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씨, 그럼 나랑 사귈래요?”
앤디의 말에 황당해진 제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꺼풀만 깜박였다.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이는 얼른 그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앤디는 힘을 꽉 주고 느물거리며 웃었다.
앤디의 미소를 보고 제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힘으로 제이를 제압하는 앤디는 뭐가 좋은 건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봤다.
소시오패스 같은 앤디의 모습에 제이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 다급한 위기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제이는 차분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앤디 씨, 저는 앤디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실래요?"
가만히 그녀를 주시하던 앤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힘을 풀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제이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제이는 가늘게 속눈썹을 떨었다.
"난 사실 처음부터 제이 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처음부터요? 언제부터……."
"제이 씨가 처음 학원에 등록하러 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제이는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시선을 땅으로 내리깔았다.
그가 음흉하게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소름 끼쳤다.
몇 번 헛기침을 한 제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들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사람이 많던 거리에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 씨, 나 괜찮지 않아요?"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더욱더 밑으로 숙였다.
사실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영어 회화 수업을 하고, 학생들의 출석 상황도 살뜰하게 챙기는 앤디를 보고, 자신이 하는 일이 굉장히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구나 하고 좋게 봤었다.
하지만 앤디는 보면 볼수록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이쯤이면 앤디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 줬으면 하는데, 그는 아직도 그녀의 침묵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한국에서 영어 학원 강사를 하고 있어서 그랬지, 미국에서는 진짜 대단한 놈이에요."
제이는 다시 한번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게 문제가 아닌 데, 앤디는 본질적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발만 동동 굴리던 제이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파란색 운동복의 남자를 발견했다.
"철수 씨!"
제이의 얼굴에 조명을 비춘 듯이 환해졌다.
이렇게 그가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철수는 제이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챈 것인지 한달음에 그녀의 곁으로 뛰어왔다.
앤디는 자신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덩치가 큰 철수가 나타나자, 기가 눌린 듯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제이에게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아, 아니요. 인제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이 씨, 다음에 봐요."
마음속으로 제이는 영어 회화 학원을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데, 끝까지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하는 앤디를 보고, 그녀는 영혼이 머리 위로 후욱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제이,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앤디에게 잡혔던 그녀의 손목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철수 씨……."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 심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이는 처연한 눈빛으로 철수를 바라봤다.
“철수 씨와 함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
철수는 제이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철수 씨, 정말 감사해요. 철수 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제이는 잘근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철수의 판단대로 곤란한 상황에 겪고 있는 제이에게 다가간 결과, 그녀는 이상한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철수 씨 말이 맞았어요. 정말 저런 사람일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 제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책하지 말아요, 제이. 원래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철수는 놀란 제이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녀의 어깨가 더 가늘어 보였다.
"날이 많이 춥군요."
"아, 네……."
철수는 입고 있던 운동복 겉옷을 제이에게 벗어서 건네주었다.
제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철수가 내민 옷을 받아 어깨 위에 걸쳤다.
"고마워요, 철수 씨."
두 사람은 나란히 집으로 가는 거리를 걸었다.
맨날 걷던 거리인데 어쩐지 철수는 지금 그녀와 함께 하는 이 거리가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다가 그놈이랑 같이 집으로 오게 된 겁니까?"
"그냥 앤디가 같은 방향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전 그래서 정말로 그런 줄만 알았어요."
철수는 고개를 가로로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놈이 거짓말을 한 것 같군요."
"네, 그때는 몰랐는데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철수가 그 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떤 일을 겪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무서운지, 제이는 다시 양손으로 두 팔을 감쌌다.
"그놈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군요?"
"네, 정말로. 첫인상을 믿을 게 못 되나 봐요."
"그렇습니까?"
"네, 사실 저는 철수 씨의 첫인상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그녀의 솔직한 답변에 철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이가 자신을 수상하게 느낄만했다.
머릿속에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가득했던 철수는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는 제이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첫인상을 안 좋게 생각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앤디라는 놈은 이상한 놈이군요."
"네, 정말로 이상해요. 사실 같이 올 때도 말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철수는 힐끗 제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이는 말 많은 남자를 싫어하는군요.'
"아, 아니에요. 저는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가 좋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앤디는 하는 말마다 불평불만 투성이더라고요."
철수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하는 말마다 불평불만인 사람과 10분만 같이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앤디가 학원에서 선생님들과 갈등이 조금 있나 봐요. 그래서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들구나 싶어서, 저도 조금은 이해하려고 했는데……."
"그런데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문화 차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을 전부 욕하고 비난하더라고요."
철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물론 철수도 독일에서 살아서 문화 차이 때문에 겪는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독일 사람들 전체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독일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저번에 철수 씨가 말씀하셨던 데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라는 말을 앤디에게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요?"
"진짜 말을 쉼 없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답답했군요."
"……네."
조금은 울적해 보이는 제이의 표정에 철수가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가 왜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원래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제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개를 돌려 철수와 눈이 마주친 제이는 수줍은 듯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어느새 아파트 통로에 도착하고, 철수는 아쉽지만 제이의 손을 놓았다.
자연스럽게 철수의 시선이 그녀의 연분홍색 입술에 닿았다.
특별히 무언가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제이의 입술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순간 철수는 어쩌면 저번에 제이의 집에서 안타깝게 놓쳤던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두 사람은 함께 좁은 공간으로 올라탔다.
밀폐된 공간에 그녀와 함께 있자 여성스럽고 진한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향수 뿌렸어요?"
"아, 아니요."
"향수 냄새나는 것 같은데……."
"샴푸 냄새인가 봐요. 학원 가기 전에 머리 감고 나왔거든요."
철수는 제이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의 냄새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가 샴푸 냄새를 맡기 위해 조금 더 그녀에게 다가가자 제이는 수줍은 듯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흠."
갑자기 솟아오르는 토기에 철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매스껍고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보니 또 공황 장애 발작 증세가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갖힌 철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흠흠."
철수는 제이에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헛기침을 했다.
분명히 아까 공황 장애 약을 먹었는데. 왜 또 발작 증세가 일어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철수는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철수는 얼른 밖으로 내렸다.
본격적으로 발작이 시작하기 전에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철수는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간 서랍 속에 있던 약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하아."
철수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공황 장애 발작 증세가 애 나타났는지 철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철수는 커다란 한숨과 함께 조용히 혼잣말 했다.
“하아, 정말 미치겠군,”
겨우 진정이 된 철수가 거실로 나오니, 제이가 자신의 운동복 점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철수 씨, 여기요. 운동복 벗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제이가 춥지 않았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리고 철수 씨……."
제이가 조금은 상처받은 듯 한 눈동자로 철수를 바라봤다.
"전 철수 씨가 좋은 사람이라서 저한테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거로 생각해요."
"……."
"저는 이제 철수 씨가 절 좋아한다는 오해 같은 거 절대 안 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제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방 문으로 다가갔다.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제이를 보면서 철수는 지금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피터가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으로 찾은 그가 소속된 블랙 데스 상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어때, '표적'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한 여자와 홈 셰어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피터는 라벨이 붙어있는 병에 담겨있는 포도주를 투명한 유리잔에 길고 가는 실처럼 따랐다.
달콤하고 진한 포도주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피터는 코를 가까이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찌 보면 '표적' 덕분에 우리 블랙 데스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거였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피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잔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렇습니까? 저는 '표적'이 우리 블랙 데스의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을 처음 듣습니다만.」
-「크흑. 그래, 맞아. 어떻게 보면 우리 블랙 데스에 창립 멤버라고도 볼 수 있겠지.」
초기에 블랙 데스는 인터넷 사이트를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인종차별 단체였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점점 세력을 불린 블랙 데스의 구성원들은 유럽과 미국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나치스(독일 내 인종차별을 조장했던 단체)를 신봉하고 인종차별을 당당하게 슬로건으로 내걸고 활동했다.
피터의 슈트 겉주머니에는 블랙 데스의 다이아몬드 표식이 그려져 있는 노란색 행커 치프가 꽂혀 있었다.
암암리에 온라인상에서만 활동하던 그들은 오프라인으로 나와서 거리에서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인종차별 단체를 후원하면서 그들의 세를 늘려나갔다.
「'표적'이 어쩌다가 우리 블랙 데스의 일등공신이 된 겁니까?」
그리고 피터 블링켄베르는 미국 CIA에게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는 인종차별 단체 '블랙 데스'의 실질적인 이인자였다.
-「아, 그러고 보니 피터는 3년 전에 있었던 사실을 모르겠구먼.」
「네, 제가 블랙 데스에 들어온 지는 아직 1년도 넘지 않았으니까요.」
피터는 생긋 웃으면서 포도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히틀러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봉했던 히틀러 키즈(Kids)였다.
평범하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부모님 아래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던 피터가 히틀러에 심취하게 된 것은 나치스의 선전영화인 '의지의 승리'를 보고 나서였다.
상공을 헤치고 구름 사이로 빠져나오는 비행기와 히틀러의 연설을 보면서 감탄해 마지않는 사람들의 표정들.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하는 히틀러의 카리스마.
피터의 푸른 눈동자에는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이 깊게 새겨졌고,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인종차별 사상 또한 그의 뇌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우리 '블랙 데스'가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던 이유는 '표적'과 그의 약혼녀를 납치한 대가로 받은 300만 유로 덕분이지.」
「오, 그렇습니까? 몰랐군요.」
피터는 새로 들은 흥미로운 사실에 유리알 같은 파란색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그래, 당시 자네는 미국에 있어서 몰랐나 보군,」
「네, 부모님이 독일로 오셔서 저도 독일로 오긴 했지만, 주로 활동하는 곳은 미국이니까요.」
-「그 당시 '표적'에게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여자가 있었어.」
「그렇군요.」
피터는 안쪽 주머니에 있는 펜과 수첩을 꺼내서 '표적'에 대한 정보를 적어 내려갔다.
'표적'에게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해선 '표적'에 대한 작은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귀중했다.
-「그래, 당시 여행을 떠나려는 그들의 자동차 앞에 우리가 나타나서 그들을 납치했지.」
「와우! 멋있네요!」
피터는 흥미롭다는 듯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히틀러를 신봉하는 피터의 머릿속에는 약자에 대한 혐오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악한 것보다 약한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피터는 약자를 위해서 변호해주는 인권 변호사 따위가 아니라, 나라에서 탈세, 사기, 주가 조작 등 각종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경제사범을 변호해주기 위해서 경제 범죄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돈이 별로 안 되는 인권 변호사보다 경제 범죄 전문 변호사가 훨씬 수임료도 많이 받았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그리스에 자기 소유의 커다란 별장이 몇 채 있는 부동산 재벌이기도 했다.
-「그때 사실 우리 '블랙 데스'의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되었었지. 유럽 전역의 미디어에서 우리가 '표적'과 그의 약혼녀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떠들어 댔으니까.」
「이런! 정말 아쉽군요. 우리 '블랙 데스'의 이름이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제 눈으로 봤어야 하는 건데.」
피터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경제 범죄 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블랙 데스'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히틀러를 신봉하고 인종 중에서 가장 우월한 인종이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블랙 데스'는 피터에게는 꿈에 그리던 파라다이스였다.
「그럼 그때 몸값으로 받은 300만 유로로 우리 '블랙 데스'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더군요. 보스.」
-「그렇지. 바로 그거야.」
피터는 '블랙 데스'의 수장 격인 L을 '보스'라고 부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친히 '표적'을 따라 한국으로 오긴 했지만, 피터는 L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네 명의로 된 스위스 계좌에 5만 유로를 넣어놨네. '표적'을 노리는 데 필요한 경비에 쓰도록 해.」
-「네, 보스. 감사합니다.」
그들은 그저 인종차별이라는 사상 아래에 함께하는 동지일 뿐이지 인간적인 유대감은 전혀 없었다.
-「어때? 피터가 보기엔 '표적'은 어떤 사람인 것 같은가?」
「글쎄요, 동양인 치고는 생각보다 똑똑하더군요.」
피터는 와인을 마시면서 '표적'의 사진을 들고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3년 전에 우리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도 우리와 몸값을 협살하려고 했던 놈이니까 보통 놈은 아니지.」
「그런가요? 하긴 '표적'이 성격이라면 그럴 만하지요.」
-「아주 지독한 놈이야.」
'표적'은 3년 전에 '블랙 데스'에 의해 납치를 당하고 나서 300만 유로를 내고 겨우 풀려난 후, 다시 기업가로 복귀해서 '인종차별 반대 단체'를 후원하고 지지했다.
피터가 그와 만나게 된 곳도 '인종차별 반대 단체'의 자선 행사에서였다.
「인종차별 반대 단체라니. 우리 '블랙 데스'와 대척점에 있는 단체군요.」
-「그래, 독일에서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끈질긴 놈이었으면 차라리 그때 풀어주지 말고 확실히 죽여버릴 걸.」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뜬 피터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표적'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보스. 비로 '표적'이 우리의 사상과 단체를 몰락시키려는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지만 일단 '표적'은 아직 쓸만한 인간이니까요.」
피터는 조용히 '표적'의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납치 사건의 피해자였으면서도 '표적'은 아무런 후유증을 않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멀쩡한 모습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끈질기고 지독한 사내였다.
하지만 피터는 '표적'이 살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더 짓밟아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일단 '표적'에 대해서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한국에 있으면서 '표적'의 변화를 잘 감시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럼 난 피터만 믿고 있겠네.」
「그럼 일이 진전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피터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표적'의 사진을 고이 접어 자신의 슈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