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에 있는 아빠의 서재에는 낯선 자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지금 이 집에서 제일 안전한 곳은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이불 안 뿐인 것 같아서, 제이는 재빨리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빠의 서재를 뒤진 침입자가 아직 집 안에서 나가지 않고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밖으로 나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제이는 뒤집어 쓴 얇은 이불을 양손으로 꼭 틀어쥐었다.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이는 덜덜 떨며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도 경찰에 신고 전화는 해야 하지 않을까.'
울먹이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제이의 목소리를 듣고도, 철수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주었다.
ㅡ 제이, 일단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당장 그곳으로 갈 테니까.
하지만 그는 자정을 넘어가고 있는데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밤 11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올까.
시간이 지나도 철수가 나타나지 않자 점점 더 초조해진 제이는 손톱을 물었다.
철수 씨가 나에게 했던 말은 일단 놀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빈말이 아닐까.
가만히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그냥 지금 내가 경찰에게 전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핸드폰으로 '112'를 누르고,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눌렀던 제이는 신호음이 가기 전에 재빨리 빨간색 종료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철수 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제이는 철수의 말을 믿고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철수를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오겠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올 것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철수 씨는 믿어도 된다는 느낌.
쾅쾅쾅.
거칠게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제이의 표정이 불을 켠 듯 환해졌다.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더니,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고 있는 철수의 모습이 보였다.
"철수 씨!"
"제이!"
마치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온 로미오처럼, 철수는 제이의 방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제이,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왠지 그의 얼굴을 보니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제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네. 다행히도 전 괜찮아요."
"제이, 그럼 문 좀 열어줘요."
철수의 말에 제이는 잠시 망설이면서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철수 씨, 그게 사실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아니라…….“
“혹시 지금 같은 방에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그럼요!”
“……무서워요!”
철수가 당황한 듯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서워요? ……내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혹시 집 안에 누가 있으면 어쩌나 해서 밖으로 못 나가겠어요."
난처한 표정의 철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철수 씨,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라는 게…… 뭡니까?"
제이는 철수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둔 곰인형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철수 씨, 이거 받아요."
제이는 대문의 열쇠와 집 문의 열쇠를 목에 단 곰인형을 철수의 앞으로 힘껏 던졌다.
그의 손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곰인형은 다행히 집의 담장을 넘어가서, 철수의 발밑에 떨어졌다.
곰인형에 묶여있는 열쇠로 철수는 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쿵쾅쿵쾅.
2층 계단을 올라오는 성급하고 시끄러운 발소리 들리자, 제이는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평온해졌다.
똑똑똑.
철수가 제이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제이는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살며시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제이, 납니다. 강철수."
철수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를 들리자, 안심한 제이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철수는 제이의 안부부터 물었다.
"제이,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긴장이 풀린 제이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철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겠군요."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의 음성에는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곳을 다 멀쩡한데, 유독 아빠의 서재에만 침입한 흔적이 있다는 것은 '환상의 마술'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제이의 집안까지 몰래 들어왔다는 증거였다.
순식간에 공황상태가 된 제이는 이성을 잃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제이의 손이 부들부들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몸만 떨고 있자, 철수는 그녀의 가녀린 등에 얇은 담요 한 장을 덮어주었다.
"제이 씨, 나랑 같이 H 호텔로 갑시다. 여기에 있으면 더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담요 한 장을 몸에 덮은 제이는 철수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철수의 단단한 팔에 몸을 기댄 제이는 그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집을 나서기 전, 철수가 한 번 더 제이에게 물었다.
"H 호텔로 가는 거 정말 괜찮겠습니까?“
천장에는 기괴한 모양으로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베란다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허술하게 잠겨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던 소중한 공간이었는데. 모든 것들이 섬뜩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네, 빨리 가요, 철수 씨."
철수의 팔을 꽉 잡은 제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독주택을 빠져나왔다.
***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와 H 호텔을 찾은 제이는 다음 날, H 호텔 안에 있는 카페에서 윤정을 만났다.
"뭐라고? 이사를 한다고? 어디로?“
대뜸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제이의 말에 윤정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당해하는 그녀의 반응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속이 너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던 제이는 통이 트자마자 윤정에게 연락을 했다.
"응, 윤정아, 나 아무래도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어디로?"
갑작스러운 윤정의 질문에 제이는 목구멍이 콱 막혀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내가 어디로 이사할 건지는 나도 잘 몰라."
"뭐? 네가 어디로 이사할 건지 너도 잘 모른다고?"
윤정의 입이 떡하고 벌어지자, 씁쓸한 표정의 제이는 손에 들려있는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이사를 하는 데, 네가 어디로 이사할 건지 모르면 어떡해. ……정말로 이사하는 거 맞는 거야, 제이야?"
"……응. 이사하는 건 확실해."
제이는 깊은 한숨과 함께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윤정에게 털어놓았다.
"집에 가보니까, 아빠의 서재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더라. 이제 난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제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윤정에게 털어놓았다.
아빠의 서재에 몰래 침입한 낯선 자는 무언가 간절히 찾고자 하는 것이 있는 듯, 침대 밑이고, 서랍 안이고, 전부 다 뒤집어 놨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윤정의 입에서 제이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떡해, 너무 무서웠겠다. 정말 괜찮아? 많이 놀라지 않았어?"
윤정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살아의 손을 부여잡았다.
꼭두새벽부터 자신에게 전화를 건 제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한 윤정은 급하게 약속 시간을 정하고, 한달음에 H 호텔을 찾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부닥쳐있는 제이를 보니 가슴이 아릿해졌다.
왜 우리 착한 제이만 이렇게 괴로운 거야.
제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고.
"근데 H 호텔에는 누가 데려다 준 거야?"
"……강철수 씨. 철수 씨가 날 H 호텔로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어."
강철수? 그게 누구지?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이름에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윤정은 그가 바로 얼마 전, H 호텔에 있는 아르곤 레스토랑에서 제이와 함께 식사를 했던 남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빠의 서재가 엉망이 된 걸 보고, 내가 철수 씨에게 전화를 했거든. 원래는 어제 밤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나야 하는데, 내 전화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오셨어."
"진짜? 그럼 강철수 씨가 비행기 예약한 것도 취소한 거야?"
"……응."
"근데 철수 씨는 왜 서울로 다시 돌아온 거래?"
"그냥…… '인류애' 차원이라고 하던데."
"‘인류애’?"
윤정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철수 씨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찾아온 거 아니야?"
처음에 제이와 철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윤정이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착각했던 이유는 철수가 제이를 보는 눈빛에서 달달한 꿀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눈빛은 절대 속일 수 없는 법인데.
"근데 이사를 한다는 건 뭐야?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음, 뭐…… 아무래도 내가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좀 많이 위험할 것 같다면서, 철수 씨가 당분간 내가 지낼만한 곳을 따로 마련해주겠대."
"그건 또 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인류애' 그런 거야?"
"……아니, 그건 우리 아빠한테 진 '마음에 빚' 때문이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윤정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약한 비행기까지 보내버리고, 제이가 있는 서울로 다시 온 거면, 제이가 걱정돼서 찾아온 거 아닌가?
……근데 인류애? 마음에 빚?
"제이야, 혹시 철수 씨한테 왜 서울로 다시 온 건지 물어봤어?"
"……응, 물어봤더니.“
물어봤더니?
“쓸데없는 거 궁금해 하지 말라고 했어."
……인류애? 마음에 빚? 쓸데없는 거?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진 윤정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제이야, 사실 난 집에 좀도둑이 들어온 게 이사할 정도로 위험한 건가 싶어. '캡스' 같은 거 신청하면 괜찮지 않을까? 집에 '캡스' 신청하면, 밤에 누가 몰래 침입했을 때 경찰보다 빨리 1분 안에 방범요원들이 찾아온대."
"그게 말이야……."
윤정처럼 그저 단순한 좀도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정아 사실은……."
제이는 힘겹게 윤정에게 그동안 그녀가 겼었던 모든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윤정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지만, 제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도무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마지막 말을 끝마쳤을 때, 윤정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어떡해, 제이야. 많이 무서웠지?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쪽지를……!"
윤정의 눈에 맺혀있는 눈물을 보고, 어느새 제이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윤정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제이의 마음은 아직도 불안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제일 알고 싶은 건 바로 자신이었다.
"제이야, 그럼 언제쯤 이사하는 거야?"
"글쎄. 있을 곳이 정해지는 대로 빨리 옮기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어. 언제까지 호텔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윤정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이야, 근데 이 사실은 마술단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아, 응……. 알았어.”
윤정과 눈짓을 주고받은 제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윤정이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던 제이는 조심스럽게 윤정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윤정아, 근데 왜 마술 단원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아, 그게…… 후우, 아니다. 내가 괜히 이런 말 하면 네가 더 불안해질 것 같아."
머뭇거리는 윤정을 보고 제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윤정아. 나도 이제 진실을 알고 싶어."
자신의 재촉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윤정이 그녀에게 털어놓은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마술 단원들이 날 질투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충격을 받은 제이가 살짝 입만 벌리고 있자, 윤정이 급하게 수습을 했다.
"그래도 마술 단원 중에 네 집에 침입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냥 조금 질투하는 거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잖아."
"……그럼, 맞아. 그렇지."
앞에 있던 코코아를 입안으로 삼켰지만, 따뜻하고 달달했던 코코아가 오늘따라 쓰게만 느껴졌다.
***
제이는 홀로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ㅡ 제이야, 마술 단원 사람들이 너를 조금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아.
ㅡ ……저, 정말?
ㅡ 응, 내가 저번에 네 연습실에 갔을 때 그런 걸 조금 느꼈어. 마술 단원 사람들이 제이는 CF 많이 찍어서 돈이 많으니까,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
제이는 잘근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정말로 마술 단원들을 가족같이 생각 했는데.
Rrrrrr.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받으니 철수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 윤제이 씨.
“……네?”
- 잠깐만, 지금 당장 밖으로 나와봐요.
철수는 급하게 카디건을 챙겨 입고 나온 제이와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그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지 궁금했지만,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제이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철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톱여배우가 사는 곳으로 유명한 빌라 앞이었다.
“제이가 지낼만한 곳으로 구한 곳이 이 빌리 맨 끝 층에 있는 펜트하우스입니다.”
그저 작은 평수의 원룸이라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까다롭게 철수에게 주문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번호 입력이 아니라 지문 인식입니다. 먼저 제이의 지문을 입력해야 하니까, 들어가 봐요."
지문을 입력하고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제이는 몸을 돌려 철수를 바라봤다.
"철수 씨, 정말 감사해요. 전 철수 씨한테 받은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닙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베푸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선생님에게 진 '마음에 빚' 때문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아, 그렇군요. '마음에 빚' 때문에……."
"그럼요, 전 선생님께 진 '마음에 빚'을 꼭 갚고 싶습니다."
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굳이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의 의미를 아빠에게 진 '마음에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꼭 집어 말하는 철수를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허해졌다.
다시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제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앞으로 제이가 혼자 생활해야 하는 곳이니, 저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혼자 펜트하우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로 앞에 탁 트여있는 테라스가 보였다.
복층으로 된 펜트하우스는 제이가 살던 단독주택과 비슷한 구조였다.
테라스에 진열된 식물의 초록빛이 우울했던 제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상쾌하게 해주었다.
천장은 높았고 한쪽 벽면은 파벽돌이 쌓여있어 마치 고픙스러운 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철수가 그녀를 위해서 준비한 공간은 세월이 흘러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이 심플하면서 따스한 펜트하우스였다.
누구나 꿈에 그리는 펜트하우스 였지만, 제이의 표정은 그리 밟지 않았다.
"……어? 잠깐, 이건……."
깔끔한 집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은 익숙한 물건이 거실에 놓여있었다.
"이건 우리 엄마의 TV 장이잖아."
엄마가 혼수로 가져오셨던 TV장에 줄을 잡아당기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벽걸이 CD플레이어와 10년도 넘은 원목 테이블까지.
제이가 예전 집에서 쓰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펜트하우스에 옮겨져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있는 방의 문을 여니, 그곳에는 예전에 그녀가 살았던 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야용."
침대 밑에 숨어있던 노랑이가 튀어나와서 제이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노랑아!"
노랑이를 품에 안으며 제이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이가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노랑이의 밥걱정이었다.
내가 이곳을 떠나면. 매일 동네에서 떠돌아다니던 길고양이 노랑이에게는 누가 밥을 줄까. 혹시 굶고 다니진 않을까.
펜트하우스에는 제이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뿐만 아니라 노랑이까지 전부 들어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노랑이를 위한 캣타워도 있었다.
노랑이를 품에 안은 제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이곳에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