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불시착
간사이 공항에서 난바 역까지는 정확히 41분이 걸린다. 유정의 손에 쥔 열차 탑승권에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아마 명시된 내용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정은 묵직한 캐리어를 질질 끈 채 동그란 창이 보이는 파란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난바 역에서부터 유정은 다시 JR선을 타고 교바시역으로 가야 했다. 편지에 써진 주소는 꽤나 복잡한 경로를 나타내고 있었다. 모든 게 성가시다고 생각한 유정은 머릿속에 작은 지도를 그리다 결국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먹었다. 유정에겐 경비라는 개념이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소우마 미나토. 유정은 한 가지 이름만 곱씹으며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켰다. 편지를 확인한 이후부터 유정은 발신자의 자취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일본에 오기 전날까지 유정은 그동안 받았던 메일과 우편들, 편지, 그리고 글에 남겨진 댓글들의 이름까지 낱낱이 확인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소우마 미나토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직접 초대할 정도로 열렬할 팬이라면 과거에 조금이나마 흔적을 남길 법도 했다. 물론 가명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대뜸 보내온 편지에만 본명을 밝히는 것 또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본래 상대에 대한 애정이 담긴 편지를 쓸 땐,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한 가지 이름만을 밝히는 게 일반적인 심리니까.
턱을 괸 채로 마우스를 톡톡 두드리던 유정은 단번에 답을 두 개로 좁혔다. 소우마 미나토라는 사람은 유정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그 편지는 팬 레터를 가장한 다른 목적이 담긴 편지거나.
이유가 무엇이었건 유정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루해져만 가던 자신의 일상에 소우마 미나토의 편지는 유정의 신경을 건드리며 흥미를 자극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동그란 창 사이로 낯선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작은 원은 유정이 여태껏 보았던 것과는 다른 것들을 담고 있었다. 묘한 호기심이 일자 유정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정은 공항 자판기에서 뽑았던 복숭아 맛 생수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한발 더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선을 거둔 유정은 턱을 괸 손을 푼 채 키보드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마침내 잠시 후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읽던 책을 덮고,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가방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간식을 먹은 봉지를 바스락댔고, 누군가는 몸을 비틀며 길게 하품을 했다. 유정은 그 소란함이 싫었다.
질색을 하며 눈썹을 구긴 유정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부러 요란하게 내는 소리는 흡사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 같기도 했다. 조금의 망설임 끝에 유정은 엔터키를 눌렀다. 유정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단 넉 자를 남겼다.
'REST'라는 간결한 단어를, 어떠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
커다란 집의 대문 앞에 선 유정은 자신의 몸이 어느새 녹초가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열차에서 내린 후 자그마한 손으로 캐리어를 질질 끈 채 역을 벗어나던 유정은 퇴근 시간도 아닌데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을 지나쳐야 했다.
유정이 제일 싫어하는 복잡함 속에서, 유정은 쉽게 피로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다문 채 걷기만 하는데도 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잔뜩 이골이 난 채로 출구를 나선 유정은 재빨리 노란 등을 키고 있는 검은 택시를 잡았다.
유정은 그 이후의 일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편지에 쓰인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 이후로 유정은 조금 졸았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의식한 것과는 달리 유정은 꽤나 오랜 시간 잠에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유정이 일어났을 즘엔 밖은 더 어두워져있었고, 어느덧 도착지에 다다른 채였으니까.
유정은 한 손에 편지를 든 채로 고개를 번갈아가면서 돌담 위에 있는 나무 문패와 주소를 대조해보았다. 주소는 일치했다. 유정은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다른 외관에 잠시 고개를 들고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연립주택과 같은 평범한 가정집일 거라 생각했던 유정의 예상과는 달리, 유정의 눈앞엔 꽤나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단단하고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은 일본 전통 가옥의 모습이었다. 3층 정도 되는 높이의 집은 입이 넓은 지붕이 덮고 있었고, 안에선 미묘한 주황색 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정은 천천히 팔을 뻗어 초인종 버튼 위에 손가락을 두었다. 호기롭게 이곳까지 왔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미색 나무판에 일본어로 꽤나 긴 문장이 쓰여 있었다. 유정은 그 속에서 간신히 ‘한국(韓国)’이라는 친숙한 글자만 읽어낼 수 있을 뿐이었다.
유정은 손가락을 두어 번 눌렀다 뗐다. 한국과는 다르게 작고 낮은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현관 문을 열고 유정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침을 삼킨 유정은 ‘실례합니다’라는 일본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다레 데스…”
벌컥 큰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절로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유정은 문고리를 쥔 채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생활 기모노를 입은 채 멀뚱멀뚱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유정은 대략적으로 그녀의 나이를 가늠해보려 했다.
십 대, 혹은 갓 스물이나 됐을까. 확실히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인상에서 유정은 묘하게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한층 편해진 얼굴로 입을 떼려는데 여자가 먼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한국 사람?”
“…네?”
당연히 일본어를 할 거라 생각했던 유정의 예상과는 달리 여자는 너무나 능숙하게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맞잖아요.”
“…….”
“나 이제 척하면 척인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유정을 보고 있는 여자는 양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맑아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유정은 여자가 혹시 한국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려 했다.
“한국인들 전용 하숙집에 이 늦은 시간에 혼자 온 거면 말 다 한 거지.”
“…….”
“예약을 안 한 거죠?”
“…….”
“아 물론 나는 일본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엄마랑 같이 여기를 운영해 와서 한국말을 엄청 잘해요.”
경계의 태도를 풀지 않은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여자를 보고 있던 유정은 악의 하나 없어 보이는 여자의 말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며 되물었다.
“한국 사람은 맞는데.”
“맞는데?”
“누구를 좀 찾으러 왔어요.”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에게 유정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우마 미나토라는 사람인데. 여기 있어요?”
유정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순진해 보이기만 하는 여자의 눈이 일순간 가늘어지더니 곧 아까보다 목소리 톤을 확연히 낮춘 채로 되물었다. 날이 선 투였다.
“그 사람이 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도 못하는 관계면서 무슨 연유로 그 사람을 찾죠?”
“…….”
“그렇게 수상한 사람한테 제가 제 손님의 정보를 밝힐 이유는?”
태세를 전환하며 냉정을 표정을 지어 보인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문에 삐딱하게 기대며 유정을 응시했다. 유정은 자신이 여자를 경계했던 만큼 이 여자 또한 지금의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고 짐작했다. 유정은 여자의 의심을 풀어야 한다는 계산을 끝마쳤다.
“초대장이 하나 왔거든요.”
“…초대장?”
“절 꼭 좀 만나고 싶다는데…저도 그 사람에 대해 아직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유정은 금방 풀이 꺾인 채로 손에 든 편지를 건넸다. 물론 유정이 받은 편지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자극적인 표현은 가신 채로 정말 지극히 평범한 팬 레터로 보이는, 유정이 사전에 미리 새로 조작한 편지였다. 시호라는 자신의
필명은 완전히 뺀 채로.
“보아하니…직업이 글을 쓰는 쪽인가 봐요?”
“영화나 방송을 평론하는 글을 쓰고 있어요. 보다시피 꽤나 인기가 있구요.”
“그런가 봐요. 일본에서도 팬이 있을 만큼.”
“그러게요. 저도 편지를 받고 정말 많이 놀랐는데….”
부러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유정은 부끄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얼굴이 붉어졌으면 더 완벽했을 거란 생각이 미쳤지만, 유정은 여자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고 판단했다. 밖은 어두웠고, 더군다나 유정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제 첫 해외 팬이나 다름없어서요. 꼭 한번 만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유정은 글을 쓰면서도, 또 다른 글을 썼다. MKK라는 언론사에 취직해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드라마나 예능의 리뷰와 평론을 썼고, 간혹 유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평하기도 했다. 물론 그곳에서 쓰는 이름은 최유정이란 본명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지금 저희 집에 묵고 있지 않아요.”
유정의 연기에 깜빡 속았는지 경계 태세를 푼 여자가 아까와 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정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괜스레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난처하다는 입장인 것을 강조했다. 유정의 불안한 시선에 여자는 마음이 쓰이는지 이내 안타깝다는 얼굴로 유정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도 어렵게 일본까지 왔는데 조금 묵다 가요. 뭐, 이왕 온 김에 여행으로 생각하면 되죠.”
“…….”
“아, 물론 돈이 있다면 말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충분히 있어요.”
눈을 번뜩이며 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여자를 보며 유정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려 애썼다. 웃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거짓으로 지어 보이는 미소 따위는 유정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정은 애초부터 오사카에 온다고 바로 소우마 미나토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을 보자마자 유정이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 것은 발신인으로부터 평범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재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정말 유정을 만나길 고대하는 팬이 보낸 거라면, 적어도 공항까지 유정을 마중 나오는 성의를 보였을 테니까.
유정이 궁금한 건 그저 소우마 미나토의 의도였다. 유정을 이곳까지 끌어와 얻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국엔…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지만 어쩌면 이 소우마 미나토라는 사람은 예전에 우리 집에 묵었던 손님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예전에…요?”
“제가 이곳을 운영하기 시작한 건 7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그전엔 엄마가 줄곧 운영해오셨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정은 여자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았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유정은 여자가 이어서 말을 하길 기다렸다.
“엄마가 그동안 방문했던 손님들을 기록한 책이 저한테 있어요. 한 번 찾아보도록 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유정은 밝게 웃음을 지으며 깊숙이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고개를 숙이자 웃음기가 절로 가셨다. 겸손해 보이는 유정의 태도에 별일 아니며 손사래를 친 여자는 현관문을 바짝 연 채로 유정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가 앞장을 서며 뒤를 돌자마자 유정은 느린 걸음으로 여자를 따라가며 주위를 살폈다. 현관을 지나치자 커다란 마당이 나왔다. 잘 손질된 잔디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마당엔 작은 방만 한 호수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엔, 어떠한 생명체도 살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요?”
“네. 제 이름은 히카예요. 어머니가 한국 이름으로는 수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던 유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저를 따라오는 유정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뒤를 돌아본 여자는 의문이 가득하단 얼굴로 유정을 바라보았다.
“최유정이라고 해요. 일본 이름은….”
유정은 찬찬히 입을 뗐다. 자신의 본명보다도 더 익숙한….
“당연히 없어요.”
시호라는, 필명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