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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소중한 그대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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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우리 이제 같이 살아요
작성일 : 17-11-06     조회 : 55     추천 : 0     분량 : 8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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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제이의 손끝은 아직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ㅡ 철수 씨, 저랑 같이 살아주세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런 대담무쌍한 말이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당시 제이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이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철수는 직접 치킨 가게에 전화해서 사장님께 항의하고 있었다.

 

 제이가 받은 메시지를 직접 읽어 본 철수는 잔뜩 성이 난 표정이었지만 다짜고짜 화내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제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하고,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다.

 

 제이는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철수와 한 차례의 언쟁을 벌인 제이는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철수를 펜트하우스 밖으로 쫓아버리려고 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상황이 마음대로 제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ㅡ ……후우.

 

 요즘 들어 한숨을 쉬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었다.

 

 일단 그의 말대로 지금은 잠자리에 들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제이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ㅡ 딩동.

 

 핸드폰 신호음이 울리자 제이는 오늘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던 린다가 집에 잘 들어갔느냐고 안부 메시지를 보낸 줄로만 알았다.

 

 쾌활한 성격에 살뜰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린다의 배려에 가슴이 따뜻해진 제이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ㅡ ……어? 이건 모르는 번호인데.

 

 낯선 번호로 보내진 메시지는 제이와 자주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무척 친근하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ㅡ [안녕하세요.^^ 윤 제이 씨]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혹시 깜박하고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나 싶었던 제이는 손가락을 타닥타닥 움직여서 메시지를 전송했다.

 

  ㅡ [……죄송한데 누구세요?]

 

  ㅡ [저는 XX 치킨 배달원 이정민이라고 합니다.]

 

  ㅡ [네? 무슨 일로…….]

 

 치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나한테 연락이 온 거지?

 

 혹시 철수 씨가 치킨을 시킨 건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제이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상대방이 자신이 보낸 메시지에 답을 하기만을 기다렸다.

 

  ㅡ [그저께 치킨 배달한 사람인데 제가 윤 제이 씨 팬이라서 연락 드렸습니다.]

 

 낯선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제이는 잠시 멈칫했지만, 상대가 자신의 팬이라는 말을 하자 그녀는 형식적인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ㅡ [네, 고맙습니다.]

 

 별거 아닌 거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아까 돈가스집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가 수상쩍게만 느껴졌다.

 

  ㅡ [고민하다가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제이 씨 혼자 살면 밤에 무섭지 않으세요?]

 

 깜짝 놀란 제이의 입에서 헐, 하는 외마디의 비명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만약 내가 혼자 살지 않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치킨 배달원이 밤에 집으로 불쑥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쾌감에 몸이 떨리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제이는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튀어갔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치킨집 사장님과 길고 긴 통화를 마친 철수가 소파 위에서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제이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제이. 앞으론 이럴 일 절대 없을 거라고 사장님이 이야기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잔뜩 풀이 죽은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끝만 바라봤다.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밤에 무섭지 않냐고는 왜 물어보는 건지, 내가 그 녀석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고 싶네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이의 만류에 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에 앉았지만,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듯 씩씩대면서 얼음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제이, 그럼 앞으로 나랑 같이 이곳에서 사는 겁니까?"

 

  "……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전화해서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그놈이 다시 연락하거나 이 집으로 찾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나마 철수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이는 물끄러미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이제부터 나랑 같이 여기서 사는 거죠?"

 

 제이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어제 경악할 만한 커다란 일이 있었지만 제이는 철수 덕분에 불안해하지 않고 잠을 깊이 잘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한 집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든든한 기분이었다.

 

 사실 펜트하우스는 노랑이와 단둘이 살기에는 조금 넓은 감이 있었고, 텅 비워진 방을 보면 왠지 모르게 삭막한 기분이 들어서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전시용으로 설치한 모델하우스 같기도 했다.

 

 단지 가구들이 들어와서가 아니라 사람 한 명이 더 들어온 것이 집안의 분위기를 조금 더 밝고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시켰다.

 

  "다녀왔습니다."

 

 철수와 함께 살면서 제이는 집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노랑아, 이리와. 잘 놀고 있었어?"

 

 혼자 살 때는 노랑이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을 걱정하면서 밖에서 제대로 일도 보지 못하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철수가 집에 있어서 편하게 밀린 일을 전부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제이, 어디 갔다 왔습니까?"

 

  "잠깐 방송국 PD님을 만났어요. 새로 프로그램을 시작하시는데, 같이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요? 잘 됐군요."

 

 집에 있을 때는 편한 옷을 입는 자신과는 달리 철수는 항상 집에서도 단정하게 머리 손질도 하고 옷을 갖춰 입은 채로 생활했다.

 

 단 추를 두어 개 푸르고 약간은 여유 있게 흐르는 슬림핏 바지를 입은 철수는 옷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옷을 고르는 센스도 있는 것 같았다.

 

 제이는 소파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철수에게 물었다.

 

  "철수 씨, 커피 마실래요?"

  "

 

  "좋습니다."

 

 밖에 외출하러 나갔다가 사 온 달달한 마카롱과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엔 나도 커피 믹스 말고 철수 씨가 먹는 아메리카노를 먹어 봐야지.'

 

 양손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속으로 아자, 하고 외친 제이가 선물 상자에 담겨 있는 마카롱을 예쁜 접시에 옮겨 담아서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컵과 함께 트레이에 들고 철수에게 다가갔다.

 

  "……아, 고맙습니다."

 

 뭔가 하는 일이 바쁜 것인지 철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노트북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철수는 한 손으로 커피를 들고 마시면서 눈으로는 화면에 빼곡히 들어 차있는 숫자를 바라봤다.

 

  '저러다간 커피를 쏟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제이는 괜히 철수에게 잔소리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분홍색 마카롱을 입안으로 넣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네?"

 

  "방송국 PD가 프로그램 같이하자고 했다면서요. 어떤 프로그램이었습니까?"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마술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평일 낮에 30분 정도 방영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인데."

 

  "그런데요?"

 

  "음, 그냥 못하겠다고 거절했죠."

 

 살포시 웃음을 터트린 제이와는 달리 철수는 무섭게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구겼다.

 

 어리둥절해진 제이가 슬쩍 철수의 눈치를 살폈다.

 

  "왜 거절했습니까. 제이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아이들 싫어합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이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철수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아이들한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아무 말 없이 빤히 제이를 바라보던 철수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전 아이들에게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어요."

 

 두 사람은 또다시 말없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종종 철수와 제이 사이에는 고용한 정적이 흘렀는데, 그와 그녀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다.

 

  "다 먹었으면 가져다 놓을게요."

 

 간단한 티타임을 가진 후, 제이는 다 먹은 접시와 머그컵을 부엌으로 가져갔다.

 

 철수의 머그컵은 다 비어 있었는데 제이의 머그컵은 반 이상 아메리카노가 남아 있었다.

 

 한 입만 먹어도 입안 전체가 달달한 마카롱과 함께라도 아메리카노는 써도 너무 썼다.

 

  '그러고 보니 철수 씨는 마카롱을 하나 밖에 안 먹었네. 철수 씨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나.'

 

 간단히 설거지를 마친 제이가 커피 믹스 통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으려고 팔을 뻗었는데 찬장에 손이 닿지 않았다.

 

 발끝으로 선 제이가 더욱더 길게 팔을 쭈욱 뻗었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제이가 넘어지지 않게 비틀거리는 어깨를 잡고, 커피 믹스 통을 대신 찬장 위에 올려두었다.

 

 키가 작은 그녀를 대신에서 찬장에 커피 믹스를 올려놓아 준 사람은 제이보다 키가 훨씬 큰 철수였다.

 

 최대한 힘을 빼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잡은 철수의 손은 두껍고 뼈마디가 굵었다.

 

 철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린 제이의 입에서 외마디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꺄악!"

 

 자신의 뒤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철수 때문에 깜짝 놀란 제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소리쳤다.

 

  "강철수 씨, 정말 더는 못 참겠네요! 이럴 거면 우리…… 계약서 써요!"

 

 

 

 ***

 

 

 

 제이가 자신에게 대뜸 내민 것은 '홈 셰어 계약서'와 '가사분담표'였다.

 

 머리를 갸웃거린 철수가 삐딱한 음성으로 제이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합리적이고 원활한 동거 생활 ……아니, 홈 셰어 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한 거예요."

 

 철수는 손으로 턱을 괴며 슬쩍 제이의 표정을 바라봤다.

 

 갑자기 이런 걸 들이미는 제이의 저의가 궁금하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고분고분 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제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확실하고 분명하게 요구하는 여자였다.

 

  "일단 집안일 분담표부터 작성했으면 좋겠어요."

 

 제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혼자 산 지 오래돼서 집안일 하는 것에 능숙했던 철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먼저 제안해놓고 자신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이를 보며 철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정확하게 집안일을 분담하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이 혼자만 고생하는 거 보기 싫었는데…… 나도 찬성입니다."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던 제이가 생긋 미소 짓는 것을 보자 또 한 번 철수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건 어디에서 알아본 겁니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있었어요. 제가 집안일을 어떻게 나누는 건지 알려 드릴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사이듯이 설명했다.

 

  "일단 집안일을 세세하게 나눴어요. 청소는 청소대로, 세탁은 세탁대로. 각자가 좋아하는 집안일을 맡아서 하면 훨씬 좋다고 하더라고요."

 

 철수와 제이는 서로 충분히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맡아서 할 집안일을 정했다.

 

 

 <가사 분담표>

 

 강철수 : 청소(화장실 청소, 걸레 젤 하기) / 식사준비 및 설거지(설거지) / 쓰레기(쓰레기 버리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 세탁(이불 빨래, 이불 널기, 이불 털기, 다림질) / 경제(공과금 납부, 가계부 작성, 생필품 체크)

 

 윤제이 : 청소(청소기 돌리기, 냉장고 청소) / 식사준비 및 설거지(장보기, 식사 준비) / 쓰레기(분리수거 재활용) / 세탁(세탁기 돌리기, 세탁물 정리, 베개 빨기)

 

 

 제이는 꽉 채워져 있는 가사분담표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철수가 자신의 뜻대로 순순히 가사분담표를 작성해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 오히려 그가 나서서 집안일을 도맡겠다고 하니 놀라우면서도 신기했다.

 

 신이 난 제이는 이번에는 홈셰어 계약서를 꺼 내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아서 인쇄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정할 것은 없었고 서로에게 원하는 것만 써넣으면 되었다.

 

 

 제9죠 의무사항

 1."갑"과 "을"은 서로가 원하는 의무사항을 이행한다.

 2."갑"은 아래와 같은 의무사항을 이행한다.

  1)

  2)

  3)

 3."을"은 아래와 같은 의무사항을 이행한다.

  1)

  2)

  3)

 

 

  "10분 동안 여기에 개인적으로 쓰고 싶은 거를 쓰세요."

 

 핸드폰으로 10분 타이머를 맞춘 제이는 시험을 칠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무엇을 쓸지 고민했다.

 

 철수에게 딱히 바라는 건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집에서 해주었으면 하는 행동과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이 몇 가지 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빈칸에 예쁘게 글씨를 쓰고 있는 제이와는 달리 철수는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빤히 홈셰어 계약서를 보고 있다가, 볼펜을 들어 사사삭 무언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철수가 홈셰어 계약서를 엎어놓고 볼펜을 탁 소리 나게 올려놓자, 아직 다 쓰지 않은 초조해진 제이는 글씨를 빨리 쓰기 시작했다.

 

  "천천히 쓰세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습니다."

 

 마지막 한 줄을 채워 넣고 제이가 볼펜을 내려놓자, 핸드폰에 맞춰놓은 10분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철수는 그녀의 홈셰어 계약서를 가져갔다.

 

 

 2."갑"은 아래와 같은 의무사항을 이행한다.

 

  1) 노랑이와 가끔 놀아주기

 

  2) 집에서 옷을 벗고 돌아다니지 않기

 

  3)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기.

 

 

 빤히 계약서를 바라보던 철수가 시니컬한 어조로 질문했다.

 

  "노랑이라면 저기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 말하는 겁니까?"

 

 철수가 캣 타워 위에서 낮잠을 자는 노랑이에게 손가락질 하자 제이가 미간을 좁혔다.

 

  "……네, 노랑이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건데 철수 씨가 노랑이랑 단둘이 있을 때 가끔 놀아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철수의 시원한 대답에 제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한 번 그와 눈을 마주쳤다.

 

 사실 쓰면서도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 했지만, 철수가 흔쾌히 받아들여 주니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집에서도 심심하지 않을 노랑이를 생각하니 기뻤다.

 

  "두 번째 항목은……."

 

  "그건 정말로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집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으신 건 알지만 그래도 갑자기 벗고 그러시면 진짜 당황스럽단 말이에요."

 

 제이는 그동안의 황당함을 털어내 듯이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사실 제이가 철수에게 계약서 쓰는 것을 요구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두 번째 항목 때문이었다.

 

 딱히 그를 남자로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옷을 벗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낯부끄럽고 쑥스럽고 괜히 얼굴이 화끈해졌으며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제이는 혹시 철수가 자신에게 그냥 서로 편하게 있자고 말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철수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미안합니다. 내가 혼자 살던 게 버릇이 되어서 그랬습니다."

 

 철수의 말에 제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철수는 제이에게 진심으로 사과까지 건넸다.

 

  "그럼 다음은…… 이건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니다."

 

  "그런가요?"

 

  "네, 난 술하고 담배 안 좋아해요."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놀랐던 건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담배를 피우고, 훨씬 더 자주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까 술 한 잔 정도는 해도 되는 것이었지만, 제이는 처음 술을 한 잔 마셨을 때 얼굴이 빨개지고 기억을 읽은 적이 있어서, 술 냄새를 맡는 거조차도 싫어했다.

 

 그리고 담배 냄새는 더더욱 싫어해서, 길을 걸을 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멀찍이 돌아서 가느라 친구들과의 약속에 늦은 적도 있었다.

 

  "난 하루에 한 갑씩 피는 담배도 낭비라고 생각해서, 살면서 단 한번 도 담배를 피워 본적이 없습니다."

 

 같이 살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철수는 정말 절약이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철수는 사람이 없는 방에 켜져 있는 불을 끄기도 했고, 쓰지 않는 콘센트는 항상 뽑아 놓았으며,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손수 무릎을 꿇고 소파 밑을 뒤지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조 단위의 부자인 철수는 동전 하나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따로 무어라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이도 철수가 절약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따라서 방에 불을 끄거나, 쓰지 않은 콘센트를 뽑아두었다.

 

 철수와 함께 살게 되면서 제일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 건, 생각지 못하게 낭비하는 자신의 생활 습관을 다시 되돌아본 것이었다.

 

  "좋습니다. 난 세 개 다 받아드리겠습니다. 가끔 고양이랑도 놀아주고, 옷은 절대 벗고 돌아다니지 않겠고, 집에서 술이나 담배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입니까?"

 

  "네, 철수 씨. 철수 씨도 쓰신 거 보여주세요."

 

 제이는 철수가 내민 홈셰어 계약서를 보고,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 한채 입을 작게 벌렸다.

 

  "……정말 이런걸 원하시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제이가 싫다고 하면 난 그냥 이곳에서 나갈 겁니다."

 

  "……."

 

 정말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철수가 조금은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바보같은 착각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제이의 표정은 심하게 구겨졌는데 반해 철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제이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동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게 낫겠습니까?"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쉰 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딱 감고 서명란에 사인했다.

 

  "……네, 해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앞으론 꼭 지켜요. 통금 9시까지 집에 들어올 것."

 

 철수는 계약서에 쓰여진 제이의 사인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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