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아인이 결국엔 흘러나오는 탄성을 막지 못하고 뱉어냈다.
나무는 빛을 뿜어내며 뒤틀어지더니 이내 그 모습을 완전히 변형시켰다.
나무였던 것을 알지만 나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튼튼해 보이는 수레로 변한 것이다.
미로는 수레에 손을 올리고는 나지막이 고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 아래 그 어떠한 생물도, 이 세대 네이핀의 허락 없이 침입할 수 없으며. 겉과 속이 다른 이 뒤틀린 공간에, 소중한 존재를 보호하고자 하니 네이핀의 힘으로 지켜질 것이다."
허공에 뿌려진 미로의 목소리는 수레 주변에 이는 작은 바람에 흩어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미로가 한발자국 수레에서 물러서자, 구름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던 머리칼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뒤돌아 수레를 등진 미로가 아인과 렌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왕 사람도 늘어났으니..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한 셈 치지 뭐."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녀는 수레를 끌고 아인과 렌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의 손에 불태워진 정든 수레는 미로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이제는 이 새 수레가 마녀만물상이 되어 새 보금자리가 되겠지.
"우와.."
입을 떡 벌리는 아인을 보며 미로가 싱긋 미소 지었다.
주변을 빙 돌며 새 수레를 살피는 아인.
"자, 새 집에 들어가 볼까?"
이전의 마녀만물상이 아주 낡은 오두막을 수레에 올려놓은, 허름한 느낌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좀 더 번듯한 나무로 만든 마차 같은 느낌이었다.
깔끔한 밝은 나무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저번과도 같이 겉에서 보았을 때의 크기와 전혀 다른 크기의 내부가 보였다. 저번 수레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이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위층은 방문 하나가 전부였고, 아래에는 아담한 부엌, 방 두개와 거실이 있었다.
만물상 안은 정말 나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밝은 색 나무벽에 연한 나뭇잎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폭신해 보이는 녹색 소파와 벽 곳곳에 피어난 초록색 새싹이 어우러졌다.
게다가 방무에는 각각 이름이 쓰여 있는 문패가 달려있어 어쩐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새 집을 구경하는 두사람.
렌은 다시한번, 마녀의 힘을 실감했다. 아니, 네이핀의 힘을 실감했다고 해야 할까..
멍하니 서서 안을 둘러보는 두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로는 렌의 이름이 쓰여진 방으로 그의 등을 떠밀어 침대에 눕혔다.
"환자는 누워있어."
침대에 누워 방안을 둘러본 렌이 저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렇게나 마음이 놓이는 공간이.. 존재하다니.
"움직이는 바람에 상처가 좀 벌어졌네. 잠깐 기다려, 내가 금방-"
상처를 살피던 미로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러더니 잠깐의 정적 끝에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
의아한 아인이 묻자, 미로는 급격히 피로가 몰려 오는지 퀭한 얼굴로 답했다.
"그린 할아버지한테 받은 약초라.."
그제야 아인은 키리가 던져 불이 붙었던 주머니를 맨손으로 집어 들었던 미로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 타버린 그것을 향초와 함께 그에게 흩뿌리고 온 것도.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미로가 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 수 없지. 좀 돌아가겠지만 티폰산맥으로 가기 전에 헤르바 지역을 들러가자. 그전까지는 미안하지만 일단 참아."
"난 괜찮아. 그것보다 미로도 손이랑 팔에.."
저는 더한 상처를 온몸에 달고 있으면서 미로가 손과 팔에 화상을 입은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걱정스런 얼굴을 하는 렌이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좁히던 미로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에스타스를 벗어나면 느긋하게 렌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아픈 사람을 붙잡고 들을 만큼 급한 건 아니었기에 미로는 잠시 궁금증을 넣어두기로 했다.
"신경 쓰지 말고 환자는 꼼짝 말고 누워있어. 최대한 서둘러볼 테니까."
***
딸랑.
문을 여는 종소리가 울려, 홀에 나온 리사는 문을 열고 들어온 의외의 인물을 보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게 누구야? 여긴 어쩐 일로 오셨을까?"
그는 홀을 쭉 훑어보더니 리사를 바라보았다.
"미로님은 어디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픽 웃은 리사가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또 버림 받았구나? 미로는 여기 없어."
"미로?"
미로라는 이름에 리사의 뒤를 따라 나온 에밀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후드를 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눈빛에 어쩐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미로라면.."
눈을 데굴데굴 굴려 보란듯이 주변을 한번 살핀 리사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들이 점령했다는 티폰산맥으로 간다고 했어. 에스타스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면 말이지만."
리사는 부러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미로가 무사히 에스타스를 빠져나간 사실은 이미 확인했는데도 말이다.
뭐, 말이 무사히 빠져나간 거지 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리사를 의아한 듯 에밀리가 올려다보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마물..? 아니, 무사히 빠져나갔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당혹스러워 하는 그가 되묻자, 리사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 잘난 노블 중에 한명이 잡으려고 했거든. 타마린드 가."
"그래서? 무사히 빠져나가신 건가?"
눈에 불을 켜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리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돌아온 그녀의 반응에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에스타스의 정보통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뺐을 법한 매서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리사에겐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발끈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계속 놀리게 된 다랄까..
"듣기로는.. 수레가 불에 타서 혈혈단신으로 도망쳤다는데.. 모르지. 노블 놈이 추적을 보냈다면.. 수레 없이는 그리 오래 못 버티지 않을까?"
리사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문 그는 말없이 단숨에 돌아섰다.
쾅! 하고 거세게 문을 닫고 그가 사라지자 리사는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그 대단한 남자가 저렇게 입술을 깨물고 불안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리사가 놀리는 거라는 걸 알 텐데도 그는 늘 미로의 일이라면 여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작은 것들을 놓쳤다. 덕분에 리사에게 놀림 받는 것이기도 하다.
수레가 불에 탄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냥 도망치지는 않아서 추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노블이어도 사람이니 그런 광경을 보고 난 후라면 두려울 만도 할 터.
자신이 부리던 수족이 그 꼴이 되어서 발견되었으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겠지.
정말로 미로가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했다면 리사가 이런 곳에서 한가히 펜션 운영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그는 그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
미로의 일이라면 조금의 여유도 없는 그이기에.
"리사.."
키득거리는 리사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에밀리가 조심스레 소매를 당겼다.
"정말.. 미로.."
불안한 눈빛의 에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무사히 빠져나간 거 확인했어. 걱정하지 마."
"응."
그제야 안심하며 미소 짓는 에밀리.
에밀리의 미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
렌을 쉬게 하고는 미로가 밖으로 나와 수레를 끌자 금세 만물상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인이 다가와 함께 수레를 밀었다. 전보다 크기도 더 크니 무겁기도 할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아인을 보며 픽 웃던 미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아인."
"응?"
"키 컸어?"
"아아. 응."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인을 보며 미로가 괜스레 자신의 키와 아인의 키를 손을 펴 비교했다.
분명 자신보다 한참 작은 꼬마였는데.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금방 자라네."
뭔가 아쉽다는 듯 말하자, 아인이 미로를 힐끔 바라보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금방 미로보다도 더 클 걸."
"에잇. 안 컸으면 좋겠다."
"그건 안되지!"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 내미는 미로와 눈썹을 치켜 뜬 아인이 열심히 수레를 밀었다.
***
로단테 왕국. 왕궁 내에 지어진 네 정령을 모신 신전.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의 하늘빛을 담은 긴 드레스가 바닥에 끌렸다.
그 위로 길게 늘어트린 굴곡진 노란색에 가까운 옅은 갈색 머리칼.
호숫가에 라도 서있었다면 물의 요정이라 불릴 만한 미모였다.
그녀를 발견한 신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예를 갖췄다.
가볍게 신관에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뎌 신전 중앙에 자리한 기둥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람 셋이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 굵은 기둥은 제각각 다른 색을 은은하게 띄우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잠들어 있던 기둥엔 파도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깊은 심해의 색이 기둥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은 하늘의 색과 바람의 문양이, 불의 정령은 불길 문양과 활활 타오르는 듯한 정열의 붉은 색이 감싸고 있는 기둥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땅의 정령. 흙색과 땅에서 자라난 새싹들이 새겨진 비어 있는 기둥.
그리로 다가간 그녀는 건들면 깨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기둥을 쓰다듬었다.
바닥부터 진한 흙색이 기둥을 타고 올라오면서 점점 흐려진다. 군데군데 새겨진 녹색 새싹과 함께.
한참이나 기둥을 쓰다듬는 그녀에게 신관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확인하시는 군요. 흙의 정령은 아직 깨어 있습니다."
신관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비어 있는 기둥을 훑었다.
"이곳이 비어 있는 한.. 그 아이는 안전합니다. 이렇게라도.. 제가 그 아이의 안부를 확인해야지요."
그녀의 눈가에 투명하게 맺힌 긴 그리움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했다.
한 방울 톡 떨궈낸 그녀는 이내 기둥을 등지고 돌아섰다.
"이만 가겠습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곤란하니까요."
"예, 왕녀전하."
등돌린 그녀의 얼굴에 기둥을 바라보던 때의 애뜻함은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살포시 머금었던 미소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