에리스 평원에서 실버포트의 수도사와 방문자는 해치지 않기로 하는 합의를 체결한 바도 있었다.
쿠르즈족이 산맥을 넘어와서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산맥을 넘어와서 실버포트만 불태우고 다시 돌아갔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만인의 부류에는 포함되었지만 살상을 밥 먹듯이 하는 살인자 집단은 아니었다. 보통 그들은 원하는 것만 얻는다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적었다.
-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았는가?
- 창검의 흔적으로 봐서는 도적떼나 평민들의 짓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살인자들은 대부분 일격으로 숨을 끊었습니다. 창검에 능숙하도록 훈련받은 자들로 보입니다.
- 그렇다면 정규군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 그러합니다.
정규군에 당했다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프린이 나서서 말했다.
- 만약 너의 말대로 정규군의 짓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세 곳뿐이다. 플로나 공국의 순찰대이거나 롤스이스트 지방의 사병이거나 아니면 오런트 용병들뿐일 것이다.
- 플로나 공국이나 롤스이스트의 귀족들이 이러한 짓을 저질렀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용병들을 시켜서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르나르의 말에 프린은 답답했던지 탄식하며 말했다.
- 도대체 실버포트를 불태워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자가 이 땅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프린의 말이 맞았다. 사실상 네트레시아의 지식의 보고이며 속세에 관여하지 않는 은빛그림자회를 도륙해서 득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다에몽이 차분하게 말했다.
- 무슨 말이냐?
프린의 물음에 다에몽이 말을 이어갔다.
- 본래 이미 발생한 사건이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벌써 일어났고 누군가 성채로 들어와서 죄 없는 우리 동료들을 도륙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베르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 현명한 대답일세. 그러면 그 정보를 어디서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젊은 수도사 서기들을 시켜서 그 시점에 에리스 평원이나 롤스이스트를 지나간 병사들이 있는지 알아보라 하였습니다.
프린이 다에몽에게 다시 말했다.
- 아무래도 나는 오런트 용병들이 가장 의심된다. 조사를 할 것이라면 오런트 용병들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여라.
다에몽은 프린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 성채를 수습하는데 부족한 것이 있다면 세드릭의 내 영지에게 내 이름으로 요청하도록 하여라.
-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그리고 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프린은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자신이 직접 실버포트에 온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해 말을 꺼냈다.
- 하문 하시오소서.
- 혹시 실버포트에 키르테스라는 가르시아인 수도사가 온 적이 없느냐?
다에몽은 바로 대답했다.
- 있었습니다. 제가 수석서기관님의 지시로 아스트리드로 떠나기 직전에 이곳으로 왔었습니다.
- 그도 이번 참사에 희생되었느냐?
- 참사 전에 그가 실버포트로 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참사가 있던 날 그가 성채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시신들이 모두 불에 타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인지라 그 자도 같이 희생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프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 그렇다면 그 이후에 성채로 온 에릭이라는 기사도 너는 그 행방을 알지 못하겠구나.
-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베르나르가 물었다.
- 그 자가 실버포트에 왔을 때 어디에 묵었는가?
- 동쪽 빈실(賓室)에 묵었습니다. 그때는 실버포트에 손님이 없어 아마 빈실을 혼자 사용했을 것입니다.
- 빈실도 다 정리가 됐는가?
- 그 방은 동쪽 끝에 있는지라 아마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르나르는 프린을 데리고 성채안의 빈실을 찾았다. 입구 근처는 수도사들의 노력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매캐한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동쪽으로 가는 복도 중간부터는 아직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을음이 아치형 복도 천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키르테스가 묵었다고 하는 빈실까지는 불길이 미치지 않아 크게 훼손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빈실안의 집기류가 온통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등불을 들고 방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키르테스의 소지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 이리로 와 보아라.
프린이 문의 바로 안쪽 바닥을 보며 베르나르를 불렀다. 베르나르가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검은색 돌바닥에 희미한 적갈색의 얼룩이 보였다.
- 혈흔이군요.
- 색깔이 아직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봐서 참사 때 누군가 흘린 것일 것이다.
- 그렇다면…
- 키르테스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겠지.
베르나르는 체념했다. 키르테스는 방문자의 소환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자였고, 그 자가 묵었던 방에서 나온 혈흔은 그 자 또한 살인자들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알려주는 강력한 증거였다. 키르테스의 죽음으로 사실상 방문자의 임무를 알려줄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혈흔을 지켜보던 베르나르가 말했다.
- 그런데 이상하군요.
프린이 베르나르를 보며 물었다.
-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냐?
베르나르가 혈흔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 사람이 죽을 정도의 피를 흘렸다면 혈흔이 더 넓고 뚜렷하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냐?
베르나르는 고개를 저어며 말했다
-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키르테스는 다른 장소에서 칼을 맞고 기어서 자신의 방으로 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혈흔이 방 안쪽으로 이어져 있구나.
베르나르와 프린은 이어져 있는 혈흔을 따라서 방구석으로 갔다. 혈흔은 방구석에 있는 등잔대 밑의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고, 등잔대 밑에는 문 앞의 바닥보다는 훨씬 더 많은 혈흔의 흔적이 보였다. 프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 왜 키르테스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을까?
- 아마도 키르테스는 복도에서 칼을 맞고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인자들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기어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가 죽었거나 아니면 살인자들에게 발견되어 여기서 다시 한 번 칼을 맞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베르나르가 손에 든 등불로 바닥을 비추어 가며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눈이 어두운 그에게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잠깐. 바닥이 아니고 벽에 무언가가 있다.
베르나르가 등불로 아래쪽 벽을 비추자 바닥과 맞닿아 있는 검은 석벽의 구석에 자그맣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글자가 있습니다!
- 등잔대 밑에 있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군. 뭐라고 새겨져 있느냐?
프린은 신분을 의식하여 돌바닥에 엎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나르가 바짝 엎드려 글자를 읽었다. 글자는 급히 새긴 것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 왕의 씨를 잉태한 여인은 그 왕을 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여인의 생명으로 이 땅으로 오게 된 방문자여, ×××××××××××××
뒷부분은 워낙 날림으로 쓰여 있어 더 이상 읽을 수는 없었다. 벽에 새겨진 문장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베르나르와 프린에게 큰 당혹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프린이었다.
… 그 글귀의 여인은 아이린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왕의 씨라…
네트레시아에 왕은 하나뿐이었고, 왕을 멸하는 것이 아이린의 숙원이자 방문자의 임무라고 그 글귀는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