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는 자주가는 단골 수입잡화점에서 산 영국식 홍차를 꺼냈다.
마음이 쓸쓸할 때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자주 찾는 잡화점은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홀로 운영하시는 직수입잡화점인데, 가보면 신기한 물건도 많았고 진기한 물건도 싼값이 살 수 있었다.
가게 안에서 우연히 영국식 홍차를 발견한 제이는 누가 먼저 집어갈세라 얼른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철수 씨는 하루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
그녀가 관찰해본 결과 철수는 매일 하루에 커피 5잔 이상을 마셨다.
밥보다도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철수를 보면서 제이는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카페인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안 좋은데.
제이는 식사를 하고 나서 항상 철수를 위해 커피를 준비했는데, 오늘은 특별히 그의 건강에 도움 되는 영국식 홍차를 우려낼 생각이었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조심스럽게 티백을 꺼낸 제이는 미리 끓여둔 따뜻한 물에 티백을 담갔다.
맑았던 물이 주황색 빛깔이 도는 홍차로 변하는 것을 보고 제이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오래 넣어두면 많이 쓰니까…….'
제이는 주황빛의 색이 더 진해지기 전에 얼른 티백을 뺐다.
"철수 씨, 나와서 차 한 잔 드세요."
철수가 밖으로 나오자 제이는 예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물과 함께 홍차를 내어갔다.
"여기요. 영국식 홍차에요."
늘 먹던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홍차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조금 놀란 듯했다.
"커피에는 카페인 성분이 있어서 너무 많이 드시면 건강에 안 좋대요. 홍차에도 카페인이 있긴 하지만 커피보단 조금 들어있으니까 홍차 한 번 드셔 보시는 게 어때요?"
잠시 망설이던 철수를 홍차가 담긴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제이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자, 가만히 홍차의 향을 맡던 철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향이 참 좋군요."
철수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제이는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요?"
"네, 사실 홍차는 처음 먹어보는 건데…… 맛있습니다. 어디서 사 온 거예요?"
"제가 아는 수입잡화점에서 사 온 거예요. 고등학교 때 우연히 공원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죠."
"그래요? 가게 이름이 뭔데요?"
"……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제이가 살짝 혀를 내밀며 말하자, 철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말해주지 않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니에요. 정말로 간판이 없는 가게거든요."
철수는 제이의 이야기가 흥미가 생긴 듯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떻게 하다가 그 가게를 알게 된 거였습니까?"
"음, 그러니까……."
아주 길고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제이는 앞에 있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날은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 날이었어요."
"……."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시험이었는 데, 가채점해보니까 생각보다 성적이 안 나왔어요. ……아니, 사실 완전히 망했죠."
그때의 비참했던 기분이 떠오른 제이는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홍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아빠는 항상 마술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밤을 새워가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괜찮아요. 제이. 힘들면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주는 철수에게 고마워서 그녀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네요. 이미 지난 일인 걸요."
아직 다 못한 이야기를 철수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제이는 조심스럽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우연히 공원 근처에서 간판이 없는 가게를 발견했어요."
"꼭 운명 같군요."
"네, 맞아요. 운명처럼 발견했죠. 궁금했어요. 대체 저 가게는 뭘 파는 가게일까.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정말로 신기하고 진기한 물건들이 많은 거예요."
"지금 제이가 가져온 영국식 홍차 같은 것들이요?"
"네, 맞아요. 이것도 선반에 있는 걸 제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유리잔을 들어 홍차를 마시고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가게인 것 같아요. 벌써 10년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서 장사하고 계세요."
"……."
"저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장소예요. 학창 시절 추억이 어려있는 곳이죠."
"나도 꼭 한번 가고 싶군요."
"……네?"
"제이의 추억이 어린 장소에 나도 한번 가보고 싶어요. ……괜찮습니까?"
조심스럽게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철수를 보고 제이는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죠. 언제든지 괜찮아요."
환한 미소를 짓는 철수를 보고 제이의 입꼬리도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철수와 함께 하는 이 기분은 정말 따뜻하고 좋은 기분이었다.
철수는 처음 봤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더 밝아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아주 미세한 것이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더 확연하게 드러나서, 이제 철수는 햇살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철수와 차를 나눠마시면서 대화를 하던 제이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 또한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좋게 변화했다.
"제이."
"네?"
"나도 제이에게 할 말이 있어요."
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 마신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음, 그러니까……."
철수는 제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면서,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스러웠던 제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건강에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철수는 혀로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철수가 자신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데, 차마 미안해서 입술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어서 말해 보세요."
제이는 괜찮다는 듯이 밝게 미소를 지었지만, 철수는 오히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제이."
"……네?"
철수가 뜸을 들이자 덩달아 긴장한 제이가 허리를 바로세웠다.
"이제 우리가 같이 선생님을 죽인 범인을 찾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철수는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사실 그가 한국으로 온 목적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한국에 온 본래의 목적을 잊고 있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철수는 아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혀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철수는 제이가 이를 어떻게 받아드릴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직 수조에 빠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저기, 그러니까 제이……."
"……네, 좋아요."
흔쾌히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철수는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는 그녀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을 꿋꿋하게 받아드리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사실 저도 아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
"숨겨진 비밀이 무엇일지 두렵고 떨리지만, 철수 씨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이는 고개를 들어 철수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살포시 짓는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밝은 빛 그 자체라서, 철수는 멍하니 정신을 놓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가식 없이 진심 어린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 철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감동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정말 괜찮습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제이가 활짝 웃는 것을 보고 철수도 안심한 듯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었다.
약하게만 보였던 그녀가 사실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철수는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
제이는 접수처에 있는 직원에게 회원증을 내밀었다.
"저기 죄송한데 영어 회화 수업 신청한 거 취소하려고요."
"취소요?"
안경을 쓰고 있는 직원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제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이유가 있으신가요?"
집 앞에서 앤디와 언짢은 일이 있고 난 뒤, 이제 영어 회화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제이는 결국 영어 학원에 다니지 않기로 했다.
윤정과 린다와 함께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게 많이 안타까웠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영어 학원 직원이 조심스럽게 묻자, 잠시 망설이던 제이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앤디가 했던 불쾌한 행동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그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 많이 바빠져서 더 학원 다닐 시간이 없어졌어요. 죄송합니다."
영어 회화 수업의 나머지 일수에 맞춰서 금액을 환급받은 제이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저기요. 제이 씨."
"제이 씨!"
"……?"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보니 한 손에 영어 교재를 들고 있는 앤디가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앤디와 정면으로 마주친 제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제이 씨, 혹시 학원 그만두는 거예요?"
"네? ……네."
"혹시 나 때문인 겁니까?"
제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앤디 때문에 그만두는 게 맞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안 좋아지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제이 씨, 분명히 나한테는 남자 친구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기어코 앤디는 저번에 있었던 사건을 밖으로 꺼내려는 것 같아서 제이는 살포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그리 좋은 일이라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걸까.
"남자친구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제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을 굳이 꺼내는 앤디에게 질린 제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잠깐만요, 제이 씨."
지긋지긋하게 따라오는 앤디를 보고 제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
"그 사랑이랑 제이 씨는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앤디의 말에 제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철수 씨랑 나 사이가 무슨 관계지?'
그와 그녀 사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제이는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홈 셰어를 하는 사이였지만, 요즘 들어 철수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집에서 같이 사는 사람에게 드는 감정이 아니었다.
"……글쎄요. 그건 앤디 씨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고 바로 돌아서긴 했지만, 앤디의 질문을 듣고 머릿 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과연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어떤 사이인가.
처음에는 분명히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점점 자신이 그에게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ㅡ 철수 씨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했던 말은 제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었던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뜨거운 동료애라고 말하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제이는 정말로 철수와 함께 라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도 거뜬히 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 없었더라면 절대 혼자 하지 못 했을 일도 손쉽게 할 수 있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앤디에게 아까처럼 단호하게 대처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철수 씨랑 내가 무슨 사이일까?'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앤디의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발끝만 바라보며 걷다가 사람들의 인파 속에 파묻혔던 제이는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단정하게 뒤로 올린 머리에 질 좋은 슈트로 온몸을 감싼 채 빠르지만 고상한 걸음으로 걷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철수 씨!"
그는 바로 철수였다.
철수를 발견한 제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철수 씨, 여기 무슨 일이에요?"
"난 잠깐 회의 마치고 점심 먹으러 나왔습니다. 제이 씨 점심 먹었습니까?"
"아니요, 아직요."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제이의 눈에는 철수가 아주 정확하게 들어왔다.
"그럼 우리 같이 점심 먹을래요? 내가 사주겠습니다."
"네."
제이는 철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앤디가 자신에게 했던 질물을 까맣게 잃어버렸다.
철수와 자신 사이를 어떤 사이냐고 굳이 정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와 제이의 사이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 사이였다.
***
연습실에 들어선 제이는 사람들을 향해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에요."
일주일 만에 연습실을 찾은 제이는 몸에서 활기찬 기운이 뿝어져 나오는 듯 했다.
단원 사람들이 회의실에 모두 모여있는 것을 보고 민망해진 제이는 얼른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제가 늦은 거 아니에요."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10분이 남아있었다.
오늘도 마술 공연을 찾아주실 관객분들을 위란 회의를 할 생각에 제이는 신바람이 절로 났다.
그런데 왠지 회의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제이는 슬쩍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항상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저기…… 제이야."
어색했던 분위기는 지우의 목소리에 의해서 깨졌다.
"네? 지우 언니.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제이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우가 주변 사람들과 슬쩍 눈을 마주쳤다.
"그게 사실은……."
"제이야, 우리 월급 좀 올려줬으면 좋겠어."
"……네?"
옆에 있던 기범이 답답했는지 지우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무대에 서는 거 말고도 여기 와서 회의하는 것도 수당을 좀 줬으면 좋겠어. 보통 모이면 세 네 시간씩 회의하는 데 열정페이는 너무 하잖아."
시윤이 덧붙여서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마술 단원들끼리 이미 입을 다 맞춘 것 같았다.
"저기, 갑자기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해요. 제이 씨. 그런데 나도 아이가 두 명이 있는 가장이라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회의실에 앉아있는 건 조금 무리예요."
"……그랬군요."
종환의 말에 제이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종환의 사정을 이해해주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러고 보니 철수가 자신에게 종환 아저씨가 아이가 두 명이 있어서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관객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회의를 하는 게 저는 너무 즐겁고 행복했는데, 제가 여러분의 사정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그녀의 음성에 집중했다.
"……하지만 저도 갑자기 여러분의 월급을 올려드릴 순 없어요."
"제이야, 근데 너 CF 찍지 않았어?"
"네……네?"
지우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면서 계속 입을 열었다.
"CF 한 편당 버는 돈이 얼만데, 그걸로 우리 월급 좀 대신 주면 안 돼?"
"……아."
당황한 제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맞아. 그걸로 주면 되겠네. 지우 누나 짱이다. 어떻게 그런 좋은 생각을 했어."
"몰랐어? 내가 원래 아이디어 뱅크잖아."
지우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푸하하, 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모두가 웃는 와중에 제이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ㅡ 당분간 마술 단원 사람들이랑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ㅡ 마술 단원분들이랑요?
철수가 그런 말을 하는 대에는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제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ㅡ 철수 씨,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주시겠어요?
ㅡ ……물론 나도 마술 단원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ㅡ 소품실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나, 제이의 대기실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술 단원들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ㅡ …….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었던 제이는 울적한 표정으로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ㅡ 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알죠?
철수가 그녀를 따뜻한 눈동자로 바라보자 제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ㅡ 네, 알아요. 어쩌면 마술 단원 중에서 제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철수는 대답 대신 한숨으로 대답했다.
'철수 씨 말대로 마술 단원들과 거리를 좀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제이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마술 단원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는 단원분들이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
마술 단원들은 서로 손을 마주치며 즐겁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하지만 회의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꼭 하나씩은 생각하셔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당은 챙겨드리지 않겠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단장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이를 보고 단원들은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뜻을 오해하지 않고 받아드려 주셔서 감사해요."
제이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