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는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며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오늘은 제이가 좀 많이 늦는군."
제이는 철수와 홈 셰어 계약서를 쓴 이후로 한 번도 저녁 9시를 넘기고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계약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이는 착실하게 계약 조건을 지켰다.
현재 시각은 벌써 통금시각 9시을 30분이나 넘긴 밤 9시 30분이었지만, 아직도 제이는 펜트하우스에 없었다.
늦은 밤이라서 많이 위험할 텐데, 제이는 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이 집에 있어서 들어오기 싫어서 안 오는 것일까.
아주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가 통금 시각을 어긴 데에는 분명히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곰곰이 제이가 늦을 만한 이유를 생각해 보던 철수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늦는 이유는 자신이 멍청하게도 제이라는 여자의 '존재의 무게감'을 잊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휴우."
철수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집에 있다가는 병에 걸릴 것만 같아서, 철수는 겉옷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ㅡ 앞으로 제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지, 철수 씨는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제이거 했던 말이 철수의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제이는 정말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었다.
멈칫한 철수는 들고 있던 외투를 다시 힘없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야옹."
노랑이가 소파에 앉지 못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철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노랑아,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놈인지."
철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노랑이에게 변명했지만, 노랑이는 냉정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걸 이제 알면 어떡하냐고 타박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전화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를 거는 것도 그녀를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철수는 핸드폰만 붙잡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전화 해볼까, 그런데 또 다시 제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쩌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철수가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겨우 전화를 할까 말까를 이렇게까지 고민하다니.'
철수는 독일에서 불도저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짐승 같은 추진력으로 사업을 할 때든 연애를 할 때든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살면서 그에게는 두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철수는 제이가 화를 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못 걸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지금 철수에게는 제이가 화를 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게 느껴졌다.
'만약 제이가 펜트하우스를 떠난다고 하면 어떡하지? 또 저번처럼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철수는 이 커다란 펜트하우스에서 홀로 남겨질 것이다.
제이가 없는 펜트하우스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철수는 목구멍에 고양이 털이 들어가서 꽉 막힌 듯 숨이 가빠왔다.
"커헉, ……흐억!"
지금 당장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철수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폐가 찢어질 정도로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콜록!"
철수는 지금과 같은 증세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공황 장애로 인한 발작 증세였다.
"으, ……젠장!"
공황 장애 증상의 가장 두려운 점은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오는 데에도 실제로는 절대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지금 이 장소가 안전하고 화려한 펜트하우스로 느껴지지만, 지금 철수에게 이곳은 사방이 빙글빙글 돌고, 대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것 같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공황 장애의 증세가 그러했다.
철수는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약, 약을 먹어야 해……!'
철수는 황급히 서랍을 뒤져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는 공황 장애 약을 찾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약통을 집어 든 철수는 그만 약통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크흑!"
손에서 약통이 멀어지자 더욱더 심한 두려움 그리고 공포와 싸워야 했던 철수는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공포를 헤치고, 철수는 겨우 약통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 약을 입안으로 물 없이 넣고 삼켰다.
“……하아.”
약을 먹고 다니 증상이 조금 가라앉아서, 철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지만, 온몸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무력감에 그는 가만히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철수는 다시 발병한 공황 장애 증세 때문에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증상을 자각하고 제 발로 정신과를 찾아갔던 철수를 보고, 닥터 리는 환자 공황 장애 증세를 자각하고 찾아오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그의 총명함을 칭찬했었다.
사실 공황 장애 증세는 초기에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성실하게 정신 상담을 받으면서, 완벽하게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증상이 발생하자 철수는 힘겹게 달려온 마라톤의 시작점에 다시 선 기분이었다.
'내가 그 일을 잊기 위해서 2년간 했던 노력이 전부 다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허망하고 허무했다.
3년 전 그날의 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전력 질주했던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나 닥터 리는 훌륭한 정신과 의사임이 분명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 않는 이상 철수에게 다시 또 한 번 증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는 한 번 더 발작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자신이 발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누가 자신에게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알려준다면 억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철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분명히 제이와 관련이 있었다.
'제이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철수는 바닥에 몸을 널브러트리고, 간절하게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This time class is over(이번 시간 수업이 끝났습니다)."
수업이 끝나자 제이는 얼른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PM 8:50
지금 쾌속 지하철을 탄다고 하더라도 통금 시각 9시를 넘겨서 도착할 게 분명했다.
철수와 약속한 통금 시각을 지키지 못하리라 생각하자 울적해진 제이는 울상을 지었다.
사실 오늘은 영어 회화 수업이 잇는 날이 아니었지만, 앤디가 다음 주에 휴가를 간다고 해서, 급하게 금요일 저녁에 수업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불금에 보강을 해서 그런지 참석한 인원도 적었고, 윤정과 린다도 오늘 수업에 오지 않았다.
'이렇게 늦게 끝날 줄 알았으면 나도 오지 말걸.'
제이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철수와 가벼운 언쟁을 벌여서, 집안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벌했지만, 그래도 제이는 철수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그이 무례한 행동에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아올랐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재빨리 필기구를 정리하던 제이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만년필을 책상 밑으로 떨어트렸다.
'어? 어, 어…….'
제이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만년필을 잡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갔다.
들고 다니는 소지품 중에 아주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이의 눈에는 만년필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요."
앤디는 그의 발밑으로 떨어진 만년필을 주워서 제이에게 건넸다.
하마터면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릴 뻔했던 제이는 만년필을 가슴으로 가져와 꼭 끌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제이한테 굉장히 소중한 물건인가 봐요."
"네?"
"수업시간에 항상 그 만년필만 쓰길래 제이에게 대단히 소중한 거구나 싶었어요."
"……네."
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빠의 만년필은 제이에게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만년필을 쓰고 있으면 아빠의 영혼이 자신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제이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사실 이건 저희 아빠가 남겨주신 유품이에요."
"아, 그랬군요. ……미안해요."
앤디가 실수를 했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자, 제이는 손을 옆으로 내저었다.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인걸요."
"그렇죠. 다 지난 일이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앤디의 경쾌한 결론에 제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만년필을 필통 안에 넣은 제이는 등에 가방을 메고 건물 밖을 나갔다.
최대한 빨리 지하철역에 달려가면 9시 30분까지는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기 근데……."
"……네?"
"내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제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앤디를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앤디……아니에요?"
"아뇨, 그거 말고 한국 이름 알아요?"
"……아, 아뇨. 잘 몰르겠어요."
수업하는 첫날 앤디는 'Call me, Andy'라는 짧은 인사말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아무래도 한국 이름은 얘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정선호 에요."
……정선호? 어쩐지 앤디와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알겠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제이가 이제 정말로 지하철역을 향해 달리려고 하는데 앤디가 다시 앞을 막았다.
"오늘 친구들은 없네요?"
"네?"
"맨날 같이 듣던 친구들 있잖아요. 왜 머리 탈색하신 분이랑 안경 끼고 계신 분."
"아, 린다랑 윤정이요?"
같이 수업을 들인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앤디는 학생들의 이름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린다랑 윤정이는 오늘 같은 불금에 영어 수업 들을 수 없다면서 클럽 갔어요."
"……아, 그렇구나. 아무래도 금요일 저녁에 수업을 잡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제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이 씨도 지금 클럽에 가는 거예요?"
불쑥 던진 앤디의 말에 제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저는 클럽 같은 데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래요? 그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예요?"
"짐에요. 사실 통금이 있는데 많이 늦어서."
"통금이 있어요?"
앤디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난 정말 통금 있는 여자는 실제로 처음 봤어요."
마치 자신을 문화재 취급하는 듯한 앤디의 시선에 조금 불편해진 제이는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지하철역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앤디가 덥석 제이의 손목을 잡았다.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요.”
"……네?”
갑자기 손목이 붙잡힌 제이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집이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는 거 괜찮죠?"
같은 방향이라서 같이 가는 건데 괜히 안 된다고 펄쩍 뛰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긴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이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앤디와 함께 나란히 길을 걷는 제이는 조금 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저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같이 가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앤디는 계속해서 제이가 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인제 그만 좀 따라왔으면 좋겠는데…….
제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 말이죠……."
지하철역에서부터 앤디는 미국에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계속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앤디의 말을 경청하던 제이도 점점 그가 왜 자신에게 미국에서 사고 쳐서 정학당한 일을 털어놓는 건지 궁금했다.
그냥 잠깐의 방황이었노라고 말하면 그랬군요, 하고 넘어갈 텐데, 앤디는 한국 사람에 대한 험담을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러시는 본인도 한국사람 아니신가요.
앤디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학원에서 선생님들의 사이에 조금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제이도 앤디가 미국과 다른 한국 문화 차이 때문에 인간 관계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안쓰럽게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문화가 다르고 정서가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도 힘들고 다른 나라에서 일한다는 것은 더욱더 힘든 일일 테니까.
향수병(고향을 그리워해서 생기는 병)이 괜히 생기는 병은 아니지 않은가.
제이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매직컨벤션에 참여하러 갔을 때 느꼈던 문화 차이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었다.
이탈리아 매직컨벤션에 참석했을 때 심사위원 중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이 한 분 홀로 서 계신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제이만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었다.
당시 매직컨벤션 참가자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제이만 벌떡 일어나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었다.
딴에는 몸이 불편해 보이시는 어른께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제이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나 혼자만 섬에 고립된 기분이었다.
그랬던 경험이 있어서 재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상대방과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노력하지 않고, 불평과불만을 쏟아내는 앤디의 목소리를 더 들어주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디를 가나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문화 차이로 인해 생긴 갈등을 한국 사람들의 문제로만 여기는 앤디를 보자 마뜩찮았다.
나보다 8살이나 많다고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철이 없을까.
제이는 열심히 떠드는 앤디를 보고 한숨을 조용해 내쉬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 할 일인 것 같았다.
ㅡ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죠.
제이는 철수가 했던 말을 앤디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었다.
철수도 한국과 다른 독일 문화 때문에 많이 힘들고 사업을 하면서 실패도 많이 했지만, 한 번도 독일 사람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문화 차이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니까.
제이는 어서 빨리 앤디의 말을 끊을 타이밍을 엿봤지만, 그는 입에서 리본 끈이 나오는 마술을 하듯이 자꾸 입에서 말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이 씨,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네. 물어보세요.”
제이는 얼른 앤디의 질문에 대답하고,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질문이든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더 하고 싶은 말도 없었고, 미국에 대해서 더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아뇨, 없는데요.”
재빨리 대답하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했는데, 앤디가 갑자기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세게 그러쥐는 앤디의 손때문제 제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제이 씨, 그럼 나랑 사귈래요?”
*
10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제이를 걱정한 철수는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신음을 흘렸다.
밤늦게 귀가하는 그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철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제이와 벌인 언쟁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 수 없어서, 철수는 우연히 편의점 가다가 마주친 척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 근처를 서성였다.
제이가 언제 도착할까, 목을 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철수는 한 남자와 함께 걸어오는 제이를 발견했다.
순간, 철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장 달려가서 그녀의 옆에 친한 척 들려 붙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제이의 경고를 잊지 않은 철수는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둘을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제이가 집으로 들어가려는 데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이 그녀의 팔뚝을 한 손으로 낚아채는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철수는 주머니에 손을 빼고 재빨리 제이에게 달려갔다.
"철수 씨!"
철수를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철수는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작고 마른 남자는 그녀에게 밤중에 메시지를 보냈던 앤디임이 분명했다.
앤디는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철수를 보자 화들짝 놀랐다.
가만히 앤디를 노려보고 있던 철수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이에게 무슨 할 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