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끔 아주 이상하게 돌아갈 때가 있다.
불운만이 가득할 것같은 사람에게 큰 행운이 찾아오고 늘 좋은 일만 계속 될것같은 이에게 견딜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올 때가 있다.
때때로 전혀 기대조차 하지않았던 뭔가에서 큰 성과를 거두는 일도 종종 있다.
지금의 빌런 지망생 임태성이 딱 그런 입장이었다.
'거짓말이지..?'
태성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전자 칠판에 그어진 흰 작대기의 획수를 몇번이고 다시 세어봤지만 암만 봐도 전혀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태성의 이름과 한유리의 이름 뒤에 쓰여진 바를 정(正)자는 정확히 7:3의 비율로 태성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음.결과가 나온 것 같군.그럼 금일 부로 임태성은 반장,한유리는 부반장으로 하겠다.다들 이의는 없겠지?"
"없을 리가..!!"
"없잖아요!!"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태성과 유리였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막 반장과 부반장에 선출된 이들이 반대 급부를 던지는 보기드문 장면이었다.
"호오? 둘다 정당하게 투표로 선출되었을텐데..뭔가 불만이라도?"
채윤이 칠판에서 고개를 돌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잖아요! 암만 투표로 선출됐다지만 저런 의욕도 없고 껄렁껄렁한 사람이 반장이라니! 절대 인정할수 없어요!"
책상을 탕 두들기며 일갈한 유리가 곧장 뒤편의 태성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저 남자가 왜 뽑혔는지도 전 의문이라구요! 당장 입학식 때 보인 건방진 태도도 그렇고 능력도 뭔지 모르는데 뭘 믿고 저런 사람한테 1년동안 반을 맡긴단 거에요?!"
"거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내가 좋아서 선출된건 아니다만..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뭐가 잘났길래 그딴 말을 하는건데?"
곧바로 반박해오는 태성의 말에 유리는 기가 차다는듯 자기 가슴에 왼손을 얹었다.
"하! 딱봐도 모르는 모양이죠? 전 국내에서도 50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 A급 셀렉션이라구요! 당연히 품행 방정하고 우수한 두뇌와 비전도 지니고 있어요! 그쪽은 뭐가 있는거죠?"
"뭐가 있냐니..만성 피로랑 권태감,그리고 귀차니즘 철학이 나와 함께한다."
"뭐..뭐라구요? 분명 당신도 셀렉션이어서 입학했을텐데..능력등급은 대체 몇으로 판정받은거죠?"
"알아서 뭐하게? 애초에 지금 그딴 게 그리 중요한건 아니었을텐데?"
가볍게 질문을 씹어먹은 태성이 곧바로 주변의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유리의 말대로 어딜봐도 뽑힐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던 그였다.
품성이나 태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애초에 반장을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도 반 아이들은 뭔가 묘하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하나같이 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나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나머지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교장 앞에서 귀찮다고 이하생략 지른 것 때문에 그런건가?'
속으로 짐짓 추측하던 태성은 이내 미간을 찌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암만 생각해봐도 자신이 반장으로 추대될 자격 따윈 없었다.
의지도,비전도,심지어 능력의 종류와 판정등급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가 반장과 부반장을 동시에 역임해도 모자랄 상황이라고 태성은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아무튼 난 반장 따위 할 생각 추호도 없어! 다들 뭔 생각으로 날 뽑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봐.내가 반장이 되면 이 반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짐짓 튀어나온 태성의 말에 나현과 원중이 곧장 차례대로 반대 의견을 던졌다.
"괜찮아요! 태성 오빠는 겉으로 보이는 건 좀 그래도 엄청 좋은 성격이라구요! 여차할땐 귀찮아해도 분명히 나서주는 멋진 사람이에요!"
"뭐어, 난 솔직히 저런 놈이 반장되는건 영 아니올시다지만..속는 셈치고 맡겨보는 것도 좋지않겠어? 딱히 나현이가 뽑아달라고 하도 사정해서 이러는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설득(?)에도 태성은 여전히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리 또한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듯 미간을 찌뿌리고 있었고 문득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담임교사 채윤이 넌지시 입을 열어나갔다.
"흠.아무래도 둘다 인정하지 못하는 듯하군..갑작스럽지만 둘다 원하는걸 걸고 버서스(VS)를 한번 치뤄보는게 어때?"
"버서스..? 그건 또 대관절 뭔 소립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태성에게 채윤이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셀렉션들끼리의 1:1 데스매치를 뜻하는 전문용어다.어느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더이상 전투 속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무제한으로 싸우는 거지."
"음..그럼 내가 이기면 반장 자리를 포기해도 딴 소리 안하겠다는 거겠죠?"
"그야 물론이지.하지만 만약 니가 패배한다면 반장의 자리는 한유리에게 돌아가고 부반장의 자리는 추가로 투표를 시행하겠다.이러면 유리도 불만없겠지?"
"훗.좋아요! 그 대결, 받아주도록 하죠! A급 셀렉션인 이 한유리의 진짜 실력을 사무치게 느끼도록 해주겠어요!"
단숨에 일갈하며 돌아보는 유리에게 태성은 피식 조소를 지었다.
결과야 어찌됐건 이 대결은 이기나 지나 결국 태성이 바라는대로 흘러가게 된다.
그가 이긴다면 자신의 반장 당선은 당연히 무효화되고 추가로 투표를 실시해 또다시 한유리가 반장이 될게 뻔했다.
패배한다 하더라도 애초부터 반장에 당선될 마음이 없었던 태성이었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덤으로 나현이가 자신에게 품고있는 모종의 환상을 박살낼수도 있을 터였다.)
'어느 쪽이건 별로 상관없지만..뭐, 너무 대충대충하면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사겠지.적당히 상대해주다가 밀리는 척해주고 그대로 기권해버려야지.'
마음 속으로 재빨리 플랜을 구성한 태성은 뭣도 모르고 의기양양해하는 유리를 지그시 흘겨보았다.
유리는 태성의 눈빛에 순간 흠칫 놀라더니 이내 흥하며 무시했고 곧 둘의 대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채윤이 한손으로 교탁을 가볍게 짚었다.
"좋다! 그럼 현 시간 부로 한유리와 임태성,두 사람의 버서스를 허가하도록 하겠다! 버서스의 무대는 6번 섹터에 위치한 정규 대련장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리로 이동하도록!"
"오오? 첫 수업시간부터 버서스라니..오늘은 어쩐지 운이 좋은데?"
"A급 셀렉션의 능력을 볼수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저 이하생략 놈이 어떻게 쳐발릴지도 궁금한데?"
곧바로 튀어나오는 몇몇 학생들의 말을 태성은 시원하게 무시했다.
뭐라 지껄이든 자신은 진지하게 대결에 임할 생각이 없었고 오로지 유리만이 기분나쁜 조소를 지으며 태성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뭐, 멋대로들 생각하라지.그보다 히어로 학교의 대련장은 어떻게 생겨먹었을려나?'
잠시 속으로 중얼대던 태성은 곧바로 채윤의 인솔을 따라 교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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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섹터는 교실이 위치한 학교 본관에서 뒤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TV에서나 봤던 회백색의 돔경기장이 섹터 중심부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내부에는 강화 유리로 가려진 넓은 관중석과 탁 트인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다.
"여..여기가 대련장? 엄청나게 커요!"
단숨에 탄성을 내지르는 나현에게 옆자리에 앉은 원중이 피식 미소지었다.
"이 경기장은 교내에서도 두번째로 큰 장소야.이곳 외에도 가장 규모가 작은 3섹터의 대련장,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1섹터의 대련장까지 총 3개의 대련장이 부지 내에 자리잡고 있어."
"이..이거보다 더 큰 대련장이 있다고요? 거긴 대체 얼마나 큰 거에요?"
"글쎄? 어지간한 야구장보다 큰 규모라고 들었어.정확한 규모는 나도 모르지만 경기가 열리면 무조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정도라고 해."
원중의 대답에 나현은 상상조차 안 간다는듯 와하고 혀를 내둘렀다.
한눈에 다 둘러보지 못할만큼 넓은 잔디밭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고 환기구가 돌아가는 우웅하는 소리만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럼 지금부터 한유리와 임태성의 버서스를 개시하겠다! 양 측 출전자는 즉시 경기장으로 나오도록!"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온 채윤의 외침에 곧바로 태성과 유리가 출전자 전용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는 대놓고 태성을 무시했는지 아무런 장비없는 맨몸으로 걸어나왔고 이에 비해 태성은 두 자루의 쌍권총과 펌프액션 샷건처럼 생긴 테이져건을 등뒤에 메고 경기장으로 걸어나왔다.
"흥.고작 시합용으로 개조된 쌍권총 두정에 제압용 샷건이라니..그런 걸로 제 상대가 될거라고 생각했나 보죠?"
"글쎄? 너무 총을 우습게 보지 않는게 좋을꺼야? 당장 이 쌍권총만 해도 탄환 자체가 테이져탄이라 맞으면 무진장 아플 거라고?"
"훗.애초에 맞지 않으면 아무 의미없는게 총알이죠.충고하는데 제가 생성하는 얼음의 벽은 강화 철갑탄도 뚫지 못하는 철벽의 얼음이라구요."
"호오? 얼음을 다룬다 이거냐? 좋은 정보 고맙게 받지.근데 그런 거 막 알려주고 그러면 나중에 불리하지 않겠어?"
슬쩍 비웃으며 되묻는 태성에게 유리는 보란듯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후훗.글쎄요? 애초에 제가 불리해질거란 확률은 단 0.1%도 없을텐데..굳이 그런 걸 생각할 필요나 있을까요? 약골 셀렉션 씨."
"아, 그래? 그럼 뭐..나도 충고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피차 잘해보자고.킥킥."
또다시 조소를 지은 태성은 곧바로 양 무릎 사이에 한정씩 끼워뒀던 쌍권총을 휘릭 뽑아들었다.
태성이 준비를 마치자 유리 역시 양손에 한기를 가득 모으기 시작했고 곧 두 사람을 중계실에서 바라보던 채윤이 대형 스크린에 얼굴을 띄우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둘 다 준비는 끝났겠지? 잊지 마라! 어느 한쪽이 먼저 패배를 선언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면 그걸로 시합은 종료된다!"
"네네..빨리 시작이나 하시죠?"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롭게 구는지 한번 지켜보죠! 각오 단단히 하세요!"
날카롭게 일갈하는 유리를 태성은 힐끗 돌아보며 또다시 조소지었다.
"그럼 버서스 개시!! 능력 발동을 전면 허용한다!"
채윤의 마지막 외침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럼..시작해볼까?'
짐짓 속으로 중얼거린 태성의 두 눈동자가 일순간 푸른 섬광을 뿜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고 이내 총을 휘어잡은 태성은 슬로우모션으로 날아드는 수십개의 고드름 창을 힐끗 바라보았다.
'난..분명히 경고했다!'
사악하게 웃음짓던 태성은 곧장 그림자처럼 얼음 창 사이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 다음 편에 계속 -
태성 : 자, 그럼 여기서 문제.내 능력은 과연 뭘까요?
나현 : 아..알아맞추면 어떻게 되는데요?
태성 : 죽을 것이다.
나현 : 어째서요?!
태성 : 후환을 없애야 나중에 편하거든.크크큭.
나현 : 와.순간 진짜로 악당같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