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자, ‘말디’의 한국 진출 관련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철수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서류를 내려놓고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이가 있었다.
이 여자가 또 무슨 엉뚱한 짓으로 날 황당하게 하려고 하나, 싶었던 철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철수 씨가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내 걱정이요?"
내 걱정이라니, 무슨 걱정?
제이의 뜬금없는 말에 철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그녀를 밖에만 새워둘 수 없어서, 철수는 제이를 로열 스위트룸 안으로 들였다.
한 손에 흰 비닐봉지를 들고 쪼르르 다이닝룸에 들어선 제이는 포장을 뜯어서, 예쁜 그릇에 전복죽을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뭐예요?"
"전복죽이요."
“나 먹으라고 사 온 겁니까?”
"네, 철수 씨 주려고 사온 거예요."
룸서비스에 대해서 잘 몰랐던 제이는 호텔 밖에 있는 죽 전문점까지 찾아가서 직접 전복죽을 사 온 것 같았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 전복죽을 사다 주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군소리 없이 전복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은 철수는 묵묵히 죽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런데 전복죽은 왜 사 온 겁니까?"
"철수 씨 몸이 아픈 것 같아서요."
"나 안 아픕니다. 컨디션 괜찮아요."
"그래요?"
"네."
"근데 수영장에서 왜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Was?! (뭐라고요?!)"
당황한 철수의 입에서 불쑥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어디 아픈 줄 알고 난 진짜 걱정했어요.“
이 여자가 순진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순진한 거야.
철수는 물끄러미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의 속내는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바스? ……근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지금 그녀가 자신에게 순진한 척 내숭을 부리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내숭이 아닌 게 분명했다.
수영장에서 자신이 사라진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면서, 호텔 밖으로 나가 전복죽까지 사 온 게 내숭이라면, 제이는 희대의 팜므파탈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팜므파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윤제이 씨."
"네?"
"미안한데 몇 살입니까?"
"20살이요."
"진짜 20살 맞습니까?"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린 제이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은 만 18세이지만, 이제 곧 생일이 지나면 만 19세에요.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20살이에요."
"그런데 수영장에서 내가 아파서 사라진 건 줄 알았습니까?"
"……아니에요?"
슬쩍 자신의 눈치를 보는 제이를 보고, 철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그래요? 철수 씨 얼굴 또 빨개졌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딱히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철수는 좌우로 손을 내저었다.
"……뭐,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에요."
아프지도 않은 사람에게 전복죽을 사다 준 게, 괜한 일을 한 건가 싶었지만, 제이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진 않았어도 철수 씨가 다 먹었으면 됐지, 뭐.
Rrrrrr.
핸드폰 벨이 울리자, 철수는 잠시 통화를 하겠다면서, 침대가 있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저번처럼 또 덩그러니 거실에 남은 제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평생 물 공포증을 안고 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마주쳤던 철수의 다정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 이건 내 편지잖아."
좁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편지를 발견하고, 뜯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제이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맞다. 이건 원래 내 편지잖아."
'윤제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흰 봉투는 분명 어제 대기실 화장대 위에 올려져있던 자신의 편지였다.
철수가 마음대로 가져가서 그의 방 안에 있을 뿐이니,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제이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펼쳐보았다.
*
철수는 태오와 통화를 하면서도 계속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형, 왜 그렇게 실없는 사람처럼 웃는 거야?
"……아니야."
그걸 어떻게 내가 아파서 사라진 거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독일이 한국보다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긴 했지만, 제이가 보통의 한국 여자들보다 더 순진한 건 분명해 보였다.
- 뭐야,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는 것 같은데? 형, 이러기야? 얼른 말해봐.
"……아니, 어떤 여자가 내가 아프다고 전복죽을 사 왔어."
- 근데 그게 웃을 일이야? 그리고 형 어디 아팠어?
"아프긴 아팠지. 근데 그게 전복죽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데…… 아니다, 일 얘기나 계속하자."
태오와 통화를 마친 철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제이, 나 안 아프니까 이제 괜찮…….“
우두커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이의 뒷모습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철수가 천천히 제이에게 다가갔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철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이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분명히 어제 대기실에 놓여있던 편지였다.
"이게 대체 뭐죠?"
"……제이."
"철수 씨, 부탁이니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
"……이거 진짜 제 대기실에 놓여있던 편지 맞나요?"
제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철수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손에 힘이 풀린 제이가 편지를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누가 나한테 이런 편지를……."
"진정해요, 제이."
큰 충격에 사로잡힌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그럼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수조의 잠금장치를 망가트린 건가요?"
"……."
"대체, 대체 누가……!"
"제이, 진정해요."
철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제이, 내 말 잘 들어요. 내가 어제 편지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제이가 그 집에 계속 머무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제이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철수는 어제 그녀를 집으로 보내는 대신 호텔로 데려왔지만, 언제까지 호텔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어제는 내가 제이를 호텔로 데려왔지만, 내가 따로 제이가 지낼만한 곳을 알아봤습니다. 제이가 그곳으로 이사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단독 주택은 여자 혼자 살기에 더 위험한 곳이었다.
제이가 지낼만한 집을 따로 얻어줘야겠다고 생각한 철수는 이미 어젯밤 서울에 있는 괜찮은 집을 알아두았다.
내일 당장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손을 써둔 철수는 제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길 기다렸다.
"……조금 더 생각해볼게요."
철수는 한시라도 빨리 제이가 자신이 구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길 바랐지만,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요, ……생각해봐요."
철수는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위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걸어가는 제이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
편지 안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간결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환상의 마술'의 비밀을 밝혀라]
소름끼치는 글자가 쓰여있는 편지를 확인한 순간, 제이는 손에 힘이 풀려서 편지를 바닥으로 덜어뜨렸다.
ㅡ 이, 이게 무슨……!
똑똑히 두 눈으로 본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어쩜 세상에 그런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고작 '환상의 마술' 때문에 나를……!
누군가가 '환상의 마술'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서, 수조의 잠금장치를 일부러 망가뜨린 것이 분명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피하고만 싶은 끔찍한 현실과 마주한 제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철수가 조금만 늦었어도, 수조 안에 갇혔던 제이는 큰일 날 뻔 했었다.
철수가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제이는 영원히 이 세상과 이별을 해야 했었을 것이다.
20살, 아직 어리고 어린 나이였고, 아직 죽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나이였다.
'환상의 마술' 트릭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서, 물속에 갇혀서 유명을 달리할 뻔했던 제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제이는 멍한 표정으로 따뜻한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지만, 쉽게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고, 두려움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환상의 마술'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내 생명줄과 다름없었던 수조의 잠금장치를 망가트렸다니.
문득, 제이의 머릿속에 어쩌면 아빠도 '환상의 마술' 트릭을 노리는 인간들에게 살해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수조 잠금 장치를 망가트릴 인간들이라면, 일부러 아빠의 차를 고장 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공연장에 있는 대기실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이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ㅡ 분명 당신 주위에 선생님을 죽인 범인이 있습니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철수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제이는 온몸에 털이 삐죽 서는 듯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굴 믿어야 하는 걸까. 심장에 올가미를 채운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제이야!"
"재윤 삼촌."
호텔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재윤을 보고 제이는 벌떡 일어나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감사하게도 제이의 도움 요청에 한달음에 달려와준 재윤은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그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조금 수척해 보이는구나. 몸은 좀 괜찮아쳤니?"
재윤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던 제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이 왜 집이 아니라 H 호텔에서 머무는 건지, 대기실에 있던 수상한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부 털어놓았다.
유일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재윤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애달펐다.
ㅡ 뭐라고? '환상의 마술' 트릭을 밝히라는 편지가? 아니, ……어떤 미친놈이!
ㅡ ……잘 모르겠어요. 삼촌,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죠?
ㅡ 일단 내가 H 호텔로 가마. 그곳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운은 차마 제이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질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강철수 대표라는 사람이 너를 이곳에서 묶게 했다는 거니?"
"……네, 재윤 삼촌."
"그래도 다행이야, 네 곁에 강철수 대표가 있어서."
제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수 대표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구나. 네 옆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일 믿을만한 사람인 것 같아. 내 생각에도 지금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여기에 있는 게 훨씬 더 나은 것 같아."
"……그런가요?"
"그럼, 아무래도 거긴 여자 혼자 살기엔 방범이 좋지 않은 곳이잖니. 집 앞에 있는 가로등도 꺼져있는데, 거긴 너무 위험하지."
"……네, 사실 제 생각도 그래요.“
끝끝내 자신의 편지를 보여주지 않았던 철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그가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편지를 숨긴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철수 씨가…….
"제이 씨?"
"……어? 정혁 씨."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정혁이 제이를 보고 인사를 했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 잔뜩 예민해져 있는 제이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여긴 웬일이세요?"
"아, 저기…… 제가 H 호텔에서 다른 분들과 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 있는 제이 씨가 보이길래 반가워서 찾아왔어요."
아, 식사 약속…….
"혹시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많이 놀라셨나요?"
제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반응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정혁 씨. 지금은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제이 씨."
제이가 다시 그녀다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자, 정혁은 안심한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네. 제윤 삼촌이세요. 진짜 삼촌은 아니지만, 제가 정말 삼촌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분이세요."
제이의 설명을 귀담아 들은 정혁이 재윤에게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정혁이라고 합니다."
마치 장인어른 대하듯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정혁은 재윤에게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정혁 군."
"선생님, 죄송한데 잠시만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래요, 뭐, 편하게 앉아요."
재윤에게 양해의 말을 구한 정혁이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붙어앉자, 그가 부담스러웠던 제이는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이 씨, 어제 괜찮았어요?"
"네? ……아, 네."
정혁은 어제 있었던 공연 중에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때 생각보다 회의가 길어져서 마술 공연 보러 못 갔었거든요. 근데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이 씨, 몸은 괜찮은 거죠?"
"……네, 그럼요. 이제 괜찮아요."
억지로 미소를 띠려고 노력하자, 제이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어색한 공기가 감돌자, 분위기를 띄우려는 정혁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 씨, 나한테 간단한 마술 알려주면 안 돼요? 나도 마술 배우고 싶은데."
제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요. 마술 트릭은 절대로 마술사가 아닌 사람에게 알려주면 안 돼요.”
"그런가요?"
"그럼요, 마술 트릭을 알려주면 마술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지잖아요."
백룡이 제이에게 가르쳐준 두 번째 가르침이었다.
ㅡ 마술사는 절대로 마술 트릭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서는 안 된단다. 마술 트릭을 알려주면 마술에 대한 신비감이 떨어져. 연예인뿐만 아니라 마술사에게도 신비주의가 필요해.
아빠의 조언을 떠올린 제이가 평소와는 다르게 단호하게 거절하자, 정혁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미안해요, 예전에 TV로 마술 트릭을 전부 알려주던 마술사를 본 기억이 나서, 마술 트릭을 알려달라고 해도 괜찮은 줄 알았어요."
"마술 트릭을 전부 알려줘요?"
말도 안 돼. 그걸 가르쳐 주면 어떡해. 경악한 제이가 놀란 표정으로 정혁을 바라봤다.
"정말 그런 마술사가 있었어요?"
"네, 옛날에 TV에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나온 마술사가 있었어요. 그 마술사가 방송에서 모든 마술의 비밀을 다 알려줬었어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 글쎄요.”
“항상 마술사들이 똑같은 마술만 보여주니까, 마술 산업에 발전이 없다고 마술 트릭을 전부 밝혔대요.”
“에이, 말도 안 돼. 그건 정말로 허울 좋은 변명이에요. 정말 그런 마술사는 진짜 마술사도 아니에요."
"안 그래도 그 마술사는 세계 마술사 협회에서 퇴출당하였다고 하더라고요."
세계 마술사 협회의 영구제명 결정은 현명하고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던 재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난 이만 먼저 가봐야겠어."
"네? 아니에요. 재윤 삼촌, 방해라뇨."
제이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옆에 있던 정혁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히려 정중하게 재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정혁을 보고, 제이는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재윤이 사라지고, 호텔 카페에는 정혁과 제이 단둘만이 남았다.
"많이 놀랐죠? 진짜 걱정 많이 했어요."
"고마워요, 정혁 씨."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정혁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한 제이는 예의바른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제이를 구해줬어야 하는 건데. 아주 아쉽고 후회되었어요."
"……괜찮아요, 정혁 씨.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가요? 사실 난 예전에 물에 빠진 적이 있었거든요."
"……어머! 어떡해. 정말요?"
"네, 그때 이후로 물 공포증이 생겼었는데, 제이 싸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제이는 말없이 방긋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전 이제 물이 두렵지 않아요."
"정말요? 난 물에 빠지고 나서 한동안 물 근처에도 못 가겠던데."
말없이 미소를 짓던 제이는 카페 근처로 다가오는 철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제가 지금 철수 씨랑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제이는 철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철수 씨의 제안은 고맙지만, 난 그냥 아빠와 살던 집에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든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철수에게 많은 것을 받았는데, 그에게 더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철수 씨.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제이. 그래요, 나도 제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봤습니까?"
"네,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철수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제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 우리 아빠와의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곳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그렇군요."
"네, ……그래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조금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시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철수가 아빠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철수가 자신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는 거라면, 제이는 그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하고 싶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알겠다고는 말했지만, 철수의 표정은 조금 씁쓸해 보였다.
"근데 아까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다고……."
"아, 그랬죠. 나 참…… 잠깐 잊고 있었습니다."
제이는 조용히 시선을 아애로 내리고 철수의 말을 기다렸다.
"저기, 제이, 사실은……."
철수는 머뭇거리면서 바로 입을 떼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제이는 그를 재촉했다.
"어서 말씀해보세요."
"그게 사실은 저……."
철수 씨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제이는 철수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이번 주말에 난 독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