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반쯤 가린 선글라스를 쓴 제이는 문 앞에 달린 숫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1605호'
원래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지우는 연극계에선 철수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며 그를 칭찬했다.
ㅡ 강철수 씨 덕분에 가난한 연극인들이 지원을 많이 받았어. 철수 씨 덕분에 다시 살아난 극단도 있잖아.
손에 든 호텔 카드키와 문패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 제이가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저기요."
똑똑똑.
"이봐요."
똑똑……벌컥!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엄마야!"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겼던 어제와는 달리 남색 실크 파자마를 입은 그는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에 작은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
꿀꺽.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이 몇 신줄 압니까?"
제이는 괜히 손목을 쳐다봤다가,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제,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들어와요.“
……치, 언제든 찾아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집게손가락을 까닥인 철수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살짝 입술을 삐죽거린 제이가 천천히 1605호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장 옆에 있는 슬리퍼로 갈아 신은 제이는 주위를 둘러보고 입어 떡하고 벌어졌다.
"……우와."
거실의 천장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걸려있고, 벽에는 우연히 잡지에서 보았던 유명 현대 미술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걸 보니, 철수가 묶고 있는 방은 H 호텔에서 가장 좋은 스위트룸인 것 같았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아, 그게……."
어찌 된 영문인지 1605호 안까지 들어와 있는 제이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당신도 선생님의 죽음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아챘나 보군요."
지끈지끈.
철수와 대화를 나누니 다시 편두통이 도진 것처럼 머리가 아파졌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하는 쓸데없는 말이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가 아예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리를 한 건 아니어서, 그가 했던 말이 자꾸 제이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보통 자동차가 낡으면 일어나는 급발진이 산 지 6개월이 되지 않는 아빠의 자동차에 발생한 건, 확실히 수상한 일이었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제이가 굳은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봤다.
"저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해봐요."
철수는 목이 마른 지 서브 제로(SUB ZERO)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 아빠랑 무슨 관계에요?"
입가에서 흐른 물이 그의 목젖을 따라서 아래로 흘러내리자, 철수는 손등으로 입가를 스윽 닦았다.
도련님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어쩐지 몸짓 하나하나가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맞춰봐요."
"……네?"
"무슨 관계일 것 같습니까?"
제이는 깊고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마술사잖아요. 그런 것도 못 합니까?"
철수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왠지 마술사라는 직업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제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술에 대해서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웬만한 일에는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만, '마술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던 제이의 목소리는 살짝 날카롭게 높아져 있었다.
"마술은 종합 예술이에요."
혹자는 마술이라는 건 단지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가 아니냐고들 했지만, 마술은 결코 사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꿈과 환상을 실현해주는 예술이었다.
"마술사가 되기 위해선 마술에 숨겨진 과학 원리도 알아야 하고,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피나는 연습도 해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의 상식을 깨트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기 위한 창조성도 필요하죠."
제이는 또렷한 목소리로 마술이 얼마나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해주었다.
"마술은 사람들을 '속이는'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위대한 종합 예술이라고요!"
남의 직업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딱 질색인 제이는 휘익,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못 맞추겠다, 이 말입니까?"
정말 이 사람이……!
제이는 팔짱을 끼고 철수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래도 그에게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고급 마술, 심리 마술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요, 한 번 맞춰보죠."
배우기만 했을 뿐 실제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제이는 그동안 그에 관해서 들었던 단서들을 조합해서, 그와 아빠와의 관계를 맞춰보기로 했다.
"혹시 독일어를 잘 하시나요?"
철수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제이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요?"
"음, 그리고……."
하지만 왜 한국인인 그가 독일로 가서 사업을 한 건지, 왜 그가 방송 매체의 인터뷰를 모조리 거절하는지, 그 외에 철수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게 아무리 구글링을 해봐도 철수와 그의 동생 강태오가 함께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들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요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어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과거에 아빠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우리 아빠랑 겨울에 만나시지 않으셨나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던 철수가 표정에 웃음기가 싹 지우고 진지한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머! 맞췄나 봐!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제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아빠가 당신을 많이 도와주셨나 보군요."
"……."
슬쩍 철수의 눈치를 살피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철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랍군요."
……후우.
제이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런 것도 전부 마술입니까?"
사실 다 찍어서 맞춘 거였지만,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제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위로 으쓱였다.
"독일에서 항상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어려있는 걸 본 제이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의 제자셨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아니었다고? 그럼…….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다가 감정이 북받친 듯 그는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매만졌다.
‘어머, 어떡해. 우는 건가……?’
철수에게 아빠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였던 것 같았다.
‘서, 설마…….’
돌아가신 아빠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철수에게 고마우면서도 괜히 미안해진 제이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철수는 다시 냉장고의 문을 열어 남은 물을 전부 목구멍으로 넘겼다. 제이가 자신과 선생님이 만났던 계절을 정확하게 맞춘 것을 예상치 못했던 철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 선생님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제이에게 하신 적이 있었던 건가?
"우리 아빠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
"우리 아빠를 짝사랑하셨나요?"
"……푸흡!"
철수는 하마터면 입안에 있는 물을 밖으로 내뿜을 뻔했다.
콜록콜록.
겨우 물을 삼키고 몇 번 거칠게 기침을 한 철수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제이를 노려보자,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게 아니라, 항상 독일에서 우리 아빠 생각을 하셨다 길……."
"됐습니다."
철수는 여성스러운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입술에 진한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제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다 크지 않은 어린아이가 화장대에서 엄마 립스틱을 몰래 훔쳐 바른 듯한 모습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철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보고 남자를 짝사랑했냐고 묻다니.
"기다려요. 금방 나올 테니까.“
철수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샤워하기 위해 상의를 벗은 철수는 먼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네, 안녕하십니까.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H 호텔에 장기 투숙을 신청했더니, H 호텔 측에서 철수에게 제공한 스위트룸은 하루 숙박비가 1000만 원인 로열 스위트룸이었다.
"혹시 다른 스위트룸 있습니까?"
물론 철수에게 이 정도의 금액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많은 돈을 벌고 나서도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계속 이어오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다른 스위트룸은 전부 다 예약이 되어 있어서 장기 투숙은 불가능하십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 혹시 뭔가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이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은 철수가 조식 뷔페의 위치를 물었다.
"여기 조식 뷔페는 어디에 있습니까?"
- 네. 1층에 있는 프런트에 찾아오시면 직접 안내해 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 6시에 신청한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날 찾아오다니.
철수는 어이가 없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이용시간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입니까?"
-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사용 가능하십니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 아, 저기…….
프런트 직원이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자 철수는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 지금은 사용 불가능하십니다. 혹시 뭔가 드시고 싶으시다면 호텔 룸서비스를 이용하시는 게…….
"왜 사용 불가능인 겁니까?"
- 그게…… 지금은 사용 시간이 지나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시계의 시침은 정확히 숫자 10을 가르키고 있었다.
"혹시 제가 아침 6시에 모닝콜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아, 죄, 죄송합니다.
아직 한국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던 철수가 아침 10시까지 늦잠을 잔 것 같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철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를 올렸다.
드르륵.
N서울타워와 도심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로 남산에 걸려있는 태양이 보였다.
"아침 10시였군."
새벽부터 제이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착각했던 철수는 그녀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오해한 것이 미안했지만, 일단 샤워를 하기 위해서 입고 있던 나머지 옷을 벗어 던졌다.
*
거실에 혼자 남은 제이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볼멘소리를 했다.
"뭐야, 언제든 찾아오라고 그럴 땐 언제고."
긴장이 풀린 제이는 털썩 거실 중앙에 있는 연보라색 소파에 주저앉았다.
괜히 이곳에 찾아왔나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에 오지 않는 건데.
프런트에 호텔 카드키만 전해주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프런트 직원이 호텔 카드키를 확인하고, 제이를 직접 1605호 앞으로 안내했다.
말릴 새도 없이 프런트 직원이 앞서서 걸어가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여기까진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었던 걸까.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머릿속은 더욱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안전 최악이야.’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등줄기에 땀이 맺혀서, 양손으로 손부채 질을 하던 제이는 쉽게 열이 가라앉지 않자,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버렸다.
얼굴이 알려진 후로 어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던 제이는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썼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탓에 답답하고 갈증이 난 제이는 조금 고민을 하다가, 남의 호텔 방이었지만 물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싶었다.
냉장고의 문을 열었더니, 안에는 일반 마트에서는 팔지 않는 외국 음료와 외국 맥주병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우와, 신기하다."
그중에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건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에 담겨 있는 오렌지색 음료수로, 한국에서 파는 F 음료와 색은 비슷한데 과연 맛도 비슷할까 궁금했다.
꿀꺽.
시원한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시면 답답한 갈증이 가실 것 같아서 제이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물어보고 마셔야겠지?'
제이는 철수의 허락을 받기 위해 그가 들어간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저기요. 제가 너무 목이 말라서 그런데 이거 하나만 먹어도……!"
드로어즈(Drawers : 붙는 사각으로 다리 부분이 좀 더 긴 남성용 팬티) 하나만 걸친 철수는 제이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몸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탄탄한 가슴과 조각난 복근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근육이 아니라, 정말로 운동을 좋아해서 생긴 것 같이 근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빨리 문을 닫아야 하는데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몸은 완전히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제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위에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는 블랙 드로어즈를 입고,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던 철수가 성큼성큼 제이에게 다가오자, 놀란 제이는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가까이 다가온 철수는 제이의 손에 들린 음료수 뚜껑을 따서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마셔요.“
철수가 들어간 욕실 안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문을 열자 호텔리어가 룸서비스를 실은 카트가 안으로 끌고 와서, 차례차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다이닝 룸에 있는 식탁 위에 올려놨다.
"주문하신 룸서비스입니다."
난 룸서비스를 시킨 적이 없는데…….
아니, 지금은 그럴 정신이 아니야.
우연히 본 철수의 몸 때문에 얼굴은 화끈 거리고 온몸에 열이 올랐던 제이는 차마 음식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제이의 뒤에서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시킨 겁니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철수는 지금 막 샤워를 막치고 나와서 머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앉아서 먹어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철수를 보고 혹시 아까 일어난 일이 꿈이었나 싶었지만,
그의 팔뚝에 잔뜩 솟아난 근육들이 확실히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일단 철수가 시키는 대로 제이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철수는 아무렇지 않게 주문한 클럽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크림 파스타 안 좋아해요?"
"아니요, 좋아해요."
자신에게 맨몸을 보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철수를 보아하니, 그는 제이를 전혀 여자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괜히 오기가 생긴 제이는 깔끔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 오히려 다행이지, 뭐.'
크림 파스타의 고소한 냄새가 마침 아침을 먹지 않아서 출출했던 식욕을 자극했다.
제이는 앞에 놓여있는 크림 파스타를 먹기 위해 포크를 찾았지만, 식탁에는 포크 대신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젓가락질을 잘 못 하는 제이는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왜요? 배 안 고파요?"
"아니, 아니에요."
호텔 룸서비스에 포크 대신 젓가락이 웬 말이야.
낮게 한숨을 쉰 제이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지만, 쇠젓가락 사이로 파스타 면이 자꾸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시도해서 결국 크림 파스타를 입에 넣었지만, 입 주위에 지저분하게 크림이 다 묻었다.
근처에 있는 티슈 좀 뽑아달라고 부탁 하려고 하다가,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입어서서 티슈를 뽑았다.
쇠젓가락으로 미끄러운 파스타를 집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크림 파스타를 너무 좋아해서 '크림 파스타 귀신'이라고 불렷던 제이는 철수가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 파스타를 반도 먹지 못 하고 군침만 흘렸다.
마지막 에그 베네딕트까지 입안에 넣은 철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다 먹었으니까 마저 먹어요."
"괜찮아요. 맛있게 먹었어요."
입맛이 뚝 떨어진 제이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철수가 거실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는 동안, 제이는 우두커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자신의 손끝만 바라봤다.
"저기 에스프레소 머신 있으니까 커피 만들어 먹어요."
"아니요. 됐어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제이는 얼른 철수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줬으면 했다.
"잠깐만, 여기로 와봐요."
철수가 TV 앞에 있는 거실로 자신을 부르자, 뚱한 표정으로 걸어간 제이는 철수가 앉아있는 소파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여기 와서 앉아요."
주춤주춤 망설이던 제이가 철수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뭔가요?"
철수가 먹던 커피잔을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분명 당신 주위에 선생님을 죽인 범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