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어.."
웅크렸던 몸을 힘겹게 움직이며 침대에서 고개를 드는 오동화.
올해로 22살 아직도 파릇파릇하기만한 대학생이다.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낸 동화는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시간은 오전 10시.
새벽까지 술 마시고 놀다가 집에 돌아와 곧장 엎어져 뻗었던 것이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이성을 끌어내릴 만큼 강해서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한가닥 남은 이성이 그리했다가는 저녁때나 되야 일어날 자신임을 일깨웠다. 오늘 오후에 있는 강의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수님이라는 사실과 함께.
"으.."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동화는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부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물을 한컵 떠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좀 떠진 눈으로 돌아본 거실에 전날 열어보지도 않고 두고 나간 할아버지의 택배상자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모자 자랑하다가 그냥 나가서 확인을 못했네..'
멍하니 택배 상자를 바라보던 동화는 컵은 내려놓았다.
'...일단 씻고.'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못차리는 스스로를 잠에서 깨우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동화는 따뜻한 물에 술기운을 함께 씻어버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개운하게 씻고 나온 동화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수건을 머리위에 올려 둔 채로 손을 뻗어 상자를 집어 든 동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자는 제법 무게가 있었다. 커터 칼로 입구를 긋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엔 최신형 카메라가 동화를 반기고 있었다.
"어!!!!"
재빨리 그것을 꺼내 들자, 상자 밖으로 톡 떨어지는 하얀 쪽지.
"카메라다!!!!"
신이 난 얼굴로 쪽지를 집어들자, 그 안엔 익숙한 할아버지의 필체가 있었다.
- 전부터 사진기, 사진기 노래를 부르기에 보낸다. 소중히 다루고 간수 잘 하거라. 촐싹거리지 말고.
쪽지를 읽은 동화가 활짝 웃었다.
"역시 할아버지!"
싱글벙글 신이 난 동화가 쪽지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내려갈 줄 모르는 입꼬리를 주체 못하며 동화가 실실 웃었다.
이거 하나 장만하려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할아버지에게서 떡하니 카메라가 도착한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동화가 그대로 카메라를 들어 자신의 자취방을 찰칵 찍었다.
"흠.. 내 방은 찍을 게 못 돼."
여기저기 어질러진 방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동화가 카메라를 살포시 내려놓고는 통통 튀며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하며 옷을 갈아입던 동화는 핸드폰을 집어 어제 함께 술을 마신 친구들 중 하나인 시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아마도 자고 있을 것이 분명한 시완은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포기할 동화가 아니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쉬지않고 걸어댄 덕분에 결국은 전화를 받은 시완.
-...왜 깨우고 지랄이야 죽고싶냐..
자고있었을 것이 분명한 시완이 잠긴 목소리로 대뜸 말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낮게 가라앉은 시완의 까칠한 음성은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지 동화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야! 빨리 나와 해장하게."
-...에바야.. 이 시간에 나가긴 어딜 나가.
시완의 말에 시계를 힐끔 본 동화는 티없이 순수한 그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시완의 화를 돋웠다.
"빨리 나와! 보여줄 거 있어!"
-지랄. 나 잔다.
"아, 빨리! 너 안 나오면 그녀의 존재를 어머니께서 아시게 될 거야."
-.......ㅅㅂ
잠시간에 침묵 끝에 짜증이 날대로 난 시완의 욕설이 시작되었다.
-오동화 너 이 &$*#&* 내가 진짜 *($&($%&(#*
시완의 입에서 걸쭉한 육두문자가 쉬지않고 나오는데도 호탕하게 웃어제낀 동화는 여유롭게 옷을 마저 입었다.
동화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은 시완은 결국 나오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욕을 먹고도 기분이 좋은 건지 여전히 싱글벙글한 동화가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들었다.
"가자! 너에게 오늘 세상 구경을 시켜주마!"
***
카페에서 두 눈을 빛내며 시완을 기다리는 동화.
어서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 훤히 보였다.
피곤한 얼굴을 모자아래 슬쩍 감춘 시완이 무표정한 얼굴로 카페에 들어섰다.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동화의 맞은 편에 앉은 시완이 동화의 커피를 냉큼 들이켰다.
그리고는 등받이에 기대며 짜증스런 얼굴로 물었다.
"뭐."
"짠!!"
그 짜증이 드러난 얼굴이 보이지도 않은지 신이 난 동화가 시완의 눈앞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어쩌라고."
"멋지지? 죽이지??"
"응. 널 죽이고 싶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동화를 노려보던 시완이 다시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돈이 어디서 나서?"
"내가 산 거 아니야. 할아버지가 보내 주심."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괴롭히고 싶어지는 시완이었다.
동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에 얼굴을 밀착시키고 렌즈 너머로 무표정한 시완을 바라봤다.
삐딱한 자세에,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분명 머리를 감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세수만 하고 나온 모양인데 참으로 잘생겼다. 더러운 세상.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이 된 동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완을 렌즈에 담았다.
"이야, 카메라가 좋아서 안 씻고 나온 게 다 찍히겠네."
사진 찍히는 것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시완은 그저 동화의 커피를 들이켰다.
하긴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는 이상 못생기게 찍히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카메라의 첫 사진의 피사체가 너라는 걸 감사해라."
"지랄."
찰칵.
카메라에서 얼굴을 뗀 동화는 설레는 얼굴로 사진을 확이했다.
"..어..?"
잠시 굳어졌던 동화는 다시 찰칵하고 시완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확인한 동화가 카메라를 든 채로 굳어 움직이지 않자, 커피를 마시던 시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자 조금 긴장된 손짓으로 손을 뻗은 동화가 시완의 볼을 쿡 찔렀다.
"..너.. 귀신 아니지?"
"정신 팔아먹었냐?"
인상을 찌푸린 시완의 따가운 눈총에 다시 손을 거둔 동화가 부들부들 떨며 카메라를 주시했다.
"뭐, 왜 그러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손에 든 시완이 묻자,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동화가 바보같은 얼굴로 시완에게 말했다.
"너가 안 찍혀."
그러자 픽 웃음을 흘리는 시완.
"야, 할아버님께서 버리라고 주신 건 가보다. 아니면 고쳐오라고 시키신 거 아냐?"
키득거리며 웃음기 묻어나는 시완의 놀리는 말에 동화가 억울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만 안 찍혀."
동화가 내민 카메라로 시선을 옮기자, 찍혀있는 사진엔 시완이 앉아있는 의자, 벽, 커피 등만 나오고 정작 편집이라도 한 듯 시완이 쏙 빠져있었다.
잠시 굳어져 사진을 바라보던 시완이 이내 픽 하고 웃었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하마터면 또 속을 뻔했다고 중얼거리는 시완에기 동화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야, 진짜야 이거! 너가 찍어봐!"
물론 평소에 장난을 안 친 건 아니지만 이번만은 진짜로 억울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동화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던 시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운터 쪽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주문을 하는 손님, 주문을 받는 종업원. 오픈부터 마감까지 카운터를 비우는 일은 없을 테니 이건 못 속이겠다 생각한 시완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을 확인한 시완은 조금 전 동화가 그랬던 것처럼 멈칫했다.
카운터나 메뉴, 이런 것들은 분명 찍히는데 사람이 찍히지 않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미간을 찌푸린 시완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힐끔거리는 동화.
"계속 그래? 다른 사람도 안 찍혀?"
잠시 홀린 듯 카메라를 바라보던 시완이 동화를 향해 던지듯 카메라를 건넸다.
"아, 야! 떨어트리면 큰일 나!"
"뭐야 그거. 기분 나빠."
인상을 찌푸리며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듯 카메라를 피해 몸을 뒤로 빼는 시완.
그에 비해 사람이 찍히지 않는 기묘한 카메라이지만 공짜로 생긴 카메라가 소중한듯 동화가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훑으며 말했다.
"이 카페가 이상한 거 아냐?"
괜스레 멀쩡한 카페 탓을 하는 동화를 보며 시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랄. 밥이나 사. 가자."
"췌."
카페를 나와 밥을 먹은 두 사람은 학교로 향했고, 그날 동화는 하루 종일 카메라를 품에 안고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 댔다.
강의실에서도 찰칵, 길을 걷다가도 찰칵, 도서관에서도, 학교 정원에서도 찰칵.
정말 사람이 안 찍히는 건지 일단 무조건 사진을 찍고 보자는 심정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으면서 학교를 누볐다.
그리고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렇게 사진을 찍어댄 덕에.
"야!! 작작해 이 새끼야!!!"
동화는 시완의 분노를 +1 얻을 수 있었다.
***
그날 집으로 돌아온 동화는 소파에 널브러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시완이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곧장 가방에 집어 넣어서 하루종일 찍었던 사진을 확인하기는 커녕 사진도 더 찍지 못했다.
널브러진 상태로 카페에서 시완을 만나 찍었던 사진부터 차례대로 넘기는 동화.
학교, 길거리, 도서관. 전부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찍은 사진이었지만 사람이 찍힌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왜 사람이 안 찍히는 걸까..'
입술을 삐쭉 내밀고 고민하며 빠르게 사진을 넘기던 동화가 방금 막 지나간 사진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아 멈칫했다. 다시 뒤로 돌려 사진을 본 동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분명 사람이었다.
'여기 우리학교 정원인데..'
그 사진 이외에는 전부 전멸이었다. 사람이 하나도 찍히지 않은 것이다.
단 하나 찍혀있는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동화가 헤벌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쁘다."
***
"야, 시완아."
"왜."
강의실에 강의 준비를 하는 시완을 책상에 엎드린 동화가 불렀다.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는 시완에게 동화는 무슨 일급 비밀이라도 얘기하듯 주위를 훑어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람이 찍혔어."
그러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얼굴로 동화를 바라보는 시완.
"내가 보기에 넌 상담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 아니! 어제 그 카메라. 집 가서 확인해 보니까 사람이 찍혀 있었어!"
"그래? 그 카메라 이제 멀쩡하냐 그럼?"
의외라는 얼굴로 묻는 시완에게 동화가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어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딱 한사람만 찍혀 있었어. 그래서 오늘 또 가보려고 거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시완이 이상한 사람 보듯 동화를 바라봤다.
"나였으면 그런 이상한 카메라 진작에 갖다 버렸다."
"야!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건데 어떻게 버리냐! 매정한 녀석같으니!"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시완을 보며 동화는 속상한 얼굴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강의 시간 내내 기똥차게 숙면을 취한 동화는, 그런 기분 나쁜 카메라는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다면서 끝끝내 동행을 거절한 시완 때문에 홀로 걸음을 내디뎠다.
전날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었던 벤치가 놓여있는 학교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정원.
워낙 구석진 곳에 자리하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발길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나 뭐라나.
터벅터벅 걸어간 동화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벚꽃 필 땐 예쁘기만 한데..'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한 벤치, 줄지어선 벚꽃나무를 둘러싼 돌담.
운치 있고 예쁘기만 한 정원이건만 이곳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찰칵.
벚꽃나무를 렌즈에 담은 동화가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었다.
'사람이 없어서 풍경 사진 찍기는 좋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찍었던 사진을 확인하려는데-
"아악!!!!!"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중한 카메라를 던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든 손을 위로 치켜 든 동화가 진동하는 동공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 작은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동화는 힐끔 다시 사진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동화를 놀래킨 그 사진이었다.
벚꽃은 커녕 사진에 찍힌 것은 마치 카메라 앞에서 렌즈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바라보고 있는 듯한 얼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가방에 쑥 집어 넣은 동화는 다시 사람이 없는 주변을 훑어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으아아아악!!!!!!"
그리고는 비명과 함께 그 정원에서 미친듯이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