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추워지는 차디찬 설산 속에서 나는 며칠 간 이어졌던 여정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달랑 곡괭이 하나만으로 절벽을 타고 있었다
'드디어 이 절벽만 오르면… 이 그지 같은 퀘스트도 끝이다.'
나는 그 동안의 여정들은 천천히 떠올리며 중도포기조차 되지 않는 S등급의 퀘스트를 내려준 NPC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남들은 다 즐겁게 게임할때 나는 어지간해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해는 험지들을 돌아다니며 어마무시한 보물들이 모여 있다는-퀘스트를 준 NPC말에 의하면- 보물창고의 단서를 모으고 그 단서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해가며 결국에는 이 설산의 꼭대기를 가리킨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NPC의 말처럼 어마무시한 보물이 있다면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모든 고생을 웃고 넘길 수 있다. 만약 아니라면…, 그 NPC는 목숨을 걱정해야 할거다.
"키르륵, 케륵. 아직도 멀었나?"
그런데 이게 왠 고블린 소리냐고? 하… 이건 말하자면 좀 긴데 내 게임 종족이 어쩌다보니 고블린이 되버렸거든.
다른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잘생기고 예쁜 엘프 혹은 무난한 인류, 대장일을 잘하는 드워프 등 개성 넘치고 재미있는 종족들로 선택되어져 갔는데 나는 종족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한다는 자타공인의 쓰레기 종족인 고블린이라니! 이게 운명이라면 아주 지랄같은 운명이지.
"얼마 안 남았어, 이것들아. 지도 상으로는 여기 꼭대기라고 나와 있으니까 이제 금방이네."
나는 절벽에 매달린 채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 그곳이 나의 목적지이자 한몫 제대로 잡게 해줄 다량의 보물이 있다는 보물창고가 있다는 곳이다. 나는 부푼 마음과 함께 손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보물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절벽과의 사투를 마치고 산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고, 나는 거친 숨과 함께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내 눈 앞에 보물창고가…는 개뿔이고 매우 추운 날씨와 강한 바람만이 남아 나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추웠다, 정말 추웠다. 덜덜덜덜.
아니, 왜 허공에 매달려 절벽 탈 때보다 여기가 더 추운 건데!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생각보다 빨리 얻을 수 있었다.
-'???'의 마법이 적용되고 있는 공간입니다.
-한기가 몸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동속도 50% 감소, 모든 스텟 30% 감소,
-감기에 걸렸습니다. 모든 스텟 5% 감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악화됩니다.
어마무시한 디버프였지만, 나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기대감을 느꼈다. 이 정도의 디버프 마법이 방어용으로 항시 작동되고있는 곳이라면 지키고 있는 것도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지키고 있는 것이란 바로 엄청난 보물이라 할 수 있겠다. 크흐흐. 나는 추위에 온 몸을 떨면서도 보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이때 한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이 정도의 마법을 항시 그것도 한 필드를 커버할 정도로 켜 놓을 수 있는 종족은 판타지에서 몇 안 된다는 것을.
"저 녀석 이상하다. 케륵. 몸을 떨면서 웃고 있다. 무섭다 케르륵."
그런 내 모습이 기괴해 보였는지 뒤에서 몇몇 고블린들이 쑥덕거리며 무섭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보물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오는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런데 춥기는 진짜 춥네.
그렇게 보물은 고사하고 먼저 얼어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속적인 추위로 인해 몸의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음…, 단순한 생각만은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그러한 생각이 들 무렵, 나는 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고 덤으로 내가 보물창고라 생각했던 것에 정체도 알게 되었다. 내가 동굴에 발을 한발 들여놓자 마자 여러개의 시스템 메세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고 하나 같이 놀라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불운하게도 말이지.
-드래곤 로드 '카르삭투스'의 레어에 진입하셨습니다.
드래곤의 위압감이 전신을 억누릅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가 자동 해체됩니다. 온몸이 무기력해집니다. 패기 스텟이 저항을 시도합니다. 부족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응? 드래곤이라고?! 왜 이 녀석이 여기서 나오는 건데?!
* * *
요즈음 세상은 주 워리어즈 사에서 내놓은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게임인 -Frontier spirit-으로 떠들썩했지만, 20대 청년 박세혁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았다.
'돈 벌어서 먹고 살기도 힘든데, 게임할 시간이 어디있어.'
고즈넉한 저녁 세혁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홀짝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의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300을 조금 넘는 정도, 물가가 예전같지 않았기에 아껴서 쓴다 해도 해도 2달을 버티기 힘들 정도의 적은 금액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자들은 그 동안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냐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21세기 때의 이야기. 로봇에게 밀려 일자리 하나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지금 같은 시대에 어올리는 얘기는 아니였다. 그 예로 세혁 역시 지난 2주간 별 다른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무슨 수를 쓰긴 써야하는데…'
세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 사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때, 그 일만 아니였더라면….'
몇 십년전 일본 본토를 횝쓸고 대한민국의 동남부 일대까지 초토화 시켰던 거대한 해일, 그나마 다행히도 그들 가족은 그때 당시 해외로 단체 가족여행을 간 후라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 할아버지의 사업이 진행 중이던 부산이 초토화 되면서 순식간에 빈털털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얼마간은 모아놓았던 돈이 조금이 남아있어 버틸 수는 있었지만 10년을 훌쩍 지난 지금은 그것도 바닥을 보이고 있어 세혁은 부모님에게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더군더나 그분들은 동생 대학 입학비도 마련해야 되는 상황인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염치 않는 짓이지.'
세혁은 고개를 흔들어 쓸대없는 상념을 털어낸 후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앞쪽에 거대한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건물 입구에는 도서관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 * *
세혁은 도서관 5층에 위치해 있는 정보 검색실로 들어갔고 자신의 계정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아이디 로안, 비밀번호 LHKC3794"
로안은 정보 검색실의 방 중 하나를 정해 안으로 들어가 허공에 자신의 계정 아이디와 비번을 차례대로 읊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이상해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홀로그램과 목소리 인식 등 첨단기술이 상용화 된 이 시대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장면이었다. 아니나 다를 까 그가 말을 마친 지 얼마 안되어 허공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계정 접속에 성공하였음을 말해주었다.
"계정 접속에 성공하셨습니다. 원하시는 작업을 선택…."
"매일 확인."
로안은 그 목소리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끝마쳤고, 곧 그의 앞으로 하나의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그에게 온 여러개의 매일 목록을 보여주었다. 로안은 위에서부터 하나씩 천천히 읽어내려갔고, 3개 정도를 읽었을 즈음 표정이 확 꾸겨지며 짜증이 섞인 한숨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이번에도 탈락이네…, 제기랄."
그의 앞으로 온 매일들은 하나같이 전부다,
-훌륭하신 분이지만 저희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랑은 어올리지 않은 분 같습니다.
등등의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매번 보던 내용이었지만 기분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다른 매일들과는 다르게 재목부터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한 매일이 들어왔고, 로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 매일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용자 수 2억 달성 기념 이벤트 관련 공지
이용자 수 2억 달성 기념 이벤트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차세대 가상현실게임 프론티어 스피릿(Frontier spirit)의 유니트가 내일 오후 5시 일괄배송됩니다. 이상으로 행복한 게임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프론티어 스피릿의 제작사 주 워리어즈 사에서 당첨자분들께.
"…내가 당첨이라고? 당첨의 ㄷ자도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내가?! 말도 안돼."
로안은 꽤나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고, 그가 다시 진정된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쨌든 당첨이란 거잖아, 그러면은 유니트가 공짜로 들어온다는 얘기인데…, 그게 다 얼마냐~!"
다른 가상현실게임들과는 다르게 현실과 거의 똑같은 감각을 자랑한다는 프론티어 스피릿, 당연히 그 명성에 걸맞게 인기도 다른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그 게임을 플레이하려면 필수품인 전용유니트의 가격대도 엄청나게 고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설사 중고라 하더라도 그의 몇달치 생활비 정도야 껌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박이다!"
세혁은 들떠오르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미 그의 머릿속에 면접을 전부 다 탈락했다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게임을 하라니! 요즘 내 형편 몰라서 하는 소리냐?"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오빠,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일자리 잘 안 구해지지?
"ㅇ…어,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건데? 그거랑 게임이랑 무슨 관련이냐고? 일자리도 잘 안 구해지니까 당연히 유니트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하는 거 아냐?
-으아 진짜 답답해서 못 살겠네! 그거 팔아서 돈을 얼마 받을 수 있다고 그걸 팔려해! 그러지 말고 이번 한번은 제발 내 말 좀 따라. 다른 자들에 비해 약간 늦기는 했지만 오빠 정도의 재능이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다 보면 평균 레벨은 넘을 수 있겠지.
"그래서? 그게 내가 그 게임을 해야만 한다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남들보다 잘나가면 뭐? 재밌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 재미를 누릴 형편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해야 하니?
-일단 좀 듣고 나서 얘기하시지, 오빠. 일단 어느 정도의 레벨에만 안착해도 지금 오빠가 벌어들이는 한달 수입보다는 훨씬 많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고 있는거야? 더군더나 랭커, 오빠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그들은 서로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 그런데 그걸 겨우 몇달 치 생활비 받자고 판다고? 3달 동안은 한달 마다 내야할 계정비까지 면제해 준다는데?
"…"
-입이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보라고, 그게 현명한 일인지.
"하…하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에서든 남들보다 앞서기는 쉽지 않아, 그게 설사 게임이라 할지라도."
-맞아, 쉽지않지. 하지만 지금 오빠에게 굴어들어온 그 게임은 달라, 그건 하나의 새로운 세계라고! 게임하면 보통 생각하는 전투 뿐만 아니라 상업, 요리, 낚시, 대장일, 건축업, 등등 할 게 도처에 깔려있는 게 바로 프론티어 스피릿 속의 세계야, 물론 그 모든 활동들은 프론티어 스피릿이 인기를 계속 유지하는 한 돈으로 돌아오지. 적어도 지금의 오빠 생활보다는 선택의 가능성이 많을 껄. 그런데 그걸 겨우 몇달치의 생활비하고 바꾸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아?
"…"
-부디 오빠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랄게, 하도 안 써서 녹슬어버린 머리 좀 굴려본후 결정하라는 뜻이야. 그럼 난 이만 끊는다.
그 후 조금 있다가 핸드폰에서 조그맣게 한마디가 더 흘러나왔지만, 이미 핸드폰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세혁의 귀로는 흘러들어가지 않았다.
-난 오빠를, 가능성을 믿으니까….
세혁은 전화를 끊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핸드폰을 귀에서 떄며 어딘가 기운이 빠져버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자랑 좀 하려 전화했다가 이게 무슨 꼴인지. 말이라도 이쁘게 했으면 몰라, 따박따박, 좀 모를 수도 있지. 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세혁은 방금 전 여동생과의 전화를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동생과의 마지막 대화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이곳보다는 괜찮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