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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소중한 그대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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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동거와 홈 셰어의 미묘한 차이
작성일 : 17-11-06     조회 : 64     추천 : 0     분량 : 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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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회화 수업을 듣는 내내 제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서든 이사하기 전에 철수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인 것 같으니, 먼저 집을 구하는 대로 빨리 펜트하우스에서 나가버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또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하나.

 제이는 노랑이가 뛰어놀 수 있는 캣 타워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집을 구하려고 하니 현실적으로 강남에서 널찍한 방을 구하는 건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일단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이 팔려야지, 이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이가 살던 구역은 재개발 지역도 아니었고, 집도 단독주택이라서 빨리 팔리지 않았다.

 

  “Good bye. See you nest class(잘 가요. 다음 수업에서 만납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영어 회화 수업이 끝나 있었다.

 

 제이는 영어 회화 교재와 필통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옆에 앉아있던 윤정이는 손까지 들어가면서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는데 이렇게 딴생각만 하다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아닐까, 얼른 새로운 집을 구해야겠어.

 

  "제이야, 우리 영어 수업 같이 듣는 린다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는데 어때?"

 

 윤정이 시선을 돌린 곳에는 노랗게 탈색한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은 린다가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 티셔츠에 쇼트 팬츠를 입은 린다는 꽤 자유분방한 성격인 것 같았지만,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지켜본 결과 그리 나쁜 아이 같진 않아서, 제이는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응, 난 좋아."

 

 

 *

 

 

 영어 학원 근처에 있는 돈가스집으로 향한 세 사람은 창가 쪽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린다는 피자 돈가스, 윤정과 제이는 치즈 돈가스를 시키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세 사람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눴다.

 

  "내는 진짜로 놀랐다. 우리 영어 학원에 윤제이가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아, 윤제이라고 말해도 되나?"

 

  "응, 그럼. 우리 동갑이잖아. 편하게 말 놓자."

 

 제이는 앞에 놓여있는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해서 생애 최초로 서울살이를 하는 린다는 낯을 많이 가리는 제이와는 다르게 무척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마침 주문한 치즈 돈가스가 나와서 조용히 돈가스를 먹고 있는 데, 핸드폰이 진동했는지 린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석이가. 그래, 알았다. 내가 집에 들어갈 때 뚫어뻥 사 갈게."

 

  "형석이가 누구야?"

 

 분명 린다가 외동딸이라고 말한 것 같았는데, 윤정의 질문에 제이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룸메다, 룸메. 룸메이트."

 

  "룸메이트? 그럼 형석이가 네 남자친구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은 집에만 사는 거지. 사귀는 건 절대 아니다. 형석이랑 나는 진짜로 친한 친구지, 남자 여자, 뭐, 그런 건 진짜 말이 안 된다."

 

 ……그냥 같이 사는 거라고?

 의아해진 윤정과 제이가 고개를 돌려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내가 처음에는 그냥 집에서 학교 다닐라, 그랬거든. 근데 왕복 5시간인데, 진짜 미치겠더라. 그래서 급하게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잡았는데, 작은 방은 이미 다 나갔고 큰 방밖에 없다네."

 

 마주 앉은 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린다의 말에 맞장구쳤다.

 

  "맞아, 대학교 근처에 집은 새 학기 시작되기 전에 다 나가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큰방에서 살았는데 방값이 너무 비싼기라. 서울 방값 왜 이래 비싸노. 내 그래가지고 인터넷에서 룸메이르릍 구했는데, 형석이가 연락한 거지. 내도 처음에는 '내가 미친나 남자랑 살게' 이랬는데 집에 남자가 있으니까 확실히 편하긴 편하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철수와 살면서 조금 느끼고 있던 바였기에 이번에는 제이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하긴 두 사람이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같이 살아도 괜찮다고 하더라고."

 

 제이는 인터넷으로 알게 된 낯선 남자와 한집에서 산다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데, 윤정은 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내 친구도 미국으로 대학교 갔는데 거기에는 여자랑 남자랑 같이 룸메이트 하는 혼성 기숙사가 있대."

 

 옆에서 제이가 놀란 듯 되물었다.

 

  "정말?"

 

  "응, 사실 같이 사는 데 성별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거든. 서로 배려만 한다면 남자랑 여자랑도 잘 살 수 있는 거니까."

 

  "맞다. 내 친구도 학교 근처에서 룸메랑 같이 사는 데, 갸는 여자인데도 남자보다 더 더러워서 미치겠다고, 죽겠다 하더라."

 

 가만히 있던 제이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럼 너는 형석이랑 동거하는 거야?"

 

  "동거? ……아니지! 동거가 아니라 홈 셰어다, 홈 셰어."

 

  "……홈 셰어?"

 

  "그럼 동거는 한 방에서 같이 지내는 거고, 홈 셰어는 서로 각자의 방이 있고, 거실이나 화장실만 같이 쓰는 거다. 방값도 아낄 수 있고 되게 좋다. 살만하다."

 

 홈 셰어라니, 사실 제이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였지만, 린다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

 

 

 

 어린아이가 살짝만 밀어도 넘어질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진 제이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기대었다.

 

 아까 린다와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심란해진 제이는 핸드폰을 들어서 즐겨보던 웹 소설의 업데이트를 확인하고 천천히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바보 같은 시후가 드디어 소희에게 고백하는 결정적인 장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ㅡ 사실은 내가 와 형석이랑 같이 살려고 했냐면,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살다 보니까 이상한 일이 많더라.

 

  ㅡ 이상한 일? 어떤 일?

 

 순간 린다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제이의 애교살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린다에게 물어봐서는 안 될 것을 물어본 것 같았다.

 

  ㅡ ……미안해. 내가 괜한 질문을 할 것 같아.

 

  ㅡ 아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러나. 괜찮다.

 

 린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했지만 제이는 심장 위에 돌을 올려놓은 듯 가슴이 묵직해졌다.

 

 Rrrrr.

 

 지하철 안에서 큰소리로 울려대는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란 제이는 경쾌하게 울리는 에델바이스를 멈추기 위해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제이의 귓가로 철수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 제이. 어디입니까?

 

  "지금 지하철 타고 가는 중이에요."

 

  - ……정말로 집에 오는 중입니까?

 

 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말투에 제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네, 지금 가는 중이에요."

 

 소곤소곤 속삭이는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주변을 살핀 제이는 다행히 칸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한테 무슨 따로 할 말 있으세요?"

 

  -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근데 왜 전화하신 거예요?"

 

  - ……난 제이가 오늘 안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는 것 같았지만 제이는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무던하게 넘겨버렸다.

 

  "왜요?"

 

  - 집에서 나간다고 했잖아요.

  "……."

 

 간결하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철수의 목소리에 제이의 눈동자가 가을바람이 부는 들판처럼 넘실거렸다.

 

 이 남자는 왜 자꾸 이런 소리를 해서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걸까.

 

  "……오늘은 들어갈 거에요."

 

 철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이는 차갑게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지하철은 신도림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다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제이는 공허한 표정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의 질문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보려는 듯 린다는 고맙게도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ㅡ 무슨 일이 있었냐면, 사실은…… 내가 살던 곳에서 자꾸 이상한 놈이 창문으로 날 지켜보고 있는 기라.

 

  ㅡ 어떡해. 무서워.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제이가 팔로 몸을 꽉 끌어안았고, 윤정도 긴장한 표정으로 린다를 바라봤다.

 

 린다는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 듯 들고있던 젓가락을 밑으로 내려놓았다.

 

  ㅡ 나도 진짜로 그때 무서워서 한동안 집에를 못 들어갔다. 우리 집 건너편에서 사는 미친놈이 창문으로 계속, 진짜 계속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라.

 

  ㅡ 미친놈이 할 일도 되게 없나 보네.

 

  ㅡ 그러니까. 내 진짜로 너무 무서워가지고 소리 지르고 경찰에 신고하고 그랬거든. 근데 경찰이 오니까 또 자기가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는 기라. 내 진짜로 사람이 어떻게 그리 뻔뻔할 수 있나 싶었다. 막 경찰한테 화를 내더라. 내가 왜 저 여자 방을 훔쳐보냐고.

 

 당시 혼란스러웠던 린다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해서 제이는 힘겹게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ㅡ 린다야, 정말 많이 놀랐겠다.

 

 윤정이 린다의 손등을 쓰다듬자 긴장이 조금 풀린 듯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ㅡ 그래서 내가 남자랑 사는 거다. 진짜로 여자 혼자 살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그리고 또 너무 불안해서 못 살겠더라.

 

 정말 얼마나 놀랐을까, 제이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린다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제이도 집에 낯선 자가 침입한 흔적을 보고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린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ㅡ 여자 혼자 사는 건 진짜 많이 위험한 것 같다. 다행히 요즘에는 형석이랑 같이 살아가지고 훔쳐보거나 불안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진짜 다행이지.

 

 리다는 함께 사는 친구 덕분에 그래도 트라우마가 조금은 치유된 듯 보였다.

 

  ㅡ 응, 진짜로 여자 혼자 사는 건 너무 위험해. 내가 요즘 범죄심리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어. 근데 교수님한테 들었는데 강력범죄의 피해자 중 90%가 여자래.

 

 ……90%? 압도적인 숫자에 놀란 제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ㅡ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뉴스 같은 거 보면 진짜 여자들만 죽어나더라.

 

 강력범죄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털이 삐죽 서고 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었던 제이는 한 번도 기사를 클릭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가 잦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압도적일 줄은 몰랐었다.

 

  ㅡ 심리학에서 범죄자는 범행 대상을 고를 때 상대적으로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을 고른대. 그런데 범죄자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사는 여자보다 혼자 사는 여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확실히 크대.

 

  ㅡ 그,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제이가 다시 물어보자 윤정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빨리 철수와 함께 사는 펜트하우스를 나와서 따로 살 생각을 하고 있던 제이는 돈가스가 꽂혀있던 포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한약을 달여 마신듯 혀끝이 씁쓸했다.

 

  ㅡ 나도 자취하기 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는 뭐, 분홍색 커튼을 달지 말아라, 남자 구두 같은 거 집안에 놔둬라. 집에 바로 들어가지 말고 좀 돌아서 가라, 뭐 이런 주의사항 같은 거 있어서 다 지켰거든. 근데 그런 거 다 소용없더라.

 

  ㅡ 그래서 어떻게 됐어?

 

  ㅡ 다행히 결찰이 와가지고 그 남자한테 뭐라 그러고, 주인아줌마도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 뒤로 안 그러긴 했는데 그래도 영 불안하더라.

 

 주로 학생들이 자취하는 다세대 주택은 건물이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따로 신경 써주는 관리인이 없어서 보아에 많이 취약한 것 같았다.

 

 아무리 방이 넓고 방값이 싸더라도 다세대 주택으론 절대 이사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ㅡ 관리인 있는 오피스텔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야. 내가 아는 언니도 완전 이상한 일 겪었잖아.

 

  ㅡ ……뭐, 뭔데?

 

 제이가 불안한 듯 속눈썹을 파닥거리며 윤정에게 물었다.

 

  ㅡ 같이 봉사활동 하면서 알게 된 직장인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그 언니가 제이처럼 되게 착하고 어른한테 예의 바른 성격이거든. 근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는 거야.

 

 긴장한 제이는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키고 윤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ㅡ 근데 그게 누구였냐면, 바로 언니가 사는 오피스텔에 관리인 아저씨였던 거지.

 

  ㅡ 관리인 아저씨가 밤에 그 언니 집에 와 찾아오나?

 

  ㅡ 그게…….

 

 윤정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애가 탄 린다가 다급한 목소리로 윤정을 재촉했다.

 

  ㅡ 뭐꼬, 왜 찾아왔는데. 답답해 죽겄다. 빨리 말해봐라.

 빨리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제이도 얼른 말해달라는 듯 윤정에게 눈짓했다.

 

  ㅡ 그게……. 진짜로 언니 아버지뻘 되는 관리인 아저씨였거든.

 

  ㅡ ……그런데?

 

 제이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묻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서리를 치던 윤정이 어이없어하며 말문을 열었다.

 

  ㅡ 문을 열었더니 글쎄 관리실 아저씨가 캔맥주를 들고 서 있더래.

 

  ㅡ ……헐. 그 아저씨 미친 거 아이가?

 

 린다와 윤정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 쳤지만, 영문을 몰랐던 제이는 두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ㅡ 언니는 관리인 아저씨가 힘든 일 하신다고 생각해서 음료수 같은 거나 간식 같은 거 챙겨드리고 그랬는데, 관리인 아저씨가 '원래 그렇게 눈웃음을 잘 치냐'면서 같이 맥주 한잔하자고 하더래.

 

 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제이가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힘겹게 한마디를 던졌다.

 

  ㅡ 진짜로 끔찍하다.

 

 제이는 단독주택의 가격, 평수 그리고 그녀의 연락처가 인쇄된 전단을 보고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와 살던 단독주택이 빨리 팔려야 펜트하우스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이는 직접 인쇄소에 가서 매매를 홍보하는 전단을 만들었는데,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다세대 주택도 위험하고, 오피스텔도 위험하고, 그럼 혼자사는 여자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냥 마음 편하게 철수의 집에서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서 제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실 아직 제이는 혼자 살 때의 불안함보다 철수와 함께 살 때의 불편함이 더욱더 크게만 느껴졌다.

 

 또 막 내 앞에서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면 어떡해.

 

 쉬이익, 바람 소리를 내며 지하철 문이 열리자 제이는 전단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

 

 

 

 제이와 통화를 마친 후, 철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현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ㅡ ……오늘은 들어갈 거에요.

 

 보기와는 다르게 고집이 무척 셌던 제이는 기어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살면 좋을 텐데 왜 굳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거야.

 

 제이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던 철수는 팔짱을 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삐.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고 제이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던 철수는 짐짓 아닌 척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서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면서 눈동자로는 집에 들어온 제이를 주시하고 있던 철수는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종이 한 묶음을 발견했다.

 

  "제이, 그게 뭡니까."

 

  "……아, 이거요?"

 

 제이가 시선을 피하면서 전단을 숨기려고 하자 철수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만 줘봐요."

 

 전단을 받아든 철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가자, 제이가 변명하듯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괜찮은 아파트를 구하려면 아빠랑 살던 단독주택을 팔아야 할 것 같은데 잘 안 팔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직접 전단을 만들어서 홍보하려고 한 겁니까?"

 

 정곡이 찔린 건지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철수가 제이에게 전단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면 그냥 내가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정말요?"

 

 왠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에서 화색이 도는 듯해서 저절로 이맛살이 구겨졌지만 철수는 인내심을 갖고 말을 이어갔다.

 

  "네, 그래요. 제이가 여기에서 나가는 것보다 내가 나가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저기, 철수 씨……."

 

  "아니요. 내 말대로 하세요. 그냥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합시다."

 

 지금 대화를 하면 내일 새벽까지 끝장토론이 벌어질 것 같아서 철수는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서 제이의 입을 막았다.

 

  "……그럼 편히 쉬세요."

 

 철컥.

 

 방으로 들어간 제이가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 철수는 이마에 화르륵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무언가를 바라고 그녀를 도와준 건 아니었지만, 아직도 자신을 빈틈없이 믿지 못하는 제이를 보니 한숨을 절로 튀어나왔다.

 

 일단 내일 당장 호텔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철수가 얼음을 꺼내서 유리컵 안에 넣자 얼음일 굴러가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잇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리모컨을 눌러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재생시키고 마음을 진정시킨 철수는 일단 앞으로의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는데 제이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거실로 나왔다.

 

 들고 있던 리모컨으로 음악의 볼륨을 줄인 철수가 고개를 돌리니 상기된 표정의 제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수 씨!"

 

  "……?"

 

  "철수 씨, 저랑 같이 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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