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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소중한 그대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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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
작성일 : 17-10-31     조회 : 78     추천 : 0     분량 : 8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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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는 옷깃을 잡은 제이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제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지금은 밤늦은 시각이었다.

 

 늦은 시각에 여자가 집으로 들어온 남자의 옷깃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건…….

 

 물론 여자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 철수는 지금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사랑했던 여자에게 버림받은 후,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여자들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지만 그동안 본 적 없었던 제이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제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

 

 제이는 철수의 옷깃을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움켜잡았다.

 

  ㅡ 사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메일 한 통을 보냈습니다.

 

 제이는 조금 전에 철수에게서 아빠가 죽기 전에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ㅡ 메일에서 선생님이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금고에 있는 마술 노트를 잘 보관해주고 제이도 잘 보살펴달라고요.

 

 ……그럼 아빠는 살아계실 때 이미 죽음을 예감하시고 계셨던 걸까.

 

 정말 아빠의 목숨을 위협하는 누군가가 있었던 건가.

 

 대체 누가 우리 아빠를……!

 

 철수의 말대로 아빠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한 제이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아빠의 죽음에 모종의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제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세상에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는 건가.

 

 고작 마술 트릭 하나 때문에……?

 

 철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혼자서 집에 있는 게 두려워진 제이는 다시 힘을 줘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내가 사는 2층 단독 주택은 경비가 취약한 곳인데, 만약 나쁜 놈들이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면……?

 

  “…….”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철수가 제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지그시 제이와 눈을 마주쳤다.

 

  “진심입니까?”

 

 평소와 다르게 철수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네?”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하면, 또 나이가 몇 살인데 무섭냐고 그가 놀리지 않을까. 걱정된 제이는 말문을 열려고 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입술을 딱 붙이고 있는 제이를 보고 철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난 괜찮아요."

 

 다행스럽게도 그는 제이가 왜 그의 옷깃을 잡고 놔주지 않는지 알아차린 것 같아서, 표정이 환해진 제이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준 철수가 고마웠다.

 

  "네, 그럼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실래요?"

 

  "……."

 

 제이의 제안을 독일식으로 해석한 철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래요, 좋습니다."

 

 생긋 웃으면서 부엌으로 달려가는 제이의 뒷모습을 보며 철수의 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제이의 유혹은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선생님이 자신에게 제이를 부탁한다는 의미는 이런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의리도 소중했지만, 제이가 저렇게까지 자신을 원하는데, 그녀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할 일이 못 되는 것 같았다. 철수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래도 이건 아니야.‘

 

 언제부터 그녀가 자신에게 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제이를 잘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평소 제이는 커피 믹스를 즐겨 마셔서, 드립 커피 머신은 찬장에 묵혀두고 있었지만, 철수는 드립 커피를 좋아할 것 같아서, 제이는 찬장에 박혀있던 드립 커피 머신을 꺼냈다.

 

  "저기, 제이 씨,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네? 무슨 말이요?"

 

 갈아진 커피콩을 드리퍼 안에 담고 온수 버튼을 누른 제이가 고개를 돌리자, 철수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제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좀 아닌 것 같아요."

 

  "……?"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머릿속은 물음표가 가득 채워진 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드립 커피 별로 안 좋아하세요?"

 

  "아뇨, 좋아합니다. 물론 커피는 좋아하지만……."

 

 잠깐 커피 마시면서 얘기 좀 하고 가라는 게 뭐 어때서 그러는 거지? 제이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수 씨도 좋다면 그냥 하세요."

 

 항상 냉정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던 철수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로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철수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뭐 먹고 싶으세요?"

 

  "……에에? 아, 아닙니다. 먹고 싶다뇨."

 

 제이는 혹시 그가 커피 대신 뭔가를 먹고 싶은 건가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철수 씨가 왜 저러는 거지?

 

  "제이 씨."

 

  "……네."

 

  "정말로 나랑 자고 싶어요?"

 

  "네에?!"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지고, 얼굴이 빨개진 제이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나랑 자고 싶다는 뜻 아니었어요?

 

  “내가 미쳤어요? 내가 철수 씨랑 왜…….”

 

 말문이 막힌 제이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유혹을 해놓고 자신을 변태 취급하는 제이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철수는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독일에서 남자한테 커피 마시고 가라는 건, 같이 자자는 뜻이에요.”

 

 독일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커피 마시고 갈래?'라고 하는 것은, 한국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라면 먹고 갈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럼…… 이거 먹지 마요.”

 

 제이는 드립 커피가 따라진 커피잔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치워버렸다. 제이는 얼굴을 붉힌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나, 난 그냥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조금만 같이 있어 달라는 뜻이었어요.”

 

 ……아, 그런 거였나.

 

 무안해진 철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철수 씨랑 왜 그, 그, 그, 그, 그런 짓을 하자고 하겠어요.”

 

 ……그런 짓이 뭔데?

 

 하지만 철수는 질문하는 대신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독일 문화에 익숙했던 철수가 한국에서 벗어난 적 없었던 제이를 오해한 것 같았다. 문화 차이로 인해 생긴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전 철수 씨를 절대 남자로 보는 일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철수 씨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문 철수가 성큼성큼 제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왜, 왜 이러세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제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남자로 안 보는 거면 커피나 줘요. 커피나 마시고 가게.”

 

 제이는 절대 그에게 커피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철수도 지지 않고 제이의 손에 들려있던 커피잔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커피잔을 두고 두 사람 사이에서 팽팽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안돼요, 커피 마시지 마세……!”

 

 쨍그랑.

 

 두 사람 손에 들려있던 커피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찢어질 듯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어머! 어떡해. 옷에 다 묻었잖아요.”

 

 검은색 커피가 자신의 흰 와이셔츠를 축축하게 적신 걸 보고 철수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자 물줄기가 그의 단단한 팔뚝과 넓은 등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철수는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쓸어 넘겼다.

 

 와이셔츠에 쏟은 커피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제이의 욕실에서 샤워하게 된 철수는 비누 거품으로 하체를 닦다가 제이를 떠올리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ㅡ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전 철수 씨를 절대 남자로 보는 일 없을 테니까.

 

 거울에 비친 철수의 몸은 단단한 근육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전문 트레이너에게 멋있다는 칭찬을 들었던 탄탄한 몸인데, 날 절대로 남자로 보는 일이 없을 거라고?

 

 철수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며 소리쳤던 제이의 행동이 깜찍한 도발로 느껴졌다.

 

 한편, 아빠의 옷장에서 철수가 입을 만한 옷을 찾고 있던 제이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철수 씨한테 이걸 입으라고 할까?"

 

 당근을 물고 있는 깜찍한 토끼가 그려져 있는 파자마였다.

 

 예전에 사두고 아빠가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인 것 같았다.

 

  "토끼 옷을 입은 철수 씨라니……."

 

 토끼 파자마를 입은 철수를 상상한 제이는 큭큭, 웃으며 욕실 앞 바구니에 토끼 파자마와 수건을 가져다 놓았다.

 

 똑똑똑.

 

 제이는 손등으로 욕실 문을 두드렸다.

 

  "철수 씨, 앞에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 가져다 놨으니까 입으세요."

 

 바구니에 토끼 파자마가 있는 걸 보면 엄청 놀라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 제이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섰다.

 

  "잠깐만요."

 

  "……?"

 

 제이가 다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욕실 문에 다가서서 귀를 기울였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수건 좀 안으로 가져다주세요."

 

  "네……네?"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철수의 황당한 요구에 제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살짝 문을 열 테니까 수건만 전해줘요."

 

  "그, 그냥 앞에 있는 거 철수 씨가 가져가서 쓰시면 되잖아요."

 

  "바닥에 물 떨어질까 봐 그래요."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왜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못 하겠습니까? 날 남자로 안 본다면서 왜 그래요?"

 

 자신이 지나치듯이 한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철수를 보고 기함을 한 제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살짝 벌렸다.

 

  '정말 유치한 사람이야.'

 

 자신을 골리려고 일부러 황당한 요구를 하는 철수의 숨겨진 의도를 한 번에 파악한 제이는 절대 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여기서 오히려 당당하게 나온다면 제 꾀에 넘어간 철수가 당황할 것이라고 예상한 제이는 떨지 않고 마술 무대에 서기 위해서, 담력 훈련을 해왔던 배짱으로 크게 목소리를 소리쳤다.

 

  "……그래요, 열어요!"

 

 제이의 목소리에는 철수가 절대 문을 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욕실을 바라보면서 제이는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흥, 그럴 줄 알았어.'

 

 철수와의 치열했던 심리전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제이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퍼졌다.

 

  "문 안 열거죠? 그럼 전 이만……."

 

 벌컥!

 

 닫혀 있던 욕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뿌연 김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아 버린 제이의 눈앞에는 까만 어둠만 보였다.

 

 욕실에서 나온 더운 열기가 차가운 피부에 와닿았고, 물방울이 욕실 타일로 뚝,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자신이 항상 쓰던 비누 냄새가 났다.

 

 철수는 낮은 중저음으로 제이에게 물었다.

 

  "수건 어디 있어요?"

 

 눈을 감고 있던 제이는 손에 들린 부드러운 수건을 꽉 움켜쥐었고. 철수가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잡자, 그녀는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툭 그녀의 콧잔등으로 떨어졌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번쩍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린 제이는 눈앞에 욕실 문이 보이자,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

 

 

 벽에 걸려있는 정사각형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줄을 잡아당기자, 동그란 CD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불이 켜지듯이 음악도 켜지고 감미로운 선율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오랜만에 CD로 음악을 들으며, 제이는 아까 있었던 철수와의 신경전으로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 선생님 서재에 있는 물건 안 치웠어요?"

 

 샤워를 끝낸 철수는 위아래로 당근을 물고 있는 토끼가 그려진 귀여운 파자마를 입고 나왔다.

 

 팔다리가 긴 철수에게 아빠의 토끼 파자마는 짧았는지, 철수의 손목과 발목은 훤히 드러나있었다.

 

 제이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걸 입은 거예요?"

 

  "입으라고 준 거 아닙니까?“

 

 철수 씨가 토끼 파자마를 입었다니.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 옆에 와서 앉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겨우겨우 웃음을 꾹 참았다.

 

  "말해 봐요. 왜 안 버렸습니까?"

 

 제이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입에 가져가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돌아가신 분 물건은 빨리 치워야 한다지만, 난 그냥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왜요?'

 

  "물건에는 그 사람과 함께 한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잖아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오래된 천장에 얼룩덜룩 껴있는 곰팡이가 보였고, 돌아가신 엄마가 혼수로 가져온 TV장은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지만, 모두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아마 제이 밖에 없을 겁니다."

 

 제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난 CD로 음악을 듣는 게 좋아요."

 

  "……CD도 나쁘지 않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흐르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철수는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버스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제이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항상 눈을 감는 것 같았다.

 

  “저번에 호텔에서 나한테 왜 화낸 건지 물어봐도 돼요?”

 

 철수는 호텔에서 화를 내고 사라졌던 제이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랬어요.”

 

  “…….”

 

  “철수 씨가 내 주변 사람들을 범인으로 의심하니까.”

 

 철수는 자신이 제이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제이에게 자신의 행동은 무척 불쾌했을 것이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선한 사람들이에요. 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를 짓는 기분이에요.”

 

  “……그랬군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다니…….”

 

 제이가 살짝 눈을 흘기자 철수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오해였어요. 미안해요.”

 

  “됐어요, 넘어오지 말아요.”

 

 제이가 집게손가락으로 자신과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제이 씨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난 제이 씨가 날 유혹한다고 생각했어요.”

 

  “틀렸어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죠.”

 

 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피니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마술 단원들이 제이 씨에게 소중한 사람들인가요?”

 

  “멤버들이랑 공연 끝나고 같이 삼겹살 먹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퇴근하고 왜 회사 사람들을 만나요?”

 

  “그럼 철수 씨 회사에선 회식 같은 거 안 해요?”

 

  “퇴근 후에는 전적으로 개인 시간이죠. 절대 간섭 불가에요.”

 

  “그래요?”

 

  “그럼요. 독일에선 그래요.”

 

 제이는 작게 탄성을 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독일과 한국은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삼겹살 진짜 맛있는데.”

 

  “삼겹살보단 스테이크가 맛있죠.”

 

  “한국 사람이면 삼겹살을 먹어야죠.”

 

  “그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그와는 통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낀 제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철수 씨랑 나랑 맞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재미없어요.”

 

  “재밌습니다.”

 

 동시에 상반된 답변을 내놓은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픽, 하고 웃었다. 우리는 어쩜 이렇게 다른 걸까.

 

 웃음을 그치고 서로 눈이 마주친 철수와 제이는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펄수와 자신을 서로 너무 많이 달랐지만,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독일에선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간섭은 받지 않겠어요.”

 

 사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지쳤던 제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들과 일 끝나고 같이 삼겹살 먹으면 외롭지 않아서 좋겠군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진 제이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삐삐.

 

 핸드폰 알람 소리에 일어난 제이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소파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이 덮여있었고 핸드폰에는 철수가 보낸 문자가 남겨져있었다.

 

  [먼저 갑니다. 잘 자요. 3:14 AM]

 

 제이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한참 동안 그가 보낸 문자를 바라봤다.

 

 

 

 ***

 

 

 

 마술 공연을 위해 마지막으로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른 제이는 거울을 보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잘하자, 윤제이, 화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쥔 제이는 자신을 힘차게 격려했다.

 

 벌컥.

 

 지우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와자 화들짝 놀란 제이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도 참, 대기실 들어올 때 노크 좀 하시지.

 

  “설어야. 네 손님 왔어.”

 

  “제 손님이요?”

 

  “응. 예전에 대기실에 수국 놓고 가신 분이라던데?”

 

 ……수국이라면, 철수 씨가 온 건가?

 

 지우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손이 거칠어진다면서 손등에 듬뿍 핸드크림을 짰다.

 

  “음, 이거 너무 많이 짰다.”

 

 자신의 손에도 듬뿍 핸드크림을 발라주며 자신의 손을 쓰다듬는 지우의 손은 보들보들 무척 부드러웠다.

 

 똑똑똑.

 

 시윤이 이미 열려있는 대기실 문을 정중하게 두드렸다.

 

  “제이야,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지금 제이 찾아온 손님 있어. 나중에 얘기해.”

 

 제이는 살짝 웃으며 시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우는 아직도 손이 미끌미끌 하다며 시윤의 손에도 핸드크림을 발라주었다.

 

  “야, 박시윤. 너 무슨 손이 여자 손 같다?”

 

  “네?”

 

  “제이 손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은데?”

 

  “무슨 말도 안 되는…….”

 

 대기실에 남은 지우와 시윤을 뒤로하고 복도를 따라 공연장 홀 앞으로 나온 제이는 송아지같이 큰 눈방울에 오뚝한 콧날을 자랑하고 있는 남자가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까무잡잡하면서 훤칠한 키의 그는 한 손에 수국을 들고 있는 남자가 제이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이 씨, 저는 이정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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