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내겐 너무 소중한 그대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0.30
  첫회보기
 
5. 잘 가요.
작성일 : 17-10-30     조회 : 68     추천 : 0     분량 : 8035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한국은 어때?

 

 철수는 차고 있던 가죽 시계를 풀러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냥 뭐, 예전이랑 똑같지."

 

 제이가 무사히 귀가한 것을 확인한 철수는 호텔로 돌아와서 독일에 있는 태오와 영상통화를 했다.

 

 철수의 친동생이자 소규모 할인점 '말디'를 독일 전역으로 퍼지게 한 일등공신인 태오는 고집이 센 자신과는 다르게 융통성이 있었고, 순발력도 좋아서 언제나 회사의 위기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했다.

 

 태오는 요즘 '말디'에 진열할 PB상품(Private Brand : 마트가 자체적으로 기획하는 저렴한 상품) 개발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가서 제품의 품질을 검사하고, 소비자의 욕구에 맞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설문 조사도 철저하게 하는 건, 원래 둘이 같이해야 하는 건데, 혼자 독일에서 회사 고생하고 있는 태오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철수는 멀리서나마 태오를 도와주기 위해 영상통화로 틈틈이 회사 업무를 보고 받았다.

 

  "잘 돼 가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

 

  - 그럼, 내가 책임지고 회사 경영하고 있으니까 형은 아무 걱정하지 마.

 

 태오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아버지를 닮은 철수와는 다르게 태오는 어머니를 닮아서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긴 눈매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수더분한 인상이었고, 그는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 있는 성격이었다.

 

  "……고맙다. 원래는 내가 독일에서 같이 해야 하는 일인데."

 

  - 형제끼리 뭘 이런 걸 가지고.

 

 천연덕스러운 태오의 너스레에 철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형, 그런데 윤백룡 씨를 죽인 범인을 찾는 건 잘 돼 가? 누가 그랬는지 알 것 같아?

 

  "글쎄……."

 

 철수는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선생님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서 한국에 남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범인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한국에 남았던 건데.

 

 철수는 가슴이 죄인 듯 답답했다.

 

  “생각보다 한국 생활이 길어질 것 같아.”

 

  - ……진짜 안타깝다. 윤백룡 씨 살아계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마음에 진 빚을 꼭 갚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백룡은 자신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지 않고 무심하게 떠나갔다.

 

 뒤늦게나마 백룡의 은혜를 갚고 싶었던 철수는 아까처럼 보이지 않게 제이를 뒤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는 자신이 마음데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다신 자신을 만나지 않을 것처럼 떠난 제이를 생각하자 속이 쓰려진 철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왔다.

 

  - 형, 사실 난 항상 형한테 너무 미안했어.

 

  "뭐가 미안해, 인마."

 

 태오가 코를 훌쩍거리자 철수가 어이없어하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태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형과 같이 독일로 입양 왔으면 좋았을 텐데.

 

 독일에서 만난 양부모님은 '양부모님'이라고 부르길 죄송할 정도로 태오에게 크나큰 사랑을 주셨다.

 

 형도 우리 양부모님 같으신 사람들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한국에서 고생했을 철수를 생각하면 태오는 심장이 저릿해졌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아버지를 닮아 마음이 약한 태오가 별일 아닌 것에도 눈물을 보이자, 철수는 다 먹은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 형, 혹시 그 여자 소식은 들었어?

 

 태오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지 바로 눈치챈 철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철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잘살고 있겠지."

 

  - 결혼 ……했다고 하더라.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래.

 

  "잘됐네.“

 

 태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철수의 마음속에는 예전 여자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형은 자신에게조차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털어놓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그냥 속 시원하게 디 자신에게 말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면 좋으련만.

 

 항상 우러러보고 존경할 만한 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는 정말 바보 같았다.

 

  "태오야, 나 석구 만났다."

 

  - 우와, 석구 형을? 어디서?

 

 석구는 시설에서 있을 때 형제와 친하게 지냈던 형이었다.

 

  - 이야, 석구 형. 지금은 뭐 하고 있을지 엄청 궁금한데?

 

  "석구 뭐 하는지 알려줄까?"

 

  - 응, 궁금하다, 석구 형 요즘 뭐해?

 

  "석구 유치원 선생님이야."

 

  - 뭐머?!

 

 석구 형이 유치원 선생님을 하다니 믿기지 않았던 태오가 웃음보를 빵 터트렸다.

 

 유치원 아이들이 석구 형을 싫어하지 않을까.

 

 어쩌면 유치원에서 제일 인기 없는 선생님일지도 몰라.

 

 우와, 어떡해 석구형, 완전 상처 받겠다.

 

 깜찍한 울동과 함께 동요를 부르는 석구를 생각을 하며, 태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 아, 석구 형, 진짜 보고 싶다. 완전 보고 싶다!

 

  "나중에 한국에 오면 석구랑 한번 만나자."

 

 태오는 웃으면서 철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영상 통화를 끝냈다.

 

 

 

 ***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자 발전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제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어떻게 집까지 걸어가지.

 

 인천에서 마술을 가르쳐 주셨던 운성 선생님이 점심을 사주신다고 하셔서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을 나섰더니, 길거리에서 제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ㅡ 우와, 윤제이 아니야? 실물 장난 아니다.

 

  ㅡ 완전 팔다리도 길고 얼굴 엄청 작다. 얼굴 소멸할 듯.

 

  ㅡ 진짜 예쁘다. 마술도 잘하더니 얼굴도 잘하네.

 쑥스러워서 얼굴을 아래로 푹 숙이고 빠르게 약속장소로 걸어간 제이는 즐겁게 운성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발에 물집이 생겨서, 생애 처음 생긴 다리로 땅을 밟으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던 제이가 지하철역 앞에 차를 세우고 있는 철수를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가 모른 척 그를 지나지자, 뒤에서 철수가 제이를 불렀다.

 

  "잠깐만요. 여기 타요. 태워줄 테니까."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때문에 이미 발에 물집이 터진 제이는 철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순순히 철수의 의도를 따를 마음이 없었던 제이는 차에 올라탔다.

 

  "뭐 하는 겁니까."

 

  "왜요, ……타라면서요.'

 

  "……앞에 타요."

 

 무섭다 못해 살벌한 철수의 눈빛과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제이는 결국 철수의 바로 옆좌석에 앉았다.

 

 차를 운전하는 내내 아무 말이 없는 철수를 보고 그가 정말로 자신을 집에 데려다주려고 하는 구나, 라고 생각한 제이는 조금 긴장이 풀어져서 편하게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끼이익.

 

 철수가 갑자기 유턴해서 방향을 돌리자 당황한 제이가 크게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잠깐만 나랑 대화 좀 해요."

 

  "난 철수 씨랑 할 말 없어요."

 

  "할 말 없으면 내 말만 들어요. 그럼 되잖아요."

 

 제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철수는 청계천 근처에서 차를 세웠다.

 

  "내려서 이야기할까요?"

 

  "아니요, 그냥 여기서 하세요. 전 철수 씨랑 한가롭게 청계천 구경할 마음 없어요."

 

 자신 만큼이나 황소고집인 제이를 보고 속이 답답해진 철수가 버튼을 누르자 지이잉 하고 창문이 내려갔다.

 

  "도대체 왜 내 말을 안 믿는 겁니까?"

 

  "철수 씨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죠."

 

  "내가 거짓말쟁이로 보입니까? 난 제이 씨에게 단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요."

 

 제이가 거칠게 머리를 손으로 넘겼다.

 

  "아니, 난 솔직히 말해서 철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빠가 고작 마술 트릭 하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안 믿기고, '환상의 마술' 트릭을 알고 있는 나도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왜 이해를 하려고 해요. 그냥 쉽게 받아드리면 되지."

 

  "그런 나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철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이 아가씨를 어쩌면 좋아.

 

  "……제이 씨가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몰라서 그래요."

 

  "알 만큼은 다 알아요."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에요."

 

  "……."

 

 철수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 물어봤죠. 선생님이랑 어떤 관계냐고. 난 선생님께 진 빚이 있어요. 그걸 갚기 위해선 선생님에 죽음의 비밀을 밝혀내야 해요."

 

  "……빚이요?"

 

  "단순한 채무 관계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큰 ‘마음에 빚’이죠. 그걸 갚기 위해서라도 난 제이 씨를 위험에서 지켜야 해요."

 

 제이는 물끄러미 철수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아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라는 좋은 의도 때문인 것 같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철수는 제이의 평화로운 일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진 제이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일단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철수는 다시 창문을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제이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고, 집 앞에 도착하자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철수가 차에서 내리려는 제이에게 멍함을 내밀었다.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전화해요."

 

  "미안하지만, 내가 철수 씨한테 전화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아요."

 

 제이는 차가운 말 한마디만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

 

 

 

 제이는 아차, 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 맞다. 내 가방!”

 

 원래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덜렁이지만, 하필이면 그 사람의 차에 가방을 두고 내릴 게 뭐람.

 

 제이의 손에는 핸드폰과 남자가 건네준 명함만 들려있었다.

 

 집으로 들어와서도 가방을 놓고 내린 걸 몰랐다니.

 아, 진짜 윤제이, 요즘 왜 이래.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싸우고 나왔는데, 다시 철수에게 전화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던 제이는 가방을 버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소지품들이 몽땅 들어있는 가방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 같았다.

 

 제이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명함에 적혀 있는 철수의 번호를 눌렀고,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이어 철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세요?

 

  “저기…….”

 

 절대 당신한테 연락 할 일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제이는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아서,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입만 벙긋대고 있는데, 철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 윤제이 씨?

 

  “……네, 맞아요! 저 제이에요.”

 

 제이는 철수가 먼저 자신을 아는 체해준 것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한편, 전화를 받은 철수는 의아했다. 왜 나한테 전화를 한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던 철수가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 무슨 일입니까?

 

  “저기……, 사실 제가 그쪽 차에 가방을 두고 내렸어요.”

 

 가방……?

 

 백미러로 자동차 뒷좌석을 확인했더니, 제이가 앉았던 자리에 검은색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래서 절대 연락할 일 없다고 소리쳤던 여자가 내게 다시 전화를 건 거군.

 

 철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쪽’이요? 어느 쪽이요?

 

 철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아, 진짜 망했어, 망했어, 망했어.

 

 배게 위로 자신의 머리를 툭 하고 떨어트린 제이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힘주어 말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강.철.수 씨 차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고요.”

 

  - 누구 차에요?

 

 이 남자 아무래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제이는 핸드폰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남자의 뻔뻔함에 기가 질렸지만 지금 상황에서 ‘을’은 분명히 철수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을’이 ‘갑’에서 가방을 가져오라고 소리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네, 강철수 대.표.님 차에요. ……아하하하하.”

 

  - 음, 그렇군요.

 

 남자의 목소리에서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났다.

 

 ……으, 얄미워.

 

 핸드폰 스피커에서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검정색 C 브랜드 가방 맞습니까?

 

  “네! 맞아요.”

 

  - ……그런데요?

 

  “…….”

 

 뭐야, 이 남자, 정말 나한테 가방을 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이 남자가 내게 가방을 돌려주지 않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제이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그 가방 안에 저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이 있어요.”

 

 가방에는 아빠의 마지막 남은 유품 만년필이 들어있었다.

 

  - 소중한 물건을 그냥 두고 내리면 어떡해요.

 

  “아니, 그게…….”

 

 잔뜩 울상을 지은 제이와는 달리 자신의 가방을 볼모로 잡고 있는 철수의 음성은 여유롭기만 했다.

 

  ‘아, 정말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 화를 내지 않는 건데. 다신 연락할 일 없을 거라고 엄포를 놓지 않았을 텐데.

 

  ‘……정말, 윤제이, 이 바보!’

 

 첧수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알았습니다, 잘 보관했다가 내일 돌려줄게요.

 

  “내일이요?”

 

  - 네, 오늘은 너무 멀리 왔습니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면 한참 걸릴 것 같군요.

 

  “그럼 내일 언제…… 꺄아악!”

 

 베란다에 처져 있는 하얀 커튼 뒤로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제이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핸드폰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커튼 뒤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대체 누구지?

 

 누가 나 혼자 사는 집을 침입한 거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출하기 전 베란다 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했는지, 스산한 바람이 휘잉 하고 안으로 불어 왔고, 하얀 커튼 뒤로 비친 그림자는 점점 더 커졌다.

 

 커튼이 팔락거리면서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제이는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꽉 부여잡았다.

 

  “야용.”

 

  “……?”

 

 슬며시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려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제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노랑이잖아.”

 

 안으로 들어온 코리안 쇼트헤어는 제이가 가끔 사료를 챙겨주던 고양이였다.

 

  “노랑아,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베란다 문을 닫은 제이는 노랑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야옹, 하면서 품안으로 파고드는 노랑이를 쓰다듬으니 놀랐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제이는 노랑이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한참동안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쾅쾅쾅.

 

  “윤제이 씨!”

 

 쾅쾅쾅.

 

  “윤제이 씨!”

 

 오밤중에 대문을 내려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제이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철수가 밖에서 단단한 철문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계심이 강한 길고양이인 노랑이는 야옹, 하면서 제이의 품에서 벗어나 도망갔고, 제이는 대문을 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쾅쾅쾅!

 

 이러다가 동네 사람들 다 깨겠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제이는 슬리퍼를 신고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철컹.

 

  “철수 씨?”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대문을 열자마자 철수는 계단을 두세 계단씩 위로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고, 어안이 벙벙해진 제이도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집안에 들어서서 여기저기 방문을 열어보면서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한 철수가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제이는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요.”

 

  “어디 있어요?”

 

  “네?”

 

  “나쁜 놈 어디 있냐고요.”

 

  ㅡ 그럼 내일 언제…… 꺄아악!

 

 그와 통화를 하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던 것을 떠올린 제이가 입술을 위아래로 딱 붙였다.

 

  “아, 그러니까…….”

 

 철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것을 본 제이는 일단 부엌으로 가서 얼음이 가득 담긴 물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철수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를 마시듯 차가운 얼음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고맙습니다, 잘 마셨네요. 근데 갑자기 누가 침입했던 겁니까?”

 

  “아, 그러니까…….”

 

 통화하다가 지른 자신의 비명을 듣고 집까지 찾아온 철수를 보고 제이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사실은…… 고양이었어요.”

 

  “뭐라고요?”

 

  “제가 가끔 밥을 주는 길고양이가 있거든요. 노랑이가 베란다로 들어왔더라고요.”

 

 내가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건가.

 어이가 없어진 철수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서 버럭 제이에게 화를 냈다.

 

  “길고양이한테 밥을 왜 줘요?!”

 

  “불쌍하잖아요. 애들이 밥도 못 먹고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데 얼마나 불쌍해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는 철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이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가다가 다시 온 거예요?”

 

 철수는 말없이 얼음을 입안에 넣고 와작 깨물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밖에선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제이는 철수가 내려놓은 유리컵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 이만 가볼게요.‘

 

  “……네.”

 

 제이가 신발을 신고 마중 나가려고 하자 철수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니요. 안 나와도 됩니다. 안에 있어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제이에게 철수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마지막 밤인사를 했다.

 

  “잘 자요.”

 

  “……네, 철수 씨도.”

 

 쿵, 하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간 제이는 골목길을 내려가는 철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잘 가요.”

 

 철수의 모습이 사라지자 제이는 창문을 굳게 닫고 아이보리 커튼을 쳤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66 66.나랑 결혼해 줄래? (完) 12/30 405 0
65 65.제이야, 생일 축하해 12/30 417 0
64 64.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12/29 476 0
63 63.알았어, 오늘은 키스만 할게. 12/29 420 0
62 62.너 없으면 못 살아. 12/28 397 0
61 61.윤제이 납치 계획 12/28 432 0
60 60.키스 좀 해줘라. 12/25 411 0
59 59.침대로 갈까? 12/23 432 0
58 58.급발진 사고를 내가 낸 거라니까. 12/22 413 0
57 57.오빠, 미안한데 저 수건 좀 가져다주실래요 12/21 496 0
56 56.그럼 둘이 언제 잤어요? 12/20 424 0
55 55.정말로 미치도록 귀엽다 12/11 405 0
54 54.절대 내 품에서 안 놔줄 거야 12/9 392 0
53 53.나도 철수 씨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12/7 401 0
52 52.원래 독일에서는 인사 대신 목에 키스하는 … 12/5 390 0
51 51. 개미지옥에 빠진 불쌍한 개미 12/4 432 0
50 50.당신들한테 제안할 게 있어요. 12/3 390 0
49 49.영원히 그와 함께 하고 싶어. 12/2 405 0
48 48.철수 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12/1 396 0
47 47.무릎과 무릎 사이에 11/29 811 0
46 46.제이는 철수를 좋아해? 11/27 440 0
45 45.슬프면 슬프다고 말해요 11/26 414 0
44 44.나중에는 내가 너 구해줄게. 11/24 403 0
43 43.제이가 내 사무실에는 어떻게……? 11/24 401 0
42 42.미래의 남편이요? 11/22 400 0
41 41.짝사랑하는 여자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법 11/20 410 0
40 40.제이 씨, 우리 형이랑 사귀어요? 11/17 392 0
39 39.품에 안긴 가녀린 몸 11/16 378 0
38 38.내가 철수 씨를 좋아한다고? 11/15 431 0
37 37.대표님, 제이 씨랑 데이트하세요. 11/14 378 0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