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제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집안의 실질적 권력자인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노랑아."
도도하고 새침한 얼음공주 같은 노랑이는 불러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캣 타워 위에 있는 천 바구니에 몸을 돌돌 말아 웅크리고 있었다.
캣 타워 앞까지 가서 노랑이를 알현한 제이에게 노랑이는 황송하게도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아는 척을 해주었다.
"야옹."
제이는 오늘 윤정이와 함께 영어 회화 학원에 수업을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외고 출신인 윤정이와 해외 마술 대회에 자주 출전했던 제이는 모두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언어라는 건 안 쓰면 잊어버리는 거라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원어민 강사와 함께하는 고급 영어 회화 클래스를 신청했다.
아침부터 윤정이와 조조 영화를 보고 저녁까지 먹고 오느라, 종일 노랑이를 집안에 내버려 뒀던 제이는 노랑이의 품을 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털을 쓰다듬었다.
"우리 노랑이, 잘 있었어? 우리 키스하자."
원래 고양이 키스라는 건, 눈을 마주치고 지그시 눈을 깜빡거리는 거지만, 제이와 노랑이식의 고양이 키스가 따로 있었다.
제이가 노랑이와 눈을 마주치고 가만히 기다리자, 노랑이가 그르렁 소리를 내면서 세모난 코와 제이의 코끝을 마주 댔다.
철수가 독일로 떠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잘 도착했다며 그녀에게 전화한 철수는 그 뒤로 계속해서 제이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주로 철수가 제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그녀가 간단하게 답을 하는 식이었는데, 철수가 제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하게 답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핸드폰으로 그동안 철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던 제이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철수는 주로 직접 찍은 사진을 많이 보냈는데, 처음에 그가 자신에게 보낸 사진은 반쯤 먹다 만 바게트(겉껍질이 단단하여 씹으면 파삭파삭 소리가 나는 막대기 모양의 기다란 프랑스 빵)였다.
[이게 뭐예요?]
아무래도 시차 때문에 철수는 그녀가 메시지를 보낸 후, 몇 시 간 뒤에 답장을 보냈다.
[점심으로 먹은 겁니다.]
[근데 왜 반만 남았어요?]
[먹기 전에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 건데, 반쯤 먹고 나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다 먹었습니다]
어느 날은, 진흙이 잔뜩 묻은 구두의 사진을 보냈었다.
대충 철수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제이는 이번엔 길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독일에는 비가 많이 오나 봐요.]
[아니요. 여긴 해가 쨍쨍합니다.]
[그런데 진흙은 왜 묻은 거예요?]
[태오가 내 신발을 마음대로 신고 갔습니다.]
철수의 답장을 확인하고 제이는 옆에 있던 노랑이가 놀라서 도망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ㅡ 지금 나한테 동생이 자기 신발 마음대로 신고 나갔다고 이르는 거야?
철수가 보낸 사진을 보고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렸던 제이는 점점 그가 자신에게 오늘은 어떤 사진을 보낼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Rrrrrr.
밤늦게 제이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독일에 있는 철수였다.
- 제이, 잘 잤습니까?
한밤중에 아침 인사를 건네는 철수의 음성을 듣고 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 제이는 입을 열었다.
"한국은 지금 아침이 아니라 밤이에요."
-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빈틈없어 보였던 철수는 생각보다 허점이 많고 허술한 남자였다.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남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무슨 일이세요?"
- 그냥 요즘 제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덕분에."
철수가 말한 대로 단독 주택보다는 확실히 관리인이 있는 아파트가 여자 혼자 살기에 안전했다.
이사한 후로, 제이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없었고 주변에 괜히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없었으며, 소극장에서 하는 마술 공연도 사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기실에 놓여있던 편지는 그저 제이를 싫어하는 안티팬의 짓궃은 장난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 조만간 볼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할게요.”
통화를 끝낸 후, 제이는 침대 위에 올려져있는 부드러운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
띵동띵동.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제이는 급히 현관문 쪽으로 뛰어갔다.
'누구지,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오늘 제이는 얼굴이 작은 자신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었던 올림머리(긴 머리를 위로 높이 올려 묶어 땋은 것)를 했고, 주말 아침부터 굳이 화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로션 하나만 발랐다.
로션 하나만 발랐을 뿐인데도 그녀는 막 메이크업 샵에서 풀메이크업을 받고 나온 것처럼 민낯에서 빛이 났다.
화장을 안 해도 화장을 한 것처럼 투명하고 맑은 피부 때문에 제이는 학교 다닐 때, 주임 선생님에게 억울하게 혼났던 적도 있었다.
ㅡ 윤제이, 너는 학생이 학교에 공부하러 오면서, BB크림 같은 거 바르면 어떡하냐.
주임 선생님은 사춘기 여고생에게 흔한 여드름 하나 없는 제이의 피부를 보고, 학교를 오는데 BB크림을 발랐다고 오해를 한 것 같았다.
ㅡ 아니에요, 선생님. 저 BB크림 같은 거 안 발랐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만 하고 바로 학교에 온 제이는 펄쩍 뛰면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지만, 선생님은 도저히 제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건지,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의 피부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직접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다.
ㅡ 거짓말하지 마, 너 빨리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와.
선생님의 불호령에 어쩔 수 없이 제이는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야 했다.
ㅡ 정말 BB크림 같은 거 안 발랐는데…….
학교에 오면서 BB크림을 바르고 오고, 선생님에게 거짓말까지 했다는 이유로 벌점까지 받게 된 제이는 억울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울먹거리는 제이를 보고 옆에 있던 반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ㅡ 제이야, 너 진짜 BB크림 안바른 거야?
ㅡ 응, 정말 난 BB크림이 뭔지도 몰라.
화장품에 관심이 없었던 제이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스킨과 로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ㅡ 우와, 근데 너 피부 진짜 좋다. 완전 형광등 백 개 켜놓은 것 같아. 한번 만져봐도 돼?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은 제이의 피부가 연예인처럼 좋다면서 찬사를 쏟아내었다.
ㅡ 와, 진짜 최고다, 최고. 우리 사촌 동생 피부 만지는 것 같아.
ㅡ 윤제이, 부럽다! 어떻게 여드름에 주근깨 하나도 없냐.
ㅡ 제이야, 너 무슨 화장품 써? 혹시 엄청 비싼 화장품 쓰는 거 아니야?
제이는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제이가 바르는 스킨과 로션은 생일날 기범이와 윤정이에게 선물로 받은 순하고 저렴한 화장품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제이의 피부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다.
제이는 방송 촬영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메이크업을 받게 되었는데,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그녀의 피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ㅡ 제이 씨, 진짜 피부 좋은 것 같아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좋아요.
ㅡ 감사합니다.
제이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ㅡ 내가 메이크업하면서 연예인들이랑 슈퍼 모델들도 많이 봤거든요. 근데 제이 씨만큼 피부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살면서 피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듣긴 했지만,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것이었다.
ㅡ 다른 사람들은 피부 때문에 레이저다, 기능성 화장품이다, 돈 엄청 쓰는데, 제이 씨는 완전 돈을 버는 거예요.
제이는 '마술사학교'에서 우승하고 나서 우연히 화장품 CF를 찍게 되었는데, 보정이 필요 없는 제이의 피부 덕분에 그녀가 모델로 활동한 화장품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었다.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제이가 인터폰 받자, '이삿짐센터'라고 쓰여있는 모자를 쓴 아저씨의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누구세요?"
- 네, 이삿짐센터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이삿짐센터?
이삿짐센터를 부른 적이 없었던 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자, 아저씨가 다시 한번 말문을 열었다.
- 여기 로열 아파트 2301호 아닌가요?
"네? ……맞아요."
- 아가씨 이름이 '윤제이'아닌가요?"
"네? ……네."
- 그럼 여기 오는 거 맞아요. 빨리 열어주세요.
대뜸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아저씨를 보고 제이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열자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낑낑대면서 커다란 짐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제일 큰 방이 어디에요?"
"……아, 저기. 제일 안쪽에 있는 방이에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제일 큰 방의 창문을 열고 밑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맞으니까 얼른 올려보내요!"
뒤따라간 제이가 아래를 바라보니, 대형 가구를 들어 올리는 사다리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당황한 제이가 입만 벌리고 있는데, 뒤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우수수 들어오더니, 갖가지 가구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당황한 노랑이는 이미 거실 소파 밑에 숨어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수십 명의 직원이 들어와서 가구를 옮기자, 텅 비어있던 집안이 금세 가구들로 가득 채웠다.
집으로 들어온 짐들 - 작고 날렵한 요트 같은 책상, 고전적이면서 깔끔한 구조의 대형침대, 거대한 리클라이너 가죽 소파 - 은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이 하나도 없는 새 거인 것 같았다.
"저기, 아저씨. 그런데 여기 이 이삿짐이 다 누구꺼예요?"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는 이마를 옷소매으로 훔치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이 이삿짐 주인이 밑에 있어요. 조금 있다가 올라오시면 그분이랑 따로 이야기하세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남기고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두근두근.
1층에 내려가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력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제이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사는 집에 불쑥 가구를 들여놓은 사람이 누굴까.
혹시 오래전에 자신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 아닐까.
어느새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가 23으로 바뀌고, 엘리베이터 문이 지이잉 하고 열리자, 놀란 제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 강철수 씨?”
독일에 있는 철수가 말도 안 되게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항상 젠틀하고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평소와는 달리 앞머리를 내리고 편안하게 운동화에 캐주얼을 입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
제이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지만, 차분하게 이삿짐을 풀어서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는 철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ㅡ 반가워요, 제이. 오랜만이군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철수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이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 악수한 철수는 마치 제집인 것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놀랐고, 아직도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지만, 제이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그에게 물었다.
ㅡ 철수 씨, 여기는 웬일이에요?
ㅡ 독일에서 다행히 성공적으로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계약 조건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앞으론 거래 내용을 가지고 문제 삼지 않겠다는 확답도 받았습니다.
ㅡ 일이 잘 풀리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ㅡ 그런데 독일 본사에서 한국 시장을 시작으로 일본, 중국, 필리핀까지 진출하는 아시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철수의 목소리에 마치 데자뷰인것처럼 제이의 머리가 지끈지끈 또다시 아파졌다.
ㅡ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는 '말디'가 성공적으로 진출했지만, 아시아에 진출하는 건 한국이 처음입니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인데, 아무래도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내가 직접 한국으로 가는 게 좋다고 결정했습니다.
갑자기 든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든 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ㅡ ……그래서요?
ㅡ 앞으로 난 이곳에서 살 겁니다.
철수는 아주 무심한 어조로 제이의 의사 따윈 요만큼도 물어보지 않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에서 그녀와 함께 살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정말 철수 씨가 앞으로 여기에서 사는 건가.'
일단 제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철수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철수 씨, 잠깐만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제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철수 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시니까 너무 기뻐요. 다시 뵈니까 정말 반갑네요. 오랜만에요, 철수 씨."
"제이도 건강해 보이는군요."
"철수 씨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어요."
"……다행입니다."
철수는 다시 책장 안에 책을 하나하나 가지런히 꽂았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가다듬은 제이가 조심스럽게 철수에게 물었다.
"저기, 철수 씨. ……그런데 정말로 이곳에서 사시는 건가요?"
힐끔 뒤를 돌아본 철수가 짧게 대답했다.
"네."
너무나도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를 들고 제이의 눈동자가 가늘게 진동했다.
"철수 씨가 이곳에서 살면, ……저는요?"
"제이도 여기서 살아요."
말문이 막힌 제이가 빤히 철수를 응시하자, 그가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조만간 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었죠. 하지만……! 하지만 같이 살겠다는 얘기는 안 하셨잖아요."
철수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매만지면서 입술을 떼었다.
"……아, 내가 이야기 안 했습니까? 미안합니다. 이리저리 신경 쓸 것이 많아서 깜박했습니다. 밤을 새고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하군요."
피로가 한 가득 담겨 있는 철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제이는 다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이 집에서 사실 건가요?"
"그럼요."
"왜요?"
제이는 가까이 다가온 철수를 빤히 응시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펜트하우스는 제이와 철수가 같이 살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넓었지만, 대뜸 가구를 들여놓고 짐을 푸는 철수의 행동은 확실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한국에 오는 건 회사일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가 굳이 이곳에서 지내려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그가 가진 재력이라면 이곳이 아니더라도 지낼 만한 곳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굉장히 궁금했던 제이는 철수의 답을 기다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내 집이니까요.“
간단명료한 철수의 대답에 언뜻 제이의 표정에 실망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이곳은 철수의 집이었고, 자신은 잠시 공간을 빌려서 사는 것에 불과했지만, 들어오기 전에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의사를 물어볼 순 없었던 걸까.
일이 바빠서 깜빡했다고 했지만…….
그의 간결한 대답에 풀이 죽은 제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편히 쉬세요.”
그녀는 거실에 있는 노랑이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 문을 단단히 걸어잠갔다.
*
어깨를 아래로 축 내려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제이의 뒷모습이 어른거려 철수는 정리하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
한국에 들어가기로 하고 나서 당연히 제이가 사는 펜트하우스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철수는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녀가 사는 펜트하우스는 그녀 혼자 살기에는 굉장히 넓었고, 같이 살면 여러모로 돈도 절약되고, 예전에 보았던 제이의 고양이 '노랑이'도 자꾸 눈에 밟히고, 또 더욱 안전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그녀가 반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생각과 제이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ㅡ 정말 이 집에서 사실 건가요?
오랜만에 본 그녀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에 짧은 쇼트 팬츠를 입고 있었다.
쇼트 팬츠 아래로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각선미를 보고 철수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까 내 짐을 옮겨주려고 왔던 사람들이 다 본 건가.
ㅡ 그럼요.
ㅡ 왜요?
제이가 고개를 들어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철수는 그녀의 눈동자가 진갈색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독일에서 살다 보니 다양한 색을 가진 눈동자를 많이 보았었는데, 그토록 영롱하게 맑아 보였던 눈동자는 처음이었다.
ㅡ 내 집이니까요.
제이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한 철수는 도무지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그녀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남자였다.
Rrrrr.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은 철수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접니다. 저번에 강철수 씨께서 부탁하신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우연히 자선 파티에서 만난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간 독일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로, 독일어보다는 영어를 쓰는 게 편하다고 했다.
수억의 수임료를 챙기는 경제 범죄 전문 변호사로 한국 진출 관련해서 간단한 법적 문제에 대해서 자문했는데, 그는 흔쾌히 철수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 「다행히 그 부분에서는 한국 법에서 문제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독일인의 피를 물려받아 키가 크고 조금은 마른 체형인 그의 평판은 지적이고 젠틀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잘됐군요.」
이직 시차 적응을 끝내지 못한 철수의 눈꺼풀은 무거운 추를 달은 듯 묵직했다.
반쯤 눈을 감고 그의 설명을 듣던 철수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와 통화를 끝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터 블링켄베르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