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가 들어가고 몇 분이 흐른 후, 긴장한 표정으로 굳게 닫혀있는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캣 타워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와 장난을 치는 제이의 모습이 보였다.
"간질간질."
간지러워하는 고양이를 보며, 즐거운 듯 높은음의 웃음소리를 터트리고 있는 제이는 그가 안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는 제이의 순수함에 철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자그마한 테라스가 딸린 매력적인 펜트하우스는 마치 제이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것처럼, 현대적인 느낌에 단순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었고, 한쪽 벽면에 쌓아 올려져 있는 벽돌 덕분에 펜트하우스 특유의 차가운 공기 대신 따뜻하고 온유한 공기가 공간을 채웠다.
은은한 분위기의 거실 한 가운데를 제이가 차지하고 있자, 철수는 자신이 그려왔던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제이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제이를 바라보고 있던 철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를 주시하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흠흠,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한 철수가 조심스럽게 제이에게 다가갔다.
"제이. 어때요? 집은 마음에 듭니까?"
거실 전체를 울린 그의 목소리에 제이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진 후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네, 철수 씨 너무 감사해요."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입니다."
철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예전에 제이가 지나치듯이 흘려서 했던 말을 철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ㅡ 물건에는 그 사람과 함께 한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잖아요.
그 날 밤,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의 옆모습은 철수의 눈동자에 깊게 박혔다.
제이를 H 호텔로 데려다준 최대한 빨리 그녀가 원래 살던 단독주택과 비슷한 집을 찾아내려고, 인력과 자금을 총동원 한 철수는 제이의 단독주택과 유사한 벽돌 펜트하우스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며 가격도 묻지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빠른 시일 내에 그녀를 이곳에서 머물게 하고 싶었던 철수는 사람을 시켜, 제이의 주택에 있는 것 중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펜트하우스 안으로 모두 옮겨두었고, 그 중에 낡은 것들은 그녀가 쓰던 것들과 최대한 비슷한 가구들로 새로 바꿔놓았다.
굉장히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환하게 웃는 제이의 미소를 보니까,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철수 씨가, 노랑이까지 데리고 왔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뭐, 내가 데려온 건 아닙니다만."
가구를 가지러 제이의 집으로 갔던 사람 중 하나가 단독주택에 고양이가 한 마리가 있다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에게 전화했었다.
그저 제이가 밥을 챙겨주는 길고양이일 뿐이었지만, 그녀가 '노랑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친근하게 대하는 녀석인데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할 수 없었다.
주택을 찾아간 철수는 고양이를 직접 데려왔고, 고양이를 위한 캣 타워도 자신이 만들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집에서 울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머, 노랑아, 그랬어? ……미안해라."
제이는 노랑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안타까운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어두운 밤에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던 제이는 집에 노랑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말았다.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제이가 고양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노랑이가 야옹, 하고 슬프게 울었다.
"원래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구했었는데, 아무래도 복층이 나은 것 같더군요. 원래 복층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고 말들이 많지만, 여기는 단열성도 좋은 곳입니다."
건축에 대해서 자세한 건 잘 몰랐던 제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철수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한쪽에 테라스가 있는 게, 제이가 살던 주택이랑 구조가 엇비슷해서 이곳을 골랐습니다."
제이는 길게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위아래로 깜박였다.
"테라스에 놓여있는 화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른 것입니다. 난 식물에 대해선 잘 몰라서. 사실 식물은 조금만 물을 안 줘도 죽으니까 선인장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식물이 있으면 집안 분위기가 좀 더 산다고 하더군요."
제이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철수 씨."
건축 구조에 대해서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하던 철수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집을 고를 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냥 아무 집이나 마련해주셔도 괜찮았을 텐데."
"……아무 집이나 고를 순 없죠."
"저를 배려해주신 건가요?"
그녀가 불쑥 던진 질문에 철수는 잠시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럴리 가요."
제이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철수가 그녀에게 길고 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껏 큰돈을 썼는데, 제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괜한 돈 낭비한 거 아닙니까. 난 쓸데없이 돈 낭비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웃음을 참지 못한 제이가 입가에 씰룩거리자, 머쓱해하며 저벅저벅 혼자 테라스 쪽으로 걸어간 철수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지만, 제이는 짐짓 모른 척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제이는 살며시 철수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붙였다.
"저랑 같이 구하시지 그러셨어요.“
제이가 새로운 집에서 낯설어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집을 구하면서 그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부 눈에 보였다.
"혼자 다니는 게 편해요."
……치, 어련하시겠어요.
손잡이가 특이한 복층 테라스의 문을 여니 아름다운 서울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테라스 바닥에는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가볍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정중앙에 놓여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데, 옆에 있는 철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철수가 입을 꾹 다물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제이는 철수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난 이제 정말로 독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요."
제이는 처음 그가 독일로 떠나간다는 말을 했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로 독일로 가야 합니다."
제이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비행기까지 취소하고, 한국에 남아준 철수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꼭 다시 올 겁니다."
"……."
"그때까지 잘 지내요."
***
다음 날 아침,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었던 제이는 철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 인천공항을 찾았다.
출국 게이트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제이는 철수와 함께 공항 안에 있는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탑승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유리창 너머로 다른 나라로 떠나가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비행기와 한국으로 되들어오기 위해 속도를 낮추는 비행기가 보였다.
철수는 활주로를 나가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떠날 것이다.
"거실에 있는 캣 타워를 철수 씨가 만든 거예요?"
제이가 놀란 듯 되묻자, 철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목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캣 타워는 노랑이의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캣 타워는 세 개의 탑이 골조로 세워져 있고, 이를 연결하는 구름다리와 노랑이가 몸을 넣고 쉴 수 있는 천 바구니까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플 정도로 복잡한 구조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 부분에 감겨 있는 줄이 스크래치(고양이가 발톱을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 기능도 했고, 여기저기 달린 고양이 장난감은 호기심 충만한 어린 고양이 노랑이의 흥미를 여러모로 자극했다.
캣 타워(Cat tower)가 아니라 캣 트리(Cat tree)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크고 아름다운 고양이 놀이터에서 노랑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만들었어요?"
제이가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바라보자, 철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인터넷에 검색하면 DIY(디아이와이)로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따로 팝니다."
"DIY(디아이와이)요?"
"DIY(디아이와이)는 'do-it-yourself'의 약어입니다. 스스로 재료를 사서 가정용품을 제작하는 걸 말하죠."
"우와, 스스로. ……DIY(디아이와이). 처음 들어 봤어요."
제이의 말에 철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철수는 제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더라도, 놀라거나 무시하는 기색 없이 무엇이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요즘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릿속도 정리할 겸 설계도도 그리고, 재료도 사서 뚝딱 만들었죠."
……설계도를 그려서?
그가 자신에게 펜트하우스 구조에 관해서 설명할 때도 느꼈지만, 철수는 확실히 건축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철수 씨, 정말 대단해요. 그 사이에 캣 타워도 만들다니."
제이가 H 호텔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철수는 마치 몸이 두 개인 것 같이 그녀가 있을 만한 집을 계약하고, 이삿짐도 옮겨 놓았으며, 직접 캣 타워도 만드는 등 모든 일을 척척 해냈다.
"사실 걱정 많이 했었거든요.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던 아이인데, 집에 있으면 심심해하지 않을까."
제이는 혹시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밖에서 잘 지내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집안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하지만 철수가 마련해준 집은 노랑이가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넓었고, 거실에는 그가 만든 근사한 캣 타워도 있으니, 노랑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문제없겠다 싶었다.
"계속 보니까 고양이도 귀엽더군요."
철수의 입에서 '귀엽다'라는 단어가 나오자, 고양이 집사 제이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귀여워요. 우리 노랑이."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긴 철수는 오늘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슈트 차림에 고급스러운 구두를 신고 있는 철수는 격식 있는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신사처럼 보였다.
엘리트 코스를 정석대로 밟고 성장했을 것 같은 귀공자다운 외모였지만, 눈빛만큼은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날카로운 남자였다.
어린 나이에 독일로 가서 맨손으로 회사를 일으켜 세운 철수에게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확실히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정말 잘생긴 미남자였다.
카페에 앉아있는 철수를 보며 주위에 앉은 여자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그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여자에겐 별로 흥미가 없는 듯했다.
몰래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고 있었는데, 철수가 제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한 손으로 만년필을 돌리고, 다른 한 손으론 머리칼을 쓱 쓸어 넘긴 철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순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로 포물선을 그리는 철수에게 사로잡힌 듯 제이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철수가 다시 한번 싱긋 웃자, 그의 눈빛에 매료된 제이는 들고 있던 찻숟가락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철수는 기꺼이 그녀가 놓친 찻숟가락을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갑시다."
"네? ……네."
때마침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해외로 어학연수 가는 학생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단체 관광객들까지 북적북적 사람들로 붐비었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몸을 비비게 된 제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 휩쓸린 제이가 난처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어깨를 잡은 철수가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복잡하니까."
살며시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제이는 발그레해진 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두 번째로 잡는 그의 팔이었다.
첫 번째는 난장판이 된 집에서 탈출할 때, 두 번째는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출국 게이트에서 제이는 철수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철수 씨, 조심히 가세요..”
"네.”
마지막으로 철수의 뒷모습을 보고 싶었던 제이는 가만히 그가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저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철수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혹시 뭐 놓고 간 게 있나 싶어서, 제이는 철수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아니, 아닙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던 철수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 지 궁금했던 제이는 가만히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이는 혼자 있어도 문제없겠어요. 언제나 스스로 모든 일을 잘하잖아요."
그가 지금 자신을 칭찬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헷갈렸던 제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게 내 입장에선 조금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마지막으로 손을 흔든 철수가 탑승구 안쪽으로 사라졌지만, 제이는 굳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끄럽게 고막을 울리는 주변 사람들의 소음이 점차 작아지고, 제이의 귓속에는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만 메아리쳤다.
ㅡ 하지만 그게 내 입장에선 조금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
무대에서 불의의 사고가 난 후, 제이는, 실로 오랜만에 강남에 있는 연습실 겸 회의실을 찾았다.
제이는 연습실로 들어가기 전 자신을 걱정했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웃는 표정을 연습했다.
지금 그녀가 처해있는 상황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하루만 입원하고 바로 퇴원 화려는 제이를 보며, 지우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ㅡ 제이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ㅡ 네, 정말로 괜찮아요. 하루 정도 푹 쉬었으면 됐어요. 지우 언니, 옆에서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만약 지우가 그녀와 같이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혼자 병실에 누워서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것이 분명했기에, 제이는 자신의 곁에서 살뜰하게 보살펴 준 지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ㅡ 다른 단원들도 너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데.
ㅡ ……그런가요?
ㅡ 그럼. 얼른 건강한 모습으로 연습실에서 다시 만나자.
지우가 괜히 마음 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제이는 평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웃는 연습을 한 제이가 일부러 더 쾌활한 목소리를 내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라? 아무도 없나?
휑한 연습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제이가 마술 단원들이 모두 회의실에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약속 시각보다 자신이 5분 정도 늦은 것 같았다.
……으, 윤제이. 늦으면 어떡해.
문앞에서 노크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제이가 회의실 문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리자, 무언가 열성적으로 치열하게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제이는 귀를 쫑긋 세우며,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종환 아저씨, 아저씨는 오이 비누 좋아하죠?”
아직도 오이 비누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제이는 생긋 미소를 짓고, 조용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김기범, 오이 비누 얘기 좀 그만해라."
"종환 아저씨도 오이 비누 싫어해요?"
종환은 기범의 집요한 질문에 살짝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 제이 왔네?"
"응, 다들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 늦을 수도 있지."
기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윤과 투덕거리면서 아웅 대기 시작했다.
뭔가 회의실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가 그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어서, 제이는 다시 의자에 단정하게 고쳐 앉았다.
"지우 언니, 저번에 병원에서 저 신경 써서 보살펴 주셔서 감사해요."
"……아, 저번 주에? 에이, 감사하긴. 그래도 제이 오늘 컨디션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지우의 말에 제이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제이는 괜히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지우 누나, 저번에 있었던 사고 말하는 거죠? 제이야,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괜찮지?"
제이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윤제이, 괜찮아 보이는데? 큰일 없었으면 됐지, 뭐."
갑자기 불쑥 끼어든 기범에게 당황한 제이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형, 담배 피워요? 가방에 웬 라이터?”
"아니야, 그냥 가지고만 있는 거야."
하지만 시윤은 확실히 옆에서 진한 담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 맞다. 저번에 난 지우 누나가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거 봤는데."
"야, 신기범. 조용히 안 해?"
"지우 누나 담배 피워요?"
"응, 시윤이 형. 지우 누나 골초야, 골초."
기범이 옆에서 얄밉게 살을 덧붙이자, 지우가 양손을 휘저으면서 강력하게 부인했다.
"무슨 골초는! 골초는 아니야. 술 먹으면 가끔 당겨서 피우는 거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던 제이가 슬쩍 옆을 바라보자, 종환은 이미 지우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예전과는 달랐다.
마술 단원들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평소와는 다른 공기에 제이는 난처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회의 전 잡담을 마치고 제이는 사람들과 함께 무대 공연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제이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제이야, 우리 회의실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을 건데, 안 갈 거야?"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
제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