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공작님이 너무해!
작가 : 패티라이트
작품등록일 : 2017.11.1
  첫회보기
 
만남
작성일 : 17-11-03     조회 : 277     추천 : 2     분량 : 5068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시녀, 에밀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저녁식사가 끝나자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있었다. 머리 위로 흐드러지게 핀 별들과 거대한 달이 주변을 너무 어둡지 않게 비추고 있었다. 게다가 확실히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돈이 많다는 소문이 있는 크라젠 공작가라 그런지 정원 곳곳에 전등이 있어 적막하다거나 외진 느낌이 들진 않았다.

 

 로지는 쭈욱-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도 먹었겠다, 날도 좋으니 산책을 좀 해 볼 요량이었다. 그녀가 밤이슬을 맞아 푹신한 잔디에 한 발을 내딛자 기민하게 의미를 알아챈 에밀이 앞장서서 안내하려 했다.

 

 “아, 아니야. 그냥 발 닿는 대로 걸을 거니까.”

 

 로지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자 에밀이 약간의 걱정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작가의 정원은 굉장히 넓어서 처음 오시는 분들은 길을 잃기 쉽답니다. 게다가 날도 많이 어두운 걸요.”

 

 “음, 길이야 에밀이 있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 혹시 내가 가면 안 되는 지역들이 있는 거야?”

 

 서로 대답을 주고받다 로지가 무언가 퍼뜩 깨달은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에밀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외부인인 데다 한낱 면접자였던 그녀는 들어갈 수 없는 지역들이 충분히 있을 법도 했다. 가령 공작의 은밀한 취미생활 장소라든가…….

 

 “아니에요! 그, 그런 곳은 딱히 없는 걸요.”

 

 “…으응? 내가 혹시 소리 내서 말했니?”

 

 로지가 민망한 듯 웃음을 흘리자 에밀이 단호한 목소리로 따로 외부인이라고 해서 개방하지 않는 장소는 많지 않으며 특히 그녀는 공작성의 어디든지 둘러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붉어진 얼굴을 감출 새라 고개를 푹 숙인 채 하는 말이어서 그런지 그다지 신뢰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특히’ 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지만 어쨌든, 그녀로서는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차하면 에밀이 허락했다고 팔아먹어야지, 라는 상당히 자기회피적인 생각으로 충만한 로지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밤바람이 물기어린 초목의 향을 품고 그녀들을 쓸고 지나갔다. 성의 사용인들도 한창 저녁을 먹을 시간인지라 그녀가 묵고 있는 내성의 정원은 사람 소리 없이 조용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로지는 옛날부터 새로운 마법공식을 증명한다거나, 기존 마법을 개량한다거나, 후원 기관의 개똥같은 컨펌을 열 번 씩 받아가며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제품을 발명하거나, 대립하는 학파의 꼬장꼬장한 노인네들과 대거리 아닌 대거리를 하게 돼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마다 하염없이 걸었다.

 

 얼마나 하염없이 걷기만 하는지 분명 별도 뜨지 않은 야밤에 실험실 문을 나섰는데 제도 성벽을 타고 해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실험실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로지 카펜샤는 누군가가 말리지 않는 한 마법사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기만의 생각에 침잠해 저질스러운 체력을 가지고도 몇 시간이고 단순행동, 여기서는 걷기, 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로지는 규칙적인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 삼아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버렸다. 뭐, 대단하고도 거창한 마법적 발견과 고찰은 아니고.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저녁식사는 정말 맛있었단 말이야. 특히 그 오리고기요리. 내가 아무리 구내식당만 이용해서 저렴한 입맛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건 정말 제도 내 웬만한 식당에서도 맛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제도 행 기차표를 끊기 전에 요리사를 꼭 만나봐야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오. 이 꽃 예쁘다. 이름이 뭘까? 비쌀까? 키우기 어려울까? 역시 비싸겠지?’

 

 처럼 실없는 생각 뿐이었지만 그 집중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뒤따라오던 에밀이 숨이 차서 헉헉거려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하여 분명 동쪽 지평선에 걸려있던 달이 남쪽 하늘에 걸릴 때까지도 로지와 에밀은 산책을 계속 했다.

 

 에밀은 점점 느려지는 걸음을 다잡으며, 무슨 생각에 빠진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는 로지의 등을 힐끔거렸다.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스의 손녀이자 오베토 보르자 남작의 외동딸인 에밀은 그간 삼십분 이상은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힘이 다해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몰래 주물렀다. 언제까지 걸을 거냐고 묻고 싶은데 앞서 걷는 로지의 기세가 자못 심각하여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법사님께서 지금 제국을 뒤흔들 엄청난 마법을 만들어내는 중일지도 몰라! 근데, 힘들어! 어떡하지……?’

 

 조금만 걷겠거니 생각하고 그대로 앞서 걷는 로지를 내버려둔 것이 잘못된 거였을 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초행길인 분을 앞세워서 벌 받는 거야. 에밀이 속으로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졸음과 피곤을 반반씩 담고 축 처졌다.

 

 그녀의 귀에 풀벌레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어. 이 소리는.”

 

 마침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로지가 고개를 들고 어느 한 쪽을 빤히 응시했다.

 

 로지가 묵고 있는 방의 위치는 공작성의 중앙에 위치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으니 사람들이 묵는 장소보다는 도서관같이 다른 쓰임새의 건물들이 나올 차례였다.

 

 로지의 눈동자가 어두운 밤길 아래서 살짝 흔들렸다. 그녀가 홀린 듯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사락사락, 발아래 깔린 잔디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멀게 느껴졌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느새 뛰기 시작한 그녀의 귀로 이내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이, 거기! 대열이 흐트러졌다. 다시!”

 

 “1조와 4조는 대련 준비 해!”

 

 건장한 남성들의 고함 섞인 목소리와 갑옷의 이음새가 마찰하는 소리, 땅을 박차는 소리와 간간히 섞인 여기사들의 절도 있는 목소리까지.

 로지가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것은 공작가의 연병장 모습이었다.

 

 ‘뒤쪽으로 올수록 유독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했더니 연병장과 공간을 나누려고 그런거였구나.’

 

 단단하게 다져진 흙으로 덮인 연병장은 매우 넓었으나 지금은 그곳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내뿜는 열기가 대단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도 갑옷까지 갖춰 입고 일사분란하게 훈련을 하는 모습은 역시 모든 기사지망생들의 우상이라고 할 만 했다.

 

 울타리도 없는 연병장에서 한 발 물러선 채로 그 훈련을 지켜보는 로지의 마음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딱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달빛을 받아 푸른색을 발하는 연병장의 흙을 밟을 수 있건만, 차마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헉, 허억. 로지님. 허억, 왜 갑자기 달리기를…….”

 

 뒤따라온 에밀이 숨이 차는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로지는 연병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에밀에게 말했다.

 

 “우리 여기에 조금만 더 앉아있다 가자.”

 

 “네, 흐, 에? 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요. 이제 침대에 누우셔야 돼요.”

 

 그래야 피부미인이 될 수 있답니다. 당황스런 목소리로 덧붙이면서도 에밀은 여전히 숨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지는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의 격의없는 행동에 에밀이 놀라 로지님! 그러다 감기 걸려요. 바닥이 얼마나 차가운데요! 라고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보다가 들어갈게.”

 

 로지의 눈이 여전히 땀 흘리며 가상의 적을 상대로 대열을 짜는 기사들을 쫓았다. 갑옷까지 둘러 체격이 큰 남성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여성들이 보였다. 다른 이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묵묵하게 제 역할을 다하는 그녀들을 보자니 낮에 공작이 한 말이 생각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흥. 저 사람들도 하는데 내가 못 할 게 뭐란 말이야. 체력이 부족한 부분은 마법으로도 충분히 보조가 가능한데…….”

 

 부러 모난 소리를 중얼거려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납덩이를 인 듯 무거움이 가시질 않았다. 무릎을 끌어 모은 그녀가 턱을 괴었다. 울타리도 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바로 앞의 흙바닥과 잔디 사이에 깊고도 거대한 절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에휴. 이리 청승맞게 굴어봐야 뭐하겠어……. 에밀. 이제 들어가자.”

 

 그렇게 얼마간 더 못 박힌 듯 앉아있던 로지가 치마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옆에서 어느새 쪼그려앉아 졸던 에밀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늘어지듯 대답했다.

 

 돗자리도 깔지 않은 바닥엔 절대 못 앉는다더니. 자신이 너무 끌고 다닌 건가 싶어진 로지가 에밀을 잡아 일으켜주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공작과 다시 한 번 담판을 지어봐야겠다.

 

 

 

 

 그녀들이 자리를 뜬 뒤, 느닷없는 공작의 명령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야밤에 훈련을 나오게 된 로버트가 잔뜩 굳은 목을 풀며 불만을 내뱉었다.

 

 “아 씨. 아니 안 그래도 마물 퇴치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이 밤에 훈련이라니. 말이 돼? 게다가 단장님은 또 왜 저렇게 기합이 들어가신 거야?”

 

 그가 양팔을 벌려 스트레칭을 하려다가 갑옷 때문에 불가능함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그의 투덜거림을 들은 미켈이 베이어 기사단장의 눈을 피해 농땡이를 부리며 중대한 사실을 알려줄 것처럼 한껏 거들먹거렸다.

 

 “이렇게 소문이 느려서야. 어디 첩보전이라도 하겠어? 그, 왜. 공작님께 애인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이 있었잖아.”

 

 “근데. 이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오, 이 자식. 머리 들이밀지 마라. 썩은 내 난다.”

 

 “뭐? 아, 아무튼간에. 그 애인이랑 오늘 깨졌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이번에 건물 새로 지은 거나, 단장님 계속 공작님께 불려갔던 것도 그 애인 때문이었는데 깨져서 다 무용지물 됐다고 하더라고.”

 

 “진짜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님을 찼다고?”

 

 “아, 이 새끼. 내가 어디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다~ 이 귀로 직접 들은 내용이다 이거야! 그리고 공작님께서 찼을 수도 있잖아.”

 

 “그 분이 그간 하던 행동을 봐라. 깨졌다면 차인 거지. 먼저 찰 분은 아니지.”

 

 고된 하루를 끝내고 잘 준비로 한창이던 기사들을 갑자기 소집하더니 이리 연병장에 굴린 이유가 다 있었구만. 안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신입 때도 안하던 밤 수련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던 로버트의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너무나 존경하는 공작님이지만, 전선에서는 누구보다 믿음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분이시지만, 근래 그들을 너무 괴롭히더니 결국 깨져서 그들을 굴리는 거라고 생각하니 엿 같아도 참을 만 했다.

 

 아무렴,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바로 공작님이 아니겠는가.

 

 한 밤의 푸른 기운에도 붉게 빛나는 그의 곱슬머리가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었다. 옆에서 연신 욕을 뱉으며 달리는 동료기사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 삼으며 같이 땅을 박찼다.

 

 ‘아, 그 카지르 공작님을 찬 여자라니. 얼굴 한 번 보고 싶은 걸?’

 

 

 그날, 단 하루 새에 생겨난 새로운 만남들을 지켜보던 달만이 높은 곳에 걸려 푸르게 빛날 뿐이었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9 시작은 하녀부터 11/6 235 0
8 만남 11/5 269 0
7 만남 11/4 261 1
6 만남 11/3 278 2
5 만남 11/3 267 2
4 만남 11/1 276 3
3 만남 11/1 252 3
2 만남 11/1 279 4
1 만남 (2) 11/1 46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