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이를 품에 안은 제이는 방에 들어와서 문을 잠근 후 벽에 몸을 기대었다.
아직도 냉정했던 그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ㅡ 내 집이니까요.
그의 차가운 음성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한 제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ㅡ 선생님에게 진 '마음에 빚' 때문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사실 철수가 그녀에게 있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준 것도 돌아가신 아빠 때문이었지, 자신을 위해서 그가 마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 자신은 아빠라는 연결고리가 없었으면 쉽게 끊어질, 그저 그런 사이였으니까.
"야옹."
품에 안겨있던 노랑이가 제이의 마음을 아는 건지 대신 울어주었다.
"……노랑아, 이제 너랑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해."
노랑이가 좋아하는 캣 타워를 과연 내가 만들 수 있을까.
재료가 있고 공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철수가 만든 것처럼 크고 아름다운 캣 타워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든 제이는 그동안 철수가 보냈던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오늘 독일 날씨는 참 좋습니다.]
[아침 맛있게 먹어요.]
[잘 자요.]
[하늘에 구름 한 점도 없습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하길 바랍니다.]
[오늘 거래처에서 선물로 초콜릿을 받았습니다. 초콜릿 좋아합니까? 한국 갈 때 가지고 가겠습니다.]
[제이가 좋으면 나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인사치레하는 말이려니 하고 무심하게 넘어가고, 답장도 무성의하게 했지만, 매일 그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에 조금 설레고 가슴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점심은 파스타를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먹기 전에 찍었습니다.]
[일하느라 답장이 늦었군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생각보다 거래 협상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만약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말하세요.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화낸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답답했습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제이 걱정이나 하세요.]
[오늘 한국 아침 기온은 무척 낮습니다. 너무 얇은 옷 입지 마세요.]
매일 자신의 근황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멀리 떨어진 한국의 날씨 정보까지 알아내서, 자신을 챙겨주는 그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제이는 요즘 많이 바쁜 것 같군요.]
[행운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제이는 행운아에요.]
[그렇습니까? 잘 해결돼서 다행입니다.]
[제이가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보낸 황당한 사진을 떠올리면서 문득 웃음 짓는 날도 많아졌다.
[나도 힘들 때가 있긴 한데 제이 생각하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어느새 그녀는 그가 메시지를 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착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혹시나'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ㅡ 혹시 철수 씨가 나를……?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고, 제이는 당장 노랑이와 함께 이 집에서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철수가 보낸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이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채팅방에서 나가시겠습니까? 나가기를 하면 내용 및 채팅방 정보가 모두 삭제됩니다. ]
'취소'와 '확인' 버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제이의 엄지손가락이 끝끝내 '확인' 버튼을 눌렀다.
***
띵동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제이는 밝은 미소를 띠며 현관문으로 달려나갔다.
"네, 나가요."
인터폰을 확인하고 문을 여니 고소한 치킨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음! 향긋한 이 냄새!'
얼굴이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치킨 배달원이 제이에게 치킨이 담겨있는 흰 봉지를 건넸다.
"오늘도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원래 조금 늦게 문을 여는 치킨집이었으나, 단골인 제이가 전화를 하자, 치킨집 사장님께서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손수 치킨을 튀겨주셨다.
점심때 치킨을 주문한 사람은 처음이었는지 치킨 배달원은 궁금한 듯 제이에게 물었다.
"오늘 첫 손님이세요. 치킨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사실 제이가 치킨을 좋아하긴 했지만, 대낮부터 치킨을 시킨 건 철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서였다.
'다른 집을 어떻게 구하지.'
어제 밤늦게까지 여러 사이트를 뒤져보았지만, 가격도 괜찮고 위치도 적당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치킨 배달원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제이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식탁 위에 치킨을 올려놓으니, 고소한 냄새를 맡은 노랑이가 야옹, 하고 울면서 식탁 위로 뛰어 올라왔다.
바싹하게 튀겨진 치킨을 야무지게 잡고 입안에 넣었는데, 대문의 잠금장치가 '삐'하고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 시간에 누구야?'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지금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철수였다.
치킨을 먹느라 입을 쩍하고 크게 벌리고 있었던 제이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안에 잇는 치킨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위해 열심히 오물거렸다.
철수가 무작정 집 안에 들어온 뒤, 두 사람은 대화를 하기보단 일단 서로를 피해 다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생활하는 아침형 인간 철수와 점심 때쯤 일어나서 생활하는 올빼미형 인간 제이는 다행히도 그동안은 생활하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철수와 제이의 사이를 정의하자면 '휴전상태'인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부딪치게 된다면, 좋지 않은 싸움만 할 것이 뻔하기에, 서로 알아서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평일 대낮에 딱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내가 치킨을 먹고 있는 와중에 들어올 게 뭐람.
철수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치킨과 제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괜히 민망해진 제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킨이요.”
"지금 대낮부터 치킨을 먹는 겁니까?”
철수가 식탁 가까이 다가오자 민망해진 제이는 얼른 손으로 치킨을 가렸다.
"제가 엄청 치킨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가끔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점심으로 치킨을 먹기도 하거든요."
"스트레스요?"
"네."
"스트레스를 왜 받습니까?"
물끄러미 철수를 바라보던 제이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하면 무엇하랴 내 입만 아프지.
"점심부터 치킨이라니, 점심에는 밥을 먹는 게 좋습니다. 치킨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여서 몸에 안 좋아요."
제이의 식성에 대해서 잔소리를 한 철수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내가 집에서 치킨 먹는다고 잔소리를 듣다니, 집 없는 서러움이 이런 것인가.
제이는 노랑이도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집을 되도록이면 빨리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철수 씨는 어디 갔다 오셨어요?"
"나는 운동 갔다 오는 길입니다."
"이 근방에 헬스장 없던데."
"헬스장 없어도 운동할 수 있어요. 일찍 일어나서 주변을 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동이 됩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같이 살면서 느꼈던 건, 철수와 자신은 생활방식이나 생활습관이 판이하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치우고 살자는 주의의 제이와는 달리 철수는 항상 철두철미하게 정리하고 깔끔하게 청소하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정반대인 철수를 보면서 제이는 다시 한 번 집을 구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정말 이렇겐 못 살아.'
그와 그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철수 씨, 어디 가세요?"
"난 샤워하러 갑니다. 운동해서 땀을 너무 많이 흘렸거든요."
운동복을 벗으며 화장실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철수를 보고, 제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기, 철수 씨."
철수가 왜 부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저기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요, ……죄송한데, 치약 짤 때요. 조금만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치약이요?"
"네, 치약은 원래 끝에서부터 밀어 써야 하는 건데, 철수 씨는 항상 앞에서부터 짜시더라고요."
철수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고 제이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그랬습니까?"
"네."
"정말요?"
"네."
"……치약 좀 앞에서 짜면 어떱니까."
제이는 땅이 꺼질 듯이 길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같이 살면 친한 친구끼리도 멀어진다는 데, 철수와 친하지도 않고 성향도 완전히 달랐던 제이는 같이 산 지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문제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순순히 물러나야지.'
자신을 이 펜트하우스에서 내쫓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하는 철수를 보니, 그냥 자신이 얼른 집을 구하는 대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다.
"아, 근데 철수 씨.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사실 아까 화장실에 있는 전구가 나갔거든요."
보통 화장실 전구가 나가서 불이 안 들어오면, 관리실 아저씨께 부탁해서 전구를 갈아 끼우거나, 한동안 문을 열어두고 샤워를 했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두고 샤워를 할 수 없으니, 얼른 화장실 전구를 갈아야할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네, 제가 전구 가는 법을 몰라서 관리실 아저씨께 부탁하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구는 내가 갈겠습니다."
철수는 흔쾌히 제이가 내민 전구를 받아들고 화장실로 걸어가자, 그가 이렇게 순순히 화장실의 전구를 갈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집에 남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니까 좋네."
*
"제이! 잠깐만 이리 와 봐요."
철수의 목소리에 밝은 미소를 띠며 화장실에 달려간 제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실 조명 버튼을 눌렀다.
'……응? 안 들어오잖아?'
몇 번이나 버튼을 켰다. 껐지만, 백열 전구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직 안 갈았어요?"
"아니요. 갈아서 불이 잘 들어왔는데 내가 다시 전구를 뺐어요."
제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수를 바라봤다.
왜 갈아 놓은 전구를 다시 뺀 거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를 보고 철수는 손으로 의자를 탁탁 가볍게 내리쳤다.
"여기 올라가요."
"……네? 제가요? 무, 무서운데."
"자요, 내가 이렇게 허리를 잡고 있을게요."
제이의 허리를 두 손으로 집은 철수는 그녀를 번적 들어 올려서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그에게 허리를 붙잡혀서 높은 곳에 올려진 제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근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 고소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이 정도 높이 가지고 고소공포증이라니요. 제이도 화장실 전구 가는 법을 알아야 해요. 전구 가는 거 가지고 관리실 아저씨 힘들게 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같이 해요. 다음부터는 필요하면 혼자 해야죠."
……그러면 그렇지.
깊은 한숨을 내쉰 제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을 받들어서 철수에게 전구를 건네받았다.
"거기에 넣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 아니에요. 여기 아닌 건 같은데, ……아, 아파요! 철수 씨가 좀 잘 좀 봐요."
전구의 뾰족한 부분에 손가락이 찔린 제이가 단말마의 신음을 내질렀다.
"아니면 거기보다 조금 오른쪽 거기 아닙니까?'
"아뇨, 왼쪽인 것 같아요."
불이 꺼진 화장실에서 전구를 갈아 넣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을 활짝 열어 빛이 들어오게 했지만, 두 사람이 들어간 화장실 안은 좁고 어두컴컴했다.
"거기, 거기 맞잖아요!"
"……아니라니까요."
두 사람은 낑낑대며 전구를 갈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말 맞잖습니까. 제이. 거기에 넣는 거 맞죠?"
"……어? 정말 철수 씨, 말이 맞네요."
"그럼요, 내가 얼마나 잘 끼우는데."
어둠 속에서 전구를 넣어야 하는 소켓을 겨우 찾은 제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불이 나가면 애만 태웠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전구를 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기대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구멍에다가 잘 맞추고 천천히 돌려서 넣으면 됩니다."
근데 뭔가 우리 두 사람이 지금 나누는 대화가…….
천장에 달린 전구를 갈기 위해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은 제이의 티셔츠가 말려서 위로 올라갔다.
허리를 붙잡고 있는 철수의 손이 제이의 맨살에 닿자 그녀는 들뜬 비명을 질렀다.
"……꺄악!"
차가운 철수의 손이 허리에 닿자 소름이 돋은 제이가 폴짝 의자 밑으로 뛰어내리자, 철수가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뭡니까, 중간에 그만두면 어떡해요."
"……아, 저기 그게…… 그냥 철수 씨가 하시면 안 될까요?"
어두워진 화장실이라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제이의 얼굴을 불타오르듯이 붉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딱히 이상한 생각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전구를 갈면서 철수와 주고받는 대화가 이상야릇하게 느껴졌다.
"중간에 그만 두는 게 어디있습니까. 끝까지 같이 합시다."
"……그냥 나중에 해요."
"싫습니다. 치사하게 왜 이래요."
"하아, 진짜 이렇게 까지 해야 겠어요?"
"네, 그럼요. 당연하죠. 다시 올라가요. 내가 허리 잡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그의 집념은 알아줘야 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밑이 조금 더 긴 티셔츠를 갈아입고 나온 제이가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의자 위로 올라갔다.
"한번 해 봤으니까 이젠 잘 할 수 있겠죠?"
"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제이가 중간에 헤매지 않고 손쉽게 전구를 갈아 끼워 넣고, 버튼을 누른 후 화장실 불이 환하게 들어온걸 보고 두 사람의 표정도 함께 밝아졌다.
제이가 떨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던 철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밑으로 내려놓았다.
"우리 둘이 정말 합이 잘 맞는군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제이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
제이는 샤워하는 철수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일단 언제까지 문제를 껴안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고, 철수에게 자신의 계획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한집에서 사는 동안 철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철컥.
철수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제이는 살짝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거실로 나온 철수는 얇은 반소매 티셔츠와 가벼운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후우, 다행이다."
저번에 호텔에서 팬티 한 장만 입고 당당하게 나왔던 철수를 피하기 위해 제이는 방을 나가기 전에 항상 문틈으로 그의 복장 상태를 확인하고 나왔다.
집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치킨도 마음대로 못 시켜 먹고, 철수와 사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거실로 나온 제이는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는 철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철수 씨."
"왜요?"
"잠깐 할 말이 있어서요."
"이리 와서 앉아요. 마침 나도 줄 게 있으니까."
고개를 갸우뚱한 제이는 조심스럽게 철수의 옆에 앉았다.
"자, 이거요."
철수가 제이에게 건넨 것은 오밀조밀 예쁜 조개 모양으로 생긴 초콜릿이 담긴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초콜릿이요. 내가 저번에 초콜릿 사다 준다고 말했었잖아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왜요? 내가 기억 못 할 줄 알았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철수가 들고 있던 신문에 눈을 떼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저한테 메시지 보낸 사람이 철수 씨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까 완전히 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메시지 보낸 사람이 철수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닐까……."
철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보고 제이는 재빨리 주제를 바꾸었다.
"저기, 제가 철수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은요."
"그래요.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저는 방이 구해지는 대로 여기서 나갈게요."
한 손에 신문을 쥐고 비스듬히 앉아있던 철수가 자세를 고쳐앉고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제이한테 나가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냥 나랑 같이 살아요.“
할 말이 없어진 제이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손장난만 쳤다.
"제이, 지금 제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잊고 있나 보군요.“
"글쎄요. 전 사실 그렇게 위험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날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고, 요즘 소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데 공연하기 전에 여러 번 마술 도구를 점검하니까,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저번에는 불을 이용한 마술을 했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평온하게 이어지는 일상에 제이는 아무래도 자신이 별거 아닌 편지를 가지고 괜스레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고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내가 날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린 게 아닐까.
"제이."
"……네?"
"한국 전쟁이 왜 일어난 줄 압니까?"
"왜 일어났는데요?"
그녀의 당돌하게 묻자 갑자기 철수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기져다 댔다.
"……방심해서."
그의 숨소리가 자신의 귓바퀴에 닿자 제이는 온몸에 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었다.
"한 달 동안 아무 일 없었다고 해서 지금 제이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 그의 말을 멈추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하기에 제이는 얼른 끼어들어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럼 철수 씨는 제가 걱정되어서 저랑 같이 살겠다고 하신 거예요?"
"……뭐, 그건 아닙니다."
속이 답답해진 제이는 왼손바닥으로 가볍게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난 제이가 나와 같이 사는 거로 알겠습니다.”
"……네에?”
지금까지 자신이 철수에게 열심히 했던 말을 그는 요만큼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서 제이는 잔뜩 표정을 찌푸렸다.
"같이 사는 게 여러모로 좋습니다.”
"철수 씨, 정말…….”
제이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철수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이 남자는 왜 항상 이렇게 제멋대로 내 인생에 끼어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