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내겐 너무 소중한 그대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0.30
  첫회보기
 
6.아르곤 레스토랑에서 생긴 일
작성일 : 17-10-31     조회 : 83     추천 : 0     분량 : 7937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H 호텔에 있는 아르곤 레스토랑에 도착한 제이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석에 앉아서 철수를 기다렸다.

 

  ㅡ 여보세요?

 

  ㅡ 철수 씨, 저 제이에요.

 

 철수가 다녀간 다음 날 아침, 아직 자신의 가방이 철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이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ㅡ ……아, 제이. 무슨 일이에요?

 

 두근두근.

 

 이상하게도 지금 막 잠에서 깬 듯한 철수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유별나게 크게 진동했다.

 

  ‘……내가 왜 이러지.’

 

 처음에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지금은 철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예전처럼 철수가 무섭고 두려워서 심장이 요동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제이의 마음속에 있던 철수에 대한 불신은 조금씩 사라진 상태였다.

 

  ㅡ 가방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혹시 저 때문에 깨신 건가요?

 

  ㅡ 아니에요.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괜히 철수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제이는 가방을 찾으러 자신이 직접 H 호텔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ㅡ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ㅡ 음, 오늘 오후에는 회의가 있어서 저녁에나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정해서 문자 보낼게요.

 

  ㅡ 네, 알겠어요.

 

 통화를 마친 제이는 전화를 끊고. 많이 피곤해 보이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근심에 사로잡혔다.

 

  ‘……역시 어젯밤에 내 비명을 듣고 골목길까지 뛰어 올라온 것이 몸에 큰 부담이 된 것 같아.’

 

 몇 분 뒤, 철수에게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시간 : 저녁 7시 / 장소 : H 호텔 아르곤 레스토랑 / 같이 저녁 먹읍시다]

 

 철수가 보낸 문자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서 제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H 호텔 32층에 있는 아르곤 레스토랑의 옆면에 있는 통유리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서울 아경에 제이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대교 아래로 바다처럼 넓은 한강이 흘렀고, 높은 고층 빌딩에서 나오는 빛이 마치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빛났다.

 

  "일찍 왔군요. 늦어서 미안해요."

 

 길고 길었던 회의를 겨우 약속 시각에 맞춰서 끝낸 건지 철수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레스토랑에 나타났다.

 

  "괜찮아요."

 

 철수는 저도 모르게 빤히 제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제이는 평소에 학생다웠던 모습과는 다르게 여성스러움이 한껏 묻어나오는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얼굴,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제이는 지금 당장 화보 촬영을 찍으러 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부하직원이 제이의 팬이라면서 유난을 떠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ㅡ 화장품? 이걸 왜 산 건가?

 

  ㅡ 네? 사실…… 화장품 3만 원 이상 사면 윤제이 브로마이드를 준다고 해서요.

 

  ㅡ 그래서 쓰지도 않는 화장품을 산 건가?

 

  ㅡ 하하, 사실 제가 윤제이 팬이거든요.

 

 뛰어난 마술 실력과 예쁜 외모도 제이의 매력이었지만, 대중들이 가장 열광한 것은 제이의 인성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경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꾸며지지 않은 본래의 성격이 겉으로 드러나는데 제이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고, 싸움을 부추기는 인터뷰에도 현명하고 성숙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래서 제이는 여성 팬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자신에게는 선생님의 딸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철수는 제이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봐요."

 

 제이는 꼼꼼하게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오리지널 크림 파스타를 시켰고, 철수는 등심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나왔고, 오리지널 크림 파스타에서 고소하고 풍부한 크림의 향이 풍겼다.

 

 다행히 식탁에 젓가락이 아니라 포크가 놓여있는 걸 확인한 제이가 손을 내밀어 테이블 오른쪽에 있는 포크를 잡았다.

 

 포크로 돌돌 크림 파스타를 말아서 입안에 넣으니,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색다른 맛이 제이의 입안에 가득 퍼졌다.

 

  ' ……우와! 진짜 맛있다.'

 

 유명하다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풍부하고 진한 크림 파스타의 환상적인 맛은 처음이었던 제이는 천천히 크림 파스타의 맛을 음미하면서 조심스럽게 입가에 묻지 않게 파스타를 입으로 가져갔다.

 

  "크림 파스타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

 

  "저번엔 크림 파스타 다 남겼었잖아요. 그땐 룸서비스가 맛없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럼 왜 다 남겼어요?"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지만, 철수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서 제이는 포크를 내려놓고 티슈로 조심스럽게 입가를 닦았다.

 

  "사실…… 제가 젓가락질을 잘 못 하거든요."

 

 철수가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 씨 나이가 몇 살인데 젓가락질을 못 합니까."

 

 그의 웃음에선 자신을 비웃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괜히 무안해진 제이가 살짝 볼을 붉혔다.

 

  "……뭐, 젓가락질 잘해야지 밥 잘 먹나요?"

 

  "파스타는 못 먹죠."

 

 밉지 않게 자신을 놀리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살짝 눈을 흘겼다.

 

  "제 가방은요?"

 

  "여기 있어요. 물건이 잘 있는지 확인해 봐도 돼요."

 

  "잘 있겠죠.“

 

  “그래요, 내가 도둑은 아닙니다.”

 

 철수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 제이는 건네받은 가방을 옆자리에 고이 모셔두고 힐끗 철수를 바라봤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이는 조금씩 철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삐끗하면서 제이의 손에 들려있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에요. 포크질도 잘 못 하네요."

 

 할 말이 없어서 웃으며 살짝 입술을 깨문 제이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려고 하자, 철수가 그의 테이블에 놓여있던 쓰지 않은 포크를 자신에게 내밀었다.

 

  "이거 써요."

 

  "……네, 고마워요."

 

 제이는 철수가 건네준 포크를 잡았고, 포크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험한 일 한 번도 안 해 봤을 것 같은 귀공자풍의 외모와는 다르게 그의 손은 무척 거칠었다.

 

  "내 손이 좀 거칠죠?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안 해본 일이 없어서 좀 거칠어요."

 

 이런 거 물어봐도 될까.

 

 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두 개 물어봐도 됩니다."

 

  "하나만 물어볼 거에요."

 

  "그래요, 그럼 마음대로 해요."

 

 그와 웃음코드가 통한 제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철수 씨, 은근히 재밌네요."

 

  "그래요?"

 

 제이는 유리잔에 담겨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쩌다 독일까지 가서 사업을 한 거예요?"

 

  "제 친동생이 독일로 해외입양 갔거든요."

 

  "……아, 그렇군요.“

 

 왠지 자신이 눈치 없이 물어봐서는 안 될 질문을 철수에게 한 것 같아서 무안해진 제이는 살짝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이랑 시설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어린 동생만 독일로 입양 갔죠.'

 

  "……힘들었겠군요."

 

  "아뇨, 뭐, 힘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철수는 스테이크를 잘라 급하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이 씨, 가방 안에 들어있다는 소중한 물건은 뭐에요?"

 

  "……음, 사실 우리 아빠의 마지막 유품인 만년필이 들어있어요."

 

  "……."

 

  "아빠가 항상 가지고 다니셨던 거였죠."

 

 제이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철수가 품 안에서 낡은 지갑 하나 꺼냈다.

 

  "나랑 똑같네요."

 

  "……?"

 

  "나도 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에요. 아버지가 쓰시던 지갑."

 

 진갈색 지갑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나한테 제일 소중한 물건은 이거에요."

 

 철수와 눈이 마주친 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 씨가 이렇게 잘 되어서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딸꾹!"

 

 엄마야.

 

 제이는 눈치도 없이 튀어나오는 딸꾹질을 막기 위해 얼른 물을 마셨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딸꾹!"

 

 철수의 입가에서 조금씩 웃음이 퍼졌다.

 

  "아니, 진지한 이야기하고 있는 웃으면 어떡……딸꾹!"

 

 아, 정말 미치겠네!

 

 제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던 철수는 결국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는 남의 속도 모르고 웃고 있는 철수가 너무 얄미워 보였다.

 

  "딸꾹! ……딸꾹! ……딸꾹!"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딸꾹질만 하지 말고 말을 해요."

 

  "누군 딸꾹질 하고 싶어서 하나……딸꾹!"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딸꾹질 때문에 제이는 울상을 짓자 철수는 친절하게 딸꾹질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컵이 반대편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면 딸꾹질이 멈춰요."

 

 제이는 조심스럽게 그의 말대로 입을 컵의 반대편으로 가져가서 물을 마셨다.

 

  "……우와! 신기하네. 진짜 딸꾹질이 멈췄어요."

 

 딸꾹질을 멈추고 좋아하는 자신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철수와 눈이 마주치자, 제이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

 

 

 

  ‘잠깐 이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린데.’

 

 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윤정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어라? 제이잖아? 제이가 여긴 웬일이지?“

 

 대학 친구들과 H 호텔에서 유명하다는 망고 빙수를 먹으러 온 윤정은 호텔 내 명품 레스토랑이라고 불리는 아르곤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서 웃고 있는 제이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신에게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의 앞에는 멀리서 봐도 잘생김이 뿜어져 나오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력이 좋아질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윤정은 그가 훤칠한 키에 흰 와이셔츠 아래로 잘 다듬어진 훌륭한 몸매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이상하게도 남자와 제이를 삼엄하게 경호하고 있는 거구의 우락부락한 경호원만 없었다면 윤정은 그들을 평범한 연인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화장을 고치려는 듯 제이가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하자 윤정도 얼른 제이의 뒤를 따라갔다.

 

  “제이야.”

 

  “어머, 윤정아, 여긴 웬일이야?”

 

 제이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난 여기 망고 빙수가 유명하다고 해서 친구들이랑 먹으러 왔어.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난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왔어.”

 

  “그래? 근데 아까 네 앞에 있던 남자 누구야? 완전 멋있더라.”

 

 저돌적인 성격의 윤정은 이리저리 따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칭 타칭 미남 감별사인 윤정은 멀리 있던 철수의 수려한 외모를 본능적인 감각으로 감지한 자신의 호들갑에 제이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대단하다, 오윤정. 그건 또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나의 미남 감별 능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멀리 있어도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윤정은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크게 브이(V)를 만들었다.

 

  "예전에 우리 아빠한테 신세 졌던 사람이래. 어쩌다 보니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어."

 

  "아, 그랬구나."

 

  "사실 처음에는 오해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고."

 

  "오해? 무슨 오해?"

 

  "처음에는 저 남자가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했어. 사람들이 날 시기 질투해서 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느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했었지."

 

 순진한 제이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제이가 '마술사학교'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녀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늘었다는 걸 알고 있는 윤정은 접착제 붙인 듯이 입술을 딱 붙였다.

 

 윤정은 얼마 전, 제이의 연습실에서 마술 단원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ㅡ 제이가 다시 밝은 모습 되찾은 거 보니까 너무 좋네요. 그동안 풀 죽어 있는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는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단원들을 보고, 뭔가 이상해진 공기의 흐름을 파악한 윤정은 혹시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ㅡ 제이가 불쌍하긴 한데, 우리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지. 안 그래?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윤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지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ㅡ 제이가 TV에 출연한 뒤로 CF 같은 것도 많이 찍었잖아. 요즘 인터넷 사이트에 '제이의 하루'라는 동영상도 돌더라. 제이가 CF 찍은 물건만으로 하루를 생활할 수 있대. 제이 떼돈 벌었을 거야.

 

 윤정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제이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버지를 잃었다.

 

 이제 제이의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한 명도 살아계시지 않은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닌데…….

 

 돈이 많다고 해서 동정 받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닌 데……,

 

 하지만 윤정은 입술만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기범도 지우의 말을 거들었다.

 

  ㅡ 맞아. 제이는 '마술사학교'에서 우승했으니까 앞으로 더 잘 나갈 거야.

 

 기범이까지……?

 

 마술 단원들은 제이와 오랫동안 공연을 함께 해온 사람들로, 제이는 마술 단원들에 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그녀를 아껴주고 위해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었다.

 

 자신에게 마술 단원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설명했던 제이를 떠올리자 윤정은 조금 씁쓸해졌다.

 

 안타깝게도 마술 단원들에게 제이는 직장 동료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ㅡ 돌아가신 제이 아버지가 특이한 마술 트릭도 제이에게 많이 남겨주셨다면서요.

 

  ㅡ 그럼, 이제 '환상의 마술'의 트릭을 아는 건 이 세상에 제이 한 명밖에 없어.

 

  ㅡ '환상의 마술'이라니, 나도 무대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마술이었는데…….

 

 사실 기범이는 오래전에 자신에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제이의 타고난 재능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제이에 대한 열등감을 자신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제이의 옆에 있으면 자신은 천재 베토벤의 옆에 있던 범재 살리에리가 된 것만 같다며 속내를 털어놨었다.

 

 비록 자신은 일찌감치 마술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빨리 손을 뗐지만, 마술을 사랑하는 기범은 도저히 마술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ㅡ 제이한테 불쌍하다고 할 필요 전혀 없어. 따지고 보면 다음 달 월세 걱정해야 하는 내가 제일 불쌍하지.

 

  ㅡ ……아, 나도 영화 연출 연습하는 데 필요한 카메라 있는데, 제이한테 그 정도는 껌값이겠지?

 

  ㅡ 윤설이야 마술 재능이 있으니까 자기 알아서 하겠지, 뭐.

 

 왠지 이곳은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자리인 것 같아서 윤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그날 윤정은 제이에게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도망치듯이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윤정아!"

 

  "……어?"

 

  "무슨 생각해?"

 

  "아, 그게……."

 

 마술 단원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제이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 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윤정은 물끄러미 제이를 바라봤다.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기 전에 미리 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제이도 알건 알아야지.

 

  "제이야, 그게 사실은……."

 

 하지만 진심으로 마술 단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했던 제이는 이 사실을 알면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제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겨우 마음의 다잡고 밖으로 나온 제이에게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제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윤정은 입을 다물고 생긋 미소 지었다.

 

 

 

 ***

 

 

 

  “여기에요.”

 

 제이가 닫혀 있던 문을 열자, 한쪽에는 각종 마술 기구들과 마술 기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세계 마술 올림픽에서 받은 트로피가 진열되어 있는 백룡의 서재가 나타났다.

 

 잠자는 곳과 작업 공간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서재에서 마술에 대한 백룡의 불타는 열정이 느껴졌다.

 

 제이는 책상 밑에 있는 금고에서 마술 노트를 꺼냈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빠가 부탁하셨다면서요. 저는 아빠의 뜻을 따르고 싶어요.”

 

 사실 철수는 왜 백룡이 자신에게 마술 노트를 맡겼는지 짐작이 갔다.

 

 마술사에겐 마술 트릭이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었지만 단순한 아이디어는 저작권으로 등록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마술 트릭은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마술사들 사이에선 마술 트릭을 두고 산업 스파이 수준으로 치열하게 싸운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고 제이를 위해서라도 안전하게 자신이 보관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이제 난 그만 가보겠습니다.”

 

 철수가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제이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의아한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말끝을 흐린 제이는 철수의 옷깃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고, 그녀의 뺨은 수줍은 듯 붉어져있었다.

 

  “나랑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 줄래요?”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66 66.나랑 결혼해 줄래? (完) 12/30 405 0
65 65.제이야, 생일 축하해 12/30 417 0
64 64.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12/29 476 0
63 63.알았어, 오늘은 키스만 할게. 12/29 420 0
62 62.너 없으면 못 살아. 12/28 397 0
61 61.윤제이 납치 계획 12/28 432 0
60 60.키스 좀 해줘라. 12/25 411 0
59 59.침대로 갈까? 12/23 432 0
58 58.급발진 사고를 내가 낸 거라니까. 12/22 413 0
57 57.오빠, 미안한데 저 수건 좀 가져다주실래요 12/21 496 0
56 56.그럼 둘이 언제 잤어요? 12/20 424 0
55 55.정말로 미치도록 귀엽다 12/11 405 0
54 54.절대 내 품에서 안 놔줄 거야 12/9 393 0
53 53.나도 철수 씨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12/7 401 0
52 52.원래 독일에서는 인사 대신 목에 키스하는 … 12/5 391 0
51 51. 개미지옥에 빠진 불쌍한 개미 12/4 432 0
50 50.당신들한테 제안할 게 있어요. 12/3 390 0
49 49.영원히 그와 함께 하고 싶어. 12/2 405 0
48 48.철수 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12/1 396 0
47 47.무릎과 무릎 사이에 11/29 811 0
46 46.제이는 철수를 좋아해? 11/27 440 0
45 45.슬프면 슬프다고 말해요 11/26 414 0
44 44.나중에는 내가 너 구해줄게. 11/24 403 0
43 43.제이가 내 사무실에는 어떻게……? 11/24 401 0
42 42.미래의 남편이요? 11/22 400 0
41 41.짝사랑하는 여자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법 11/20 410 0
40 40.제이 씨, 우리 형이랑 사귀어요? 11/17 393 0
39 39.품에 안긴 가녀린 몸 11/16 378 0
38 38.내가 철수 씨를 좋아한다고? 11/15 431 0
37 37.대표님, 제이 씨랑 데이트하세요. 11/14 378 0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