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
"진짜라니까!!"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출하는 동화에게 시완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안가."
"혼자 가기는 무섭단 말이야!!"
"그럼 안 가면 되겠네."
동화는 시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팡팡 두들겼다. 덩달아 흔들리는 노랗게 물들이 머리카락이 주변을 지나던 여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치만 정말 사진이 찍히더라니까?! 분명 아무도 없는데!!"
강의 시간을 확인하며 피곤함에 지친 걸음을 내디디는 시완은 시종일관 심드렁한 그 얼굴로 동화를 마주했다.
"너, 지금 말하는 거기. 학생들이든, 교수님들이든, 학교 관계자들은 전부 이상한 일 생긴다고 가까이 안가는 그 정원이잖아."
"왜?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는데? 난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냥 사진에 누가 찍혔을 뿐인데?"
시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데 사진에 사람이 찍히는 게 이상한 일이지."
"왜? 왜 그게 이상한 일이야?"
"넌 그럼 그게 정상적인 일이냐?"
심드렁하던 시완은 이내 그 얼굴에 짜증을 내비쳤다. 동화의 질문이 시작된 것만 같은 느낌이 때문이다.
웬만한 호기심 왕성한 나이의 아이들보다 호기심이 배는 많은 동화가, 그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나오는 말투. 혹은 그냥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싶을 때 나오는 말투랄까.
"그럼 그 이상한 일들이.. 사진에 찍히는 그 사람 때문 아닐까?"
짧은 한숨을 내쉬는 시완은 누가 봐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는 얼굴이었다.
깊은 짜증을 애써 가라앉혔지만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린 시완이 동화를 노려봤다.
"그렇게 궁금하면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가서 확인해라 좋은 말로 할 때."
낮게 가라앉은 시완의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하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동화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확인해보게 같이 가달라니까? 혼자 가긴 무서워."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시완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해맑은 동화는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건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시완의 대답을 기다렸다.
매섭게 동화를 노려본 시완이 그의 어깨에 손을 턱 걸쳤다.
"다시 말한다. 난. 안. 가."
"왜애애애???"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는 동화에게 낮게 목소리가 가라앉은 시완이 입술을 뗐다.
"다시 한번만 더 왜라는 질문을 했다간 대학생활 내내 네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저지른 온갖 만행을 일단은 어머님께 알리고 둘째로는 해외에 나가 계신 너의 둘째누나가 알게 될 거야. 누님께서 급히 귀국하시어 너를 단속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그 이상한 카메라에 찍히는 이상한 그녀는 너 혼자 만나러 가던지 멍멍이를 꼬시던지 하고 나한테 달라붙지 마."
마치 지옥문에서 방금 막 도착한 저승사자 같은 기운을 내뿜는 시완의 모습에 동화가 '넵' 하고 입을 합 다물며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시완의 입에서 튀어나온 '둘째누나' 라는 존재는 동화의 호기심을 누르고 그 입술을 굳게 다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입술을 삐쭉 내민 동화가 다시 진정하는 시완을 힐끔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생각이 난 듯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신호음이 가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안 받으시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동화를 힐끔 바라본 시완이 물었다.
"누가?"
"할아버지. 카메라만 덜렁 보내시고 그 이후로 계속 전화도 안 받으셔. 왜지?"
무심코 '왜지?' 하고 말했던 동화는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시완은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역시 그 카메라 그냥 이상해서 너한테 떠넘기신 거 아냐?"
시완을 은근슬쩍 흘겨본 동화는 챙겨온 카메라를 품에 안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안 가겠다니까, 나 혼자 다시 간다. 안 그럼 오늘 궁금해서 잠 안 와."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품에 안은 동화가 앞서 걷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덜떨어진 놈."
***
호기롭게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막상 정원에 다다르니 조금 겁이 나는 동화다.
정원에서 멀찍이 떨어져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였다.
그냥 돌아갈까..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커서 결국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꺼내 든 동화는 찰칵 셔터를 눌렀다.
확인한 사진엔 여전히 그 사람이 찍혀 있었다.
옅은 녹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한 여자. 어쩐지 무심한 표정에 지루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녹빛 눈동자.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정원은 텅 비어 있었지만 사진엔 또렷이 저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가 찍혀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동화는 굳은 결심을 한 듯 콧김을 흥 내뿜으며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걸어가 벤치에 털썩 앉은 동화는 당차게 걸어왔던 그 태도와는 달리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맛보며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어쩐지 주변이 차가운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 같았다.
쭈뼛쭈뼛 그 소름 돋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떤 동화가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 놓았다.
"그, 그, 그러니까.. 호, 혹시.. 귀, 귀.. 그, 그거시면...음..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턱이 덜덜 떨려와서 본의 아니게 말을 더듬거리던 동화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손으로 이렇게, 오, 오케이 사인을 해요. 알았죠?"
갈 곳 잃은 동화의 시선이 허공을 떠돌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사진이 찍혔었으니 몸을 틀어 비어 있는 벤치의 사진을 찍었다.
"후.."
긴 한숨과 함께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확인하는 동화.
그리고 사진기에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구부리고는 뚱한 얼굴로 렌즈 쪽을 응시하는 그녀가 찍혀 있었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동화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대애애애박.'
귀신이라는 존재. 두려움에 창자가 배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존재와 지금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사진의 상황이 짜릿해서 소주를 병나발 불어 감각이 둔해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취기가 올라와 피부에 겉 껍데기가 한 겹 더 생긴 것 같은 느낌.
'나 지금 귀신이랑 말하고 있는?'
다시 침을 꼴깍 삼킨 동화가 여전히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
또다시 학교란 곳까지 쫓아온 그녀때문에 솔은 이제는 익숙한 몸짓으로 작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루한 것은 지루한 것이지만.. 이곳의 벚꽃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 감각도 잊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솔은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와 벤치에 털썩 앉는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여긴 학생들이 잘 안오는 곳이라고 했는데..'
내버려 두면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벚꽃을 바라보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 그러니까.. 호, 혹시.. 귀, 귀.. 그, 그거시면...음..아!"
슬쩍 곁눈질한 옆자리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동글동글한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가 앉아서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말거는 거야?'
"손으로 이렇게, 오, 오케이 사인을 해요. 알았죠?"
'지금은 내가 안 보일 텐데?'
의문점은 뒤로하고 카메라를 드는 그를 보며 솔은 귀신이라고 하면 도망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도망가기는 커녕 부들부들 떨며서도 더듬더듬 계속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 저기 그럼.. 귀신이라면.. 주, 죽.. 아니 그.. 돌아가신.. 근데 왜 여기 계세요?"
미간을 찌푸린 솔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이 학교 학생이었어요? 아님 이 학교 수능 쳤다가 떨어진.. 아, 아니. 이건 아니지."
계속해서 나불거리는 그를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쳐다보던 솔이 천천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승에 미련이 남아서 승천하지 못한 영혼이 귀신이라던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여기 있는 거예요?"
나불나불나불. 아주 시끄러운 남자다.
미간을 좁힌 솔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정원에서 멀어져 갔다.
'귀찮아.'
***
"헐."
"대박."
길거리를 다니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저도 모르게 외마니 감탄과 함께 입을 떡 벌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곳.
길게 늘어트린 반짝이는 은발이 어두워진 저녁 하늘 아래에서 은가루라도 뿌린 듯 사정없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시선들이 뿌듯한 듯 희미하게 입가에 머금은 그 미소가 아름다운 외모를 더욱 빛나게 했다.
자체발광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이 맛에 유희를 관둘 수가 없지.'
이 길 위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이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눈빛. 홀딱 반한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 넋을 놓고 바라보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휘는 더욱 아름다움을 뽐내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은빛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손짓 하나하나가 어찌나 매혹적인지 힐끔거리며 지나치던 이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춰 설 정도였다.
그렇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휘의 눈에 정면에서 넋을 놓고 걸어오는 노란 머리통이 보였다. 생각에 잠긴 듯 딸만 보며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것을 보니, 자신을 아직 보지 못하여서 이러한 반응일 뿐 발견한다면 넋을 놓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툭.
"아, 죄송합니다."
어깨를 툭 부딪히자, 동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만 던져 놓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자리에 멈춰선 휘는 서 있는 것도 힘에 겨운 듯 휘청거렸고, 근처를 서성이던 여자가 냉큼 다가가 부축했아.
그저 어깨를 살짝 부딪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려던 것 뿐이었는데.
부딪히는 짧은 순간 빛이 일렁이는 가 싶더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놀란 눈으로 자신과 부딪힌 남자의 뒷모습을 쫓던 휘는 자신을 부축한 여성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떼어냈다. 붉게 물든 얼굴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위태로운 걸음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짧았던 접촉의 여운을 느끼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던 여자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다시 가던 길을 갔다.
***
휙휙. 주변을 둘러본 동화는 괜스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보며 방으로 들어서 서둘러 문을 닫았다. 슬그머니 방을 둘러본 동화는 잠시 그대로 서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안심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호기심을 해소한 것까지는 좋은데.. 무서워서 잠을 못 잘 것도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데 어느새 사진에 찍히던 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굉장히 실례되는 것들을 물은 듯한 불길한 기분.. 혹시라도 쫓아와 해코지 하는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동화는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잠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동화는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아- 씻고 일찍 자야겠다."
따끈한 물에 씻고 나면 좀 개운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지개를 펴며 동화가 욕실로 모습을 감추자, 소리도 없이 동화의 방에 침입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동화에게 부딪혔던 휘였다.
휘는 동화가 소파에 내려놓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앗.
뻗어진 휘의 손을 튕겨낸 카메라. 가느다란 손가락을 훑으며 휘가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감히 자신의 아름다운 손을 튕겨낸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다시 손을 뻗어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못마땅한 것이 아닌 곤란함과 불안함이 떠올랐다.
접촉은 한순간이었다.
심지어 직접적인 접촉도 아니었지만 이제와서 한탄 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휘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았다.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다시 명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할 것이다.
카메라를 앞에 놓고 고민하는 사이, 씻으러 들어갔던 동화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연기처럼 모습을 감춘 휘는 덜 마른 머리를 흔들며 나와 소파에 털썩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여유를 부리는 동화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보이지 않나 보네.'
이 아이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였다. 귀신을 볼 수도 없는 아이라면 자신의 힘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동화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오늘 정원에서 찍었던 사진을 다시 한번 보려던 것이었다.
"어이."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번쩍 고개를 든 동화는 자신밖에 없는 텅 빈 방을 넋 놓고 바라보다 괜스레 오싹한 기분에 잘못 들은 것이라 스스로를 달래며 어쩐지 떨려오는 손으로 든 카메라를 다시 바라봤다.
"어이."
하지만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화는 버튼을 두르던 손가락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도 분명 홀로 있었을 것이 분명했던 방에 문열리는 소리도 없이, 아니 집에 들인 기억이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
길게 은발을 늘어트린 키가 큰 남자가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