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은 울퉁불퉁 하고 바람은 한 점 없으며 공기는 습한 것이 통로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하기 딱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환경 진짜 양심없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냐?"
새로 얻은 칭호와 이 통로에 끝에 위치하고 있을 보물들 생각을 하며 행복한 기분도 잠시, 10분 이상 이런 환경에서 밑으로 향하는 언제 끝날 지 기약 없는 통로를 걷고 있으니 그도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옆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물소리도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한지 오래. 로안의 걸음 속도는 이제 거의 띔박질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 필요없고 아무나 여기서 나 좀 빼내줘.'
* * *
깊은 지하 어딘가….
턱을 넘어 어깨까지 자라있는 백발의 머리카락, 청색의 도포, 수십년이 지나도록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리고 그의 눈 앞에 가로로 떠 있는 하나의 검. 그것은 모두 한 명의 노인을 지칭하는 말로, 백발의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신비감을 조성해냈다. 또 동시에 변함없이 존재해 오던 하나의 배경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배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감겨 있었던 노인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작은 공동에 퍼져나가는 거대한 존재감. 그곳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드디어… 때가 왔는가."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걸까, 노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떠있던 검이 약하게 진동했다.
웅, 우웅.
노인은 검을 보며 미소와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
"클클…너도 그때가 온 것을 느낀게냐? 섬백(蟾魄)."
물론 검이 대답을 할리는 없었지만, 노인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그저 검을 한번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분위기에 어올리지 않는 소음과 함께 한 사내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끝났다."
그 사내는 휘청거리는 움직임으로 바닥에 엎어져 거친 숨을 내쉬는데 열중하느라 바로 몇 걸음 앞에 있는 노인의 존재는 아직 깨닫지 못한 듯 했다.
"망할 놈들, 저런 환경을 조성해 놓을꺼면 좀 짧게라도 만들어 놓던가. 그래도 나오니까 살겠다."
그 사내는 혼자밖에 없다 생각해서인지 거친 말들을 쏟아내며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몸을 어마어마한 기운이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큭!"
-백운의 기세에 몸이 경직됩니다. 30초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는 겨우 고개만을 돌려 그 압도적인 기운의 주인을 확인했다.
'노인?! NPC인가, 도대체 레벨이 몇이기에…?'
곧 그의 눈 앞에 간략하게 노인의 정보가 떠올랐고, 그는 몸만 자유로웠다면 뒤로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LV 700, 청성파 장문인 '백운'
몰락해가던 청성파를 다시 일으켜세우고,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절대의 경지에 들었다고 전해지는 동대륙의 전설적인 무사.
'700?! 저게 말이 되는 수치야?'
그 사내는 놀람으로 표정이 굳어있었지만, 노인은 그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 곧바로 자신의 말을 꺼냈다.
"나의 후계자여, 이름이 무엇인가?"
사내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대답을 얼버무리면 방금 전과 같은 꼴을 당할 까 싶어 재빠르게 대답했다.
"로안, 로안이라고 합니다."
"로안이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좋다, 로안. 500년 전 우리가 미처 끝맺지 못한 일이 또 한번 이 대륙의 전란을 몰고 올 것이야. 불사의 축복을 내려받은 모험가들이여, 이번에는 자네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나서야 할 차례일세. "
"…네?!"
"꼭 이 일을 바로잡게나."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그러나 로안이 말을 다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눈 앞이 흐려지며 곧 한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나 죽은거임?'
로안은 순간 자신이 죽은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귀로 들려오는 시스템 메세지가 그 의심을 거두게 해주었다.
-챕터1, '불사의 모험가'이 시작됩니다.
* * *
이는 비단 로안에게만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다. 월드 전역에 퍼져있는 모든 유저들 역시 로안과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초보자존에서 토끼를 잡던 10레벨 미만의 초보자들도, 마물들을 사냥하던 고레벨 유저도 어느하나 예외 없이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하나의 시스템 메세지만이 떠올랐다.
"챕터1? 대규모 업데이트라도 하는건가?"
"이번에 마물관련으로 드디어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나보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된다. 기대되."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불만의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건 그만큼 사람들이 '프론티어 스피릿'을 즐기고 또 앞으로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워리어즈 사는 유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회사가 아니었다.
곧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거대한 영상, 그것도 사실상 영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스케일과 화려함을 가진 영상이었다.
광활한 평원에 수천, 아니 수만, 아니 셀수도 없을 정도로 모여드는 여러 종족들. 인간을 중심으로 엘프, 드워프, 오크 등 수많은 이종족들이 모여있는 형태였고, 그 크기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중에는 보기 힘들다는, 즉 지금의 유저들은 말로밖에 전해듣지 못한 요정과 정령들도 있었으니 유저들이 아는 프론티어 스피릿의 모든 종족들이 모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슨 일로 이들이 이렇게 모여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이 좋은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토록 믾은 인원이 모였으면 당연히 떠들썩해지기 마련, 하지만 떠들썩하기는 커녕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웃음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원 모두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이 공포감을 자아냈다.
그때, 그들 위로 누군가가 하늘로 떠오르며 크게 소리쳤다.
"우선 대륙에 닥쳐온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으로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껏 만나본적 없는 괴물들을 이곳에서 막아내야 합니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터전을 지켜냅시다!"
그의 말에 모두들 자신의 무기를 한번 더 점검하며 침착하게 곧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쩌-저적!
그 순간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저 앞 허공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차원전쟁이라 서술되는 과거의 대전쟁이 영상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을 내며 등장한 포탈은 주의로 붉은 빛의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기괴한 형상의 괴물들을 드넓은 평원 위로 떨어트렸다.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괴물들, 어느덧 놈들은 그 수가 연합군 못지 않게 거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했던 평원이 양쪽의 세력들로 가득찼을때, 두 세력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연합군 측 마법사들의 합동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인플래맨트드 메쿠 컴미트먼트 이스트 어 비리부스 네투라 인 후닉 문두(Implemented mea commitment est a viribus naturae in hunc mundum), 트웨브 다이어!"
5서클의 마법사 여러명이 모여 캐스팅한 6서클의 광역 공격 마법 '트웨브 다이어'는 시전과 동시에 거대한 불꽃을 앞으로 쏘아 보내며 수백의 괴물들을 불살랐다. 그 모습이 마치 불꽃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해일을 연상시켰고, 그 위력 역시 대단해 불꽃에 휩싸인 괴물들중 태반이 흔적 조차 남기지 않고 불타 없어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 그러나 저 마법으로 죽은 괴물들의 수는 전체 수로 봤을 때 얼마되지 않았고, 곧 괴물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의 마법처럼 통일된 공격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들이 연합군의 선봉대를 몰아붙였다. 곧이어 벌어지는 난전.
"돌격하라!"
연합군의 고위직으로 보이는 사내가 선두에서 외치며 괴물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송풍(松風)"
사내가 조용히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검 끝으로 바람이 모여들었다.
"검(劍)"
그리고 모인 바람은 푸른 빛을 내뿜는 사내의 검과 함께 적들을 꿰뚫는 하나의 창이 되었다.
쿠콰콰쾅!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는 그의 주먹
"천풍무형신권(天風無形神拳)"
사내는 쉴새 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거대한 전선에 조그만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을 이용해 연합군의 강자들이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이 같은 일은 다른 곳에서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다. 각 종족 혹은 국가별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그자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길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국검술 제 5장, 솔 카디트(Sol cadit)!"
"액스 슬래쉬(AX-Slash)!"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
각 강자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스킬들이 곳곳에서 펼쳐졌고, 영상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유저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유는 약간 달랐지만 로안도 그들 중 한명을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튀어나갔던 자를 눈여겨서 보고 있었다.
'저거 백운 같은데…. 왜 500년 전 전쟁에 저 녀석이 나오는 거냐?'
그러나 로안이 그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왜 백운이 저기 나오는지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백운의 강함에 있었다. 그가 스킬 하나를 쓸 때마다 수십씩 괴물들이 쓸려나가는 모습, 남들에게는 그저 대단함과 부러움의 대상이겠지만 로안에게는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 로안은 노인이 된 백운과 같은 장소 안에 있었고 -곧바로 영상이 시작되서 제대로 말은 못 걸어봤지만- 또 얼핏 들었을 떄 백운이 자신보고 후계자라 하기도 하였으니 잘하면 저런 강력한 스킬들을 얻게될 수도 있는 법. 로안은 괴물들 사이를 제 집 안방처럼 헤집고 다는 모습을 자신의 미래라 상상하며 앞으로 펼쳐질 전쟁을 즐겁게 감상…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본 전쟁이 시작될려는 찰나 영상이 바뀌어 전쟁 영상은 말 그대로 상상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쳇, 딱 이 부분에서 끊냐. 나쁜놈들."
로안이 불평을 하던 말던 영상은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 거대한 신전의 홀 전경을 비췄다.
신전의 홀은 무척이나 경건한 분위기로 대사제를 비롯하여 성기서, 신관들까지 전부 모여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제일 앞쪽에 있는 노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봤을 때 아마 여기 모인 자들 중 가장 고위직으로 보였다. 그떄 갑자기 그 노인의 머리위로 새햐얀 완전한 백색의 빛이 떨어져내렸다. 소리도 열도 없었지만 그 빛은 세어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신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억눌렀다.
그리고 빛 안에서 몇개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불사의 권능…, 모험가, 악의 재림, 막아내라."
빛은 4개의 단어들을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던져놓고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처음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난 뒤 노인은 단 한마디 만을 던진채 힘을 다한 듯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신탁…신탁이 내려왔으니 우리는 그걸 해석하고 실천한다."
그의 몸이 바닥에 닿기전 그를 빠르게 부축한 두명의 성기사가 나간 뒤 방금전까지 조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전은 소란스러워졌다.
"이게 얼마만에 신탁인지…."
"근데, 영 좋은 뜻은 아닌 듯 합니다. 악의 재림이라니."
"또 불사의 권능은 뭐란 말입니까?"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홀을 나섰다.
그 후 화면이 맨 처음 영상이 시작할때와 마찬가지로 까맣게 암전되더니 접속해 있는 유저들 모두의 눈 앞으로 단 한 문장이 떠올랐다.
-불사의 권능을 가진 모험가들과 힘을 합쳐 악의 재림을 막아내라.
문장은 한 30초 정도 떠올라 있다가 사라졌고 유저들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다시 영상이 시작되기 전 자신이 있었던 장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