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주말에 난 독일로 돌아갑니다."
마치 내일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고 덤덤한 말투였다.
철수는 건조한 음성으로 군더더기 없이 사실 자체만을 전했지만, 제이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심한 표정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이한테 그동안 말을 못 했지만, 독일에 있는 본사에서 나한테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내려고 애썼지만, 자연스레 떨리는 음성은 막을 수 없었다.
철수가 한국을 떠난다면, 이제 그녀 혼자 한국에 남게된다.
"언제쯤…… 떠나시는 데요?"
"이번 주말에는 꼭 가야 할 것 같아서, 베를린행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아……."
제이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번 주말이면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시간이었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앞으로 3일 뒤면, 철수는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것이다.
"그럼 토요일에 가시는 거네요?"
"아뇨, 그게……."
혹시 그가 떠나는 날이 일요일인가 싶었던 제이는 고개를 들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도, 잠시 입을 떼지 못하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서, 당장 내일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요?"
"……네."
"왜 그렇게 빨리 가시는 거예요?“
제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에요. ……음, 저기, 철수 씨는 잠시 한국에 머물던 거였으니까, 원래 생활하던 독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죠. 독일에는 철수 씨의 친구들도 있고, 태오 씨도 있으니까.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요."
제이가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길게 변명을 늘어놓자, 철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제이, 미안합니다. 사실 저번 주 일요일부터 동생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내게 전화를 걸지 않는 녀석인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좀 놀랐죠. 역시 급한 일어더군요. 알고 보니까, ……저기, 뭐,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지만……."
"무슨 큰일이 생겼나 보군요."
충격을 받긴 했지만, 제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이런 광경은 너무나도 익숙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됐어요. 미안합니다, 제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철수를 보자, 제이는 예전 자신에게 사과하던 아빠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ㅡ 제이야, 미안하다. 아빠가 일이 바빠서, 오늘 졸업식에 못갈 것 같아.
밀려드는 공연 요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백룡은 초등학교 때부터 제이의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일찍 철이 들었던 제이는 살면서 아빠에게 불평 한번 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그녀의 마지막 졸업식 날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제이의 졸업식에 오지 않았던 백룡은 마지막 졸업식인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꼭 오겠다며,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었다.
ㅡ 미안하다, 제이야. 갑자기 큰일이 생겨서 아빠도 어쩔 수가 없어.
자신의 앞에서 죄인이 된 듯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빠를 보고, 제이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ㅡ ……괜찮아요, 아빠. 일이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죠.
웃고 있는 입과는 다르게 제이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ㅡ 이해해줘서 고맙다, 제이야.
하지만 오늘도 아빠는 제이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이는 졸업식장 반대 방향으로 떠나가는 백룡의 차가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졸업식장에 혼자 갈 수 없었던 제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홀로 근처를 배회했다.
그가 독일로 떠난다는 말을 하자, 왜 갑자기 쓸쓸했던 마지막 졸업식 날에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철수 씨가 독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죠. 독일로 떠나시면 이제 한국은 안 오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
"언제 돌아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제이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국을 떠나버리면,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율제이, 바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게, 철수 씨랑 무슨 상관이겠어.'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제이는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저기, 제이……."
"네?"
제이가 고개를 들자, 잠시 머뭇거리던 철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아닙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그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불편한 침묵이 주변에 가라앉았다.
제이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독일에서 철수 씨를 찾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네, 뭐……."
"얼른 가보셔야겠어요. 내일이 아니라 오늘 당장 떠나시는 건 어때요?"
또 다시 생각 없는 말을 내뱉은 제이는 아차, 싶었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바보같이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걸까.
"아, 죄송해요. 제가 또……."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제이는 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철수 씨가 독일로 가시니까, 저도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갈게요."
"하지만 제이, 그 집엔 제이 혼자 있잖아요."
철수의 무신경한 말에 제이의 눈동자가 파도치듯이 심하게 일렁였다.
"……네, 그렇죠. '우리' 집이 아니라, '나의' 집이죠."
뒤늦게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철수가 아, 하면서 살짝 입을 벌렸다.
"미안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라……."
"아니요, 괜찮아요. 철수 씨 말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철수는 후회에 찬 길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철수 씨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이걸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닙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도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이었다.
”일단 어제 호텔 숙박비는 제가 나중에 계좌로……."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철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금 화가 난 듯한 철수의 표정을 보고, 굳은 표정의 제이는 위아래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흠, 아, 저기……."
멀리서 철수와 제이가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정혁이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제이 씨를 집으로 데려다줘도 괜찮겠습니까?"
"……네?"
당황한 제이가 빼곡히 속눈썹이 들어차 있는 눈꺼풀을 깜박였다.
"어차피 철수 씨는 내일 당장 독일로 가셔야 하니까, 제이 씨는 제게 집으로 데려다주겠습니다."
제이는 재빨리 철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바보같이 대리석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철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제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혁 씨. 그럼 부탁드릴게요."
"간단히 체크아웃하고 밖으로 나와요. 정문 앞에서 하얀 SUV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게 제 차니까, 제이 씨는 제 차 타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시면 됩니다."
옆에 있는 철수는 망부석이 된 듯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정혁이 제이에게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에스코트를 청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정혁의 손과 철수의 옆모습을 번갈아 보던 제이는 차마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정혁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의 손이 이끄는 방향대로 걸음을 옮겼다.
정혁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도, 철수가 마음에 걸렸던 그녀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그는 전화기로 너머로 들리는 종석의 느물거리는 목소리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 그러니까 안 죽었잖습니까. 안 죽었으면 된 거 아닙니까?
"……당신 진짜로 경찰서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종석을 협박했지만, 오히려 종석은 더 뻔뻔하게 나오며 코웃음을 쳤다.
- 웃기고 있으시네요, 내가 왜 경찰에 잡힙니까. 윤제이를 죽이려고 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당신이 수조 잠금 장치를 망가뜨렸잖습니까.
아무래도 종석의 파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린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만약 어디 가서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당신이 수조 잠금장치를 고장 냈다는 사실을 다 퍼트리고 다닐 겁니다. ……알겠습니까?
전화기를 잡은 그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원하는 게 대체 뭡니까?"
- 잘 알고 있잖습니까, 내가 원하는 건 '환상의 마술'뿐이라는 걸.
되도록이면 빨리 종석의 마수에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어금니를 악물로 대답했다.
"그래요, 환상의 마술이 필요한 겁니까? 그럼 알겠습니다. 내가 '환상의 마술'을 빼앗아 오겠습니다."
어둠 속의 있는 그의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음습하게 반짝였다.
***
고작 며칠 집을 비웠을 뿐인데, 몇 달 동안 집을 비운 것처럼 아늑했던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노랑아."
"……야옹."
소파 위에 떨어져 있는 고양이 털을 보고, 나지막이 노랑이의 이름을 불렀더니 소파 밑에 숨어있던 노랑이가 제이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내 노랑이, 여기 있었네."
목울대를 부드럽게 만지자, 기분이 좋아진 노랑이는 그르렁그르렁 울음소리를 냈다.
노랑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제이는 H 호텔 프런트 앞에서 철수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호텔을 떠나기 전, 체크아웃하고 뒤돌아서는 데, 철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ㅡ 제이.
ㅡ ……철수 씨.
성큼성큼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철수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딱히 그에게 할 말이 없었던 제이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ㅡ …….
ㅡ …….
두 사람 사이에서 또 한 번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언제나 티격태격 쉴 새 없이 말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침묵이 더욱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ㅡ 철수 씨는 내일 독일로 가신다고 하셨나요?
ㅡ 아니요, 오늘 밤 비행기로 바꿨습니다.
ㅡ 네? 정말요?
ㅡ ……네.
ㅡ ……그럼 지금 공항으로 가시는 거군요.
ㅡ ……그렇습니다. 밤 11시 비행기를 타려면 지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철수의 손에 들려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보아하니, 이미 그는 서울을 떠날 준비를 다 끝마친 것 같았다.
ㅡ 그럼 조심히 가세요.
ㅡ 제이.
ㅡ 네?
ㅡ 혹시 나한테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ㅡ 아니, 아니에요. 저도 체크아웃하고 여기서 정혁 씨 차 기다리고 있었어요.
ㅡ …….
ㅡ 그럼 조심히 가세요.
제이가 어색하게 그네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ㅡ ……뭐, 조심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비행기 타는 겁니다.
마침 정혁의 차보다 먼저 도착한 호텔 리무진이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ㅡ 아직 이정혁 씨 차는 안 왔습니까?
ㅡ 네? ……네.
평소와는 달리 철수의 말투에 가시가 돋친 것 같아서 제이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ㅡ 제이는 이정혁 씨 차 타고 잘 들어가요. 나도 독일로 잘 가겠습니다.
제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리무진 기사가 철수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ㅡ 그럼 가보겠습니다.
ㅡ ……네, 안녕히 가세요.
물끄러미 제이를 바라보던 철수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리무진 뒷좌석에 올라탔다.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제이는 겁은 세단이 출발하자, 고개를 들어 사라지는 리무진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ㅡ 제이 씨!
ㅡ 정혁 씨.
ㅡ 늦어서 미안해요. 어서 타요.
ㅡ ……네.
제이는 정혁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꾸 철수의 뒷모습이 제이의 각막에 깊이 아로새겨진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제이의 품에 파고드는 노랑이가 야옹, 하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냈다.
"……위로해 주는 거야? 고마워라."
노랑이의 귀여운 코와 코를 마주치니, 노랑이는 새까만 눈동자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노랑아, 너 길고양이 하지 말고 우리 집고양이 할래?"
노랑이가 좋다는 듯 다시 한번 야옹, 하고 울었다.
"귀여워, 넌 어쩜 이렇게 귀엽니?"
아무리 생각해도 노랑이만큼 세상에서 귀여운 고양이는 없는 것 같았다.
품에 노랑이를 꼭 껴안은 제이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는 게, 제이의 가슴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뚝, 뚝, 뚝.
“……!”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뚝, 뚝. 뚝, 뚝.
누가 노크를 하는 것 같았다.
뚝, 뚝, 뚝.
……어디서 나는 소리지?
누군가가 일정한 패턴으로 물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 마치 손톱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뚝, 뚝, 뚝, 뚝.
……이건 무슨 소리야?
수상한 소리가 나는 곳은 주방 쪽이었다.
살며시 주방 쪽으로 다가간 제이는 소리의 정체가 수돗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싱크대 위로 떨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쿵쾅쿵쾅 뛰고 있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제이는 주방으로 걸어가서 수돗물을 꽉 잠갔다.
꿀꺽.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을 적시기 위해 제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노랑아,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제이는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 문단속을 어떻게 했는지 떠올렸다.
ㅡ 2층 베란다 문 잡갔고, 창문 잠갔고, 1층 복도 베란다도 잠갔고. 음…… 다 됐다!
분명히 집에 나서기 전까지 여러번 확인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제이가 떨리고 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히 문을 다 잠갔는데."
설마……?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간 제이는 제일 먼저 2층에 있는 베란다 문을 살폈지만, 다행히도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혹시 노랑이가 환풍구로 들어온 건가?'
다시 한번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넘긴 제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2층 서재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
베를린에 도착하면 바로 거래 협상에 임해야 했던 철수는 간단한 출국 절차를 밟고, 공항 VIP 라운지에서 태오가 메일로 보낸 협상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후."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자,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철수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아까 리무진 백미러로 보았던 제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손님, 밤 11시 베를린행 비행기 일등석 예약하신 분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탑승 시간입니다. 11-A 게이트로 가시면 지금 바로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마터면 베를린행 비행기 탑승을 놓칠 뻔 했던 철수는 무사히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철수가 안내 직원에게 자신의 여권을 내밀었다.
Rrrrrr.
"잠깐만요."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스피커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철수 씨!
"……제이? 무슨 일이에요?“
……울어? 지금 제이가 울고 있는 건가?
제이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철수는 심장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기분이었다.
- 어떡해요. 지금 문이 닫혀있는데, ……갑자기 노랑이가, 막. 서재도 엉망이고,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속사포 같은 말을 쏟아냈지만, 제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철수는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 있었다.
"제이, 잠깐 진정해요. 진정하고, 천천히 다시 한 번 말해봐요."
스피커에서는 제이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든 철수는 직원에게 건네준 여권을 다시 돌려받았다.
"제이, 제이!"
- ……네, 철수 씨.……흑!
"내 말 들립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 ……저, 지금…… 지금, ……지, 집에 있어요.
"그런데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다시 한번 제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철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 집에 왔는데, 아빠 서재가 엉망이 되어 있어요.
"……선생님 서재가요?"
- ……흐흡, ……네.
"몸은 어때요, 혹시 제이는 어디 다친 데 없습니까?"
- ……아뇨, 네, 전 괜찮아요.
그녀의 괜찮다는 말에 철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 아빠 서재에 들어왔는데, 누가 아빠 서재를 다 헤집어 놨어요. 아빠가 쓰시던 물건들은 다 망가져 있고, 아빠가 받은 상들은 다 바닥에 떨어져 있고…… 흐흑!
누군가가 제이가 없는 틈을 타서 그녀의 집에 침입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자식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공항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곧 있으면 베를린행 비행기가 출발합니다. 지금 빨리 타셔야 합니다, 손님.“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철수의 간절한 부탁에 공항 직원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철수 씨, 저 너무 무서워요. 또 이상한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오면 어떡해요?
철수는 손목에 차여져 있는 시계와 공항 직원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이, 진정해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일단 진정하고 경찰에 연락해요. 알겠죠? 경찰에 신고할 수 있겠습니까?"
- ……흐흡, 네, ……네, 그럴게요.
항상 우선순위가 일이었던 철수는 한 번도 회사 업무를 마다하고 누군가에게 달려가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겐 언제나 여자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손님,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얼른 타셔야 합니다."
공항 직원의 재촉에 꽉 깨물은 철수는 결국 공항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이, 일단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당장 그곳으로 갈 테니까.“
공항 직원이 어, 하면서 철수를 향해 손짓했지만, 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항 출입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지금 당장 제이에게 달려가지 않으면 평생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