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옆에는 제이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지우가 앉아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고, 잔뜩 부어버린 목구멍은 꽉 막힌 것같이 아려서 쉽게 입을 열 수 없었지만, 제이는 겨우겨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지우 ……언니?"
"제이야, 괜찮아? 이제 좀 정신이 들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까지 무대 위에 있었는데 지금 자신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술 공연을 보러오신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제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무거웠던 사지가 마술 공연을 생각하나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지금이라도 공연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제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지우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긴 어디야, 공연장 근처에 있는 S대 병원이지."
쇠사슬이 달린 듯 묵직한 팔을 들어보니, 자신의 오른쪽 팔뚝에는 링거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지우 언니, 죄송한데 지금 빨리 간호사 좀 불러주세요."
"간호사? 간호사는 왜?"
"빨리 공연장에 돌아가서 관객들에게 저의 괜찮은 모습 보여드려야 해요."
물이 꽉 들어찬 수조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한 자신을 보고, 관객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관객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한 제이의 표정이 한껏 어두워졌다.
"제이야, 너 지금 공연장 가려고 하는 거야?"
"네, 얼른 가야 해요."
제이가 직접 팔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을 빼내려고 하자, 지우가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네가 주삿바늘 함부로 빼면 어떡해? 그건 간호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안타까워서,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제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진심으로 오늘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관객들이 많이 놀랐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제가 가서……."
"대체 가서 뭐 하려고 해?"
"……."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제이에게 더 화가 난 듯 지우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가봤자 공연장에 관객들도 없을 거야. 다 집으로 돌아갔다고."
"……다 집으로 가셨다고요?"
"그럼. 공연 끝났으니까 다 집에 갔지, 뭐. 텅 빈 공연장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잔뜩 실망한 제이는 고개를 밑으로 푹 내리고, 눈물만 글썽였다. 정말로 이렇게 공연이 끝나버린 걸까.
"……공연은 어떻게 끝났어요?"
"그냥 관객들한테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겼다고 사정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인사했지."
마지막 무대 인사는 마술 공연의 주인공이자 호스트인 자신이 해야 했었던 일이었다.
제이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관객들이 많이 놀랐겠어요."
"쓸데없이 관객들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몸은 정말 괜찮을 거야?"
"네? ……네."
사실 아직도 잠금장치에 달려있던 검은 핀셋을 뽑아내느라, 힘을 주고 잡아당겼던 손가락이 부러진 것처럼 아팠지만. 제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수조 안에서 몇 분? 아니, 몇 초만 더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랬나요?"
수조 안에서 정신을 잃었던 제이는 어떻게 자신이 그 속에서 빠져나왔는지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 철수 씨 아니었으면 넌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철수 씨요?"
"철수 씨가 너 구해줬잖아. 기억 안 나?"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긴 제이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ㅡ ……강철수 씨?
눈을 뜨자마자 보였던 건, 무대 위에 환한 조명과 함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철수의 얼굴이었다.
'철수 씨가 여기에는 웬일이에요?'라고 묻기도 전에 철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먼저 제이에게 물었다.
ㅡ 제이, 정신 차려요. 이제 괜찮아요?
"철수 씨, 정말 대단하더라. 어떻게 CPR을 할 수 있지?"
"……철수 씨가 심폐 소생술을 했어요?"
'그래, 네가 숨을 쉬지 않으니까 어찌나 절박하게 CPR을 하던지, 옆에서 보는 내가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어."
"……그렇군요."
제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야, 구급차가 올 동안 네 몸이 차가워질까 봐 수건으로 네 몸도 덮어주고, 직접 구급차에 널 태워서 병원까지 데려온 사람이 바로 철수 씨야."
"……정말요?"
"그래, 철수 씨, 진짜 좋은 사람이라니까."
제이는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철수가 좋은 사람이란 건 제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거친 말투와 무서운 인상 때문에 오해했지만, 분명히 철수는 선한 사람이었다.
똑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시윤이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제이 일어났네, 몸은 좀 괜찮아?"
"응, 괜찮아요, 시윤 오빠. ……공연은 어떻게 됐어요?"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공연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제이가 조심스럽게 시윤에게 물었다.
"아, 그게……."
시윤은 난처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실 마지막 마무리를 기범이가 하긴 했는데, 관객들이 많이 놀란 모양이더라고. 잘 얘기한다고 했는데, 벌써 인터넷에선 기사가 뜬 모양이야."
"기, 기사요?"
기사에 달렸을 악성 댓글을 걱정한 제이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응, 네가 공연 중에 수중 마술을 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기사가 벌써 떴더라고."
"……그렇군요."
프로 마술사답지 않은 모습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던 제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너무하다, 벌써 기사로 내면 어떡해."
"마지막 마술 무대 때문에 환급 요구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어머, 너무해. 마지막 마술은 그냥 사고였는데, 그 전까진 완전히 완벽한 공연이었잖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관객들이 원하신다면 환급 해드려야죠."
"……정말? 제이야, 너 괜찮아?"
지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봤지만, 제이는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괜찮아요. 다음 공연에서 더 잘하면 되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이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시윤과 지우에게 오히려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끼익.
공연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제이는 황망한 표정으로 텅 빈 공연장을 둘러 보였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있던 공연장에는 정말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없네.'
제이는 비통한 심정으로 무대 위를 올라갔다. 텅 비어버린 관객석을 보자. 제이의 마음 한구석도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정말로 ……좋은 공연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무모했던 걸까.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관객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다니, 난 정말로 무대에 설 자격도 없어.
어느새 제이의 눈에는 그렁그렁 새벽의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뭐해요?"
무대 뒤에서 철수가 불쑥 걸어 나오자, 제이는 서둘러 눈가에 맞혀있는 눈물을 닦았다.
"……그냥 잠깐 있었어요."
철수가 살짝 고개를 숙여 얼굴을 바라보자, 제이는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 울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안 울었어요."
철수가 자신의 눈물을 본 것 같았지만, 제이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부정했다.
제이는 철수가 모른 척하고 지나가줬으면 했지만, 한편으론 진짜 그가 이곳을 떠나버리면 무척 쓸쓸할 것 같았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철수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바보예요?"
"……바보라뇨!"
딱히 그에게 위로 같은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을 '바보'라고 하는 철수에게 욱한 제이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철수가 양손으로 제이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울었잖아요. 근데 왜 안 울었다고 거짓말합니까. ……바보같이."
얼굴에 남아있던 눈물 자국을 보며 철수는 그답지 않은 다정한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따스한 눈길에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제이는 엉엉하고 아이처럼 크게 울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수도꼭지를 튼 듯이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와서, 제이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안도감과 아빠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는 속상함,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철수에 대한 고마움 등등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감정이 한데 섞여 있는 울음이었다.
조금씩 울음이 잦아든 제이는 철수의 향기가 배어 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울 수 있을 때 시원하게 울고 나니까 오히려 속이 더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제이가 울음을 멈추자 철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울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요."
"왜요?"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다 내 잘못이잖아요."
물끄러미 제이를 바라보던 철수가 갑자기 푸,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우는 데 막 웃어? ……나 진짜 이 사람 싫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맺힌 눈으로 철수를 흘겨보던 제이가 냉정하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게 왜 제이 잘못입니까. 그건 그냥 사고에요."
"……."
"원래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겁니다."
제이는 가만히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철수는 마치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사람처럼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 그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철수 씨도 독일에서 아주 힘들었겠어요."
눈동자가 슬퍼 보여서 제이가 그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니, 철수가 피식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철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잠깐만 이리 와 봐요."
제이는 철수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로 무대 아래로 끌려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가는 손목을 쥐고 있는 철수의 손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철수는 무대 바로 앞에 있는 관객석을 가리키며 눈짓했다.
여기 앉으라는 뜻인가?
제이는 철수가 시키는 대로 맨 앞줄 정중앙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제이가 자리에 앉자 철수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서 무대의 중앙에 섰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제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때요?"
"……뭐가요?"
"거기에서 앉아서 날 보니까 어떠냐고요."
제이는 물끄러미 철수를 올려다봤다.
무대의 중앙에서 활짝 팔을 벌리고 있는 철수는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훤칠했고, 영화시사회 무대에 올라선 영화배우처럼 존재감이 흘러 넘쳤다.
"나 여기에 서 있으니까 되게 멋있죠?"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진 제이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멋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자기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좀…….
"무대에 서 있으면 무엇을 해도 멋있어 보입니다. 누구든지 여기 오면 다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가 되죠."
사실 철수는 굳이 무대 위가 아니어도 스타로 보일 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었지만, 제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늘 온 관객들에게 제이도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예요. 사람들은 제이가 무얼 하든지 예쁘게 봤을 겁니다."
"……."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요."
"……."
"자책하지도 말고. ……알겠습니까?"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지 알아들은 제이는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하지만 제이는 이상하게도 고맙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철수가 터벅터벅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 제이의 옆좌석에 앉았다.
"철수 씨는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을 것 같아요."
"내가요?"
"……네."
제이가 맞추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그는 가로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나도 독일에서 사업하면서 실패 많이 했습니다."
"정말요?"
"네."
"어떤 실패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글쎄,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실패해본 적이 너무 많아서."
제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봤다.
옆에서 본 철수는 즉흥적이고 덜렁거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언제나 철저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철수를 보고, 제이는 어쩌면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라고 혼자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이에요?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요, 아니죠. 나도 실패 많이 해봤습니다."
"……음, 못 믿겠어요."
제이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철수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 내가 독일에 가서 한 장사는 꽃 장사입니다."
"꽃 장사요?"
"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을 팔았죠."
제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철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독일에선 꽃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파는 겁니다. 그때 딱 좋은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죠."
"어떤 사업 아이템이요?"
"한국에선 꽃에 어울리는 예쁜 포장지에 꽃을 싸서 팔잖아요. 한국에서처럼 예쁜 포장지에 싸서 꽃을 팔면 더 비싼 가격에 더 많이 꽃을 팔 수 있겠다 싶었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진짜 좋은 아이디어네요."
역시 성공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자신만만하게 포장한 꽃을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사람들이 포장된 꽃을 마구 사지 않았나요?"
철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요, 완전히 망했습니다."
"……정말요?"
"네, 결국 꽃은 시들어버리고 집엔 포장지만 남아 있었죠."
정말 좋은 아이템인 것 같은데, 왜 망했던 걸까. 제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망한 것 같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독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르게 꽃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꽃병에 꽂아두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에게 포장지에 쌓인 꽃은 그냥 애물단지일 뿐이죠."
"아, 그랬구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독일 사람들의 소비문화부터 알아야 하는구나."
제이가 방긋 웃으면서 철수를 바라봤다.
"진짜 대단하네요."
"뭐가요?"
"난 꽃이 팔리지 않았으면 그냥 슬퍼했을 거예요. 독일 사람들의 소비문화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그냥 울었을 것 같아요."
"……아까처럼요?"
"아이, 정말……!"
제이가 아프지 않게 살짝 철수의 팔뚝을 내리치자,
철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연장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웃음에 전염된 듯 제이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어쩐지 그와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고마워요."
"뭐가요?"
"오늘 철수 씨한테 신세 진 게 많은 것 같아요. 공연 전에 조명 기술자를 불러 준 것부터……."
"아, 그건 내 실수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철수가 사뭇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라리 조명을 고치지 않고 공연을 취소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
"괜히 나 때문에 제이 씨가 사고를 당한 것 같습……."
"아니에요, 그게 왜 철수 씨 잘못이에요. 그건 그냥 제가 잘못……."
"아닙니다, 그게 왜 제이 잘못입니까."
제이와 철수는 서로 옥신각신하면서,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탓이라며 스스로 자책했다.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해요. 그냥 사고인 거로, 그럼 됐죠, 철수 씨?"
"그래요, 사고입니다, 사고."
다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즐거워지고 있었다.
"앞으론 더 잘할 거에요."
제이는 다부진 표정으로 공연하기 전에 마술 기구를 더욱더 철저하게 점검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대기실 화장대 위에 한 통의 편지가 올려져있었다.
'……편지? 이걸 누가 보낸 거지?'
봉투를 뒤집어서 보낸 이의 이름을 찾았지만, 받는 이 '윤제이'만 쓰여있었고, 하얀 봉투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대기실에 두고 간 가방을 어깨에 멘 제이가 흰 봉투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그게 뭐예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온 편지 같은데.“
편지를 열기 위해서 제이가 손톱으로 봉투 입구를 뜯었지만, 봉투가 쉽게 뜯기질 않았다.
"진짜 비밀 내용이 편지에 적혀있나 봐요. 딱풀로 딱 붙인 것 같아요."
몇 번 시도했지만, 편지 봉투가 열리지 않자, 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포기했다.
"포기해야겠어요. 나중에 가위로 입구 쪽을 잘라야겠어요."
"이리 줘 봐요."
철수가 제이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져가더니, 편지 봉투를 거칠게 찢어버렸다.
자신의 수고가 무색하게 갈가리 찢긴 편지 봉투를 보고, 제이는 살짝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상한 스토커가 보낸 걸 수도 있으니까, 일단 내가 먼저 볼게요."
"뭐에요. 이건 내 편지잖아요."
"보낸 사람이 안 적혀 있잖아요. 굉장히 위험한 편지 같으니까 내가 먼저 볼게요."
제이가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다시 찾아 오려고 하자, 철수가 손을 위로 번쩍 들어버렸다.
폴짝폴짝 뛰어서 편지를 잡으려고 했지만, 키가 큰 철수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에는 제이의 손도 닿지 않았다.
……어휴, 내가 졌다, 졌어.
결국, 철수에게서 편지를 찾아오는 걸 포기한 제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말 철수 씨는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당신이네요.”
제이의 너스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면서 편지를 열어본 철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왜요? 뭐라고 쓰여 있어……."
"아닙니다. 됐습니다."
철수는 얼른 그의 품 안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보지 말아요. 안 봐도 될 것같습니다."
갑자기 살벌해진 철수의 표정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