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요즘 세상이 살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절 어떻게 해도 아무런 이득이 안될 거예요!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죠!!"
휘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탄이 아닌 괴성을 질렀던 데이 기분이 상했다. 그랬는데, 그런 와중에 이 노란머리 애송이는 무언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무심코 인상을 찌푸리려다, 행여 생길 리 없는 주름이라도 생길까 미간을 곱기 피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우아한 몸짓으로 가볍게 뛰어올라 허공에 걸터앉았다.
"....."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길게 흐트러졌던 은발을 쓸고 지나가자, 그제야 동화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걸터앉았다. 잘못 보고있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닐 테다.
'아니.. 설마 꿈인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동공으로 휘를 가만히 바라보던 동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끝내주세 잘생기셨네요."
동화의 작은 중얼거림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휘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과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미소였다.
"자, 일단.."
빛나는 은발을 흐트러트린 휘가 조금 전의 미소와는 상반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화를 바라봤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건지 말해 봐."
"...예?"
어리둥절한 동화가 멍청한 얼굴로 되묻자, 휘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동화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가리켰다.
"그거. 네가 가진 그 이상한 물건이 내 힘을 다 흡수했어."
슬쩍 시계를 들여다본 휘가 말을 이었다.
"서둘러서 돌려주지 않으면 위험해. 곧 정월 16일이 끝나니까."
".......예?"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한 동화는 도대체 눈앞에 나타난 장발의 끝내주게 잘생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늘 16일 아닌데.. 정월은 또 뭐야?'
여전히 혼란스러움만 내비치는 동화에게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본 휘가 신경이 곤두서는 듯 기어코 눈매를 찡그렸다.
"어쨌든 서둘러 줘. 안 그럼 일이 복잡해지니까."
"...그러니까 저는 뭘 하면..?"
바보같은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는 동화의 태도가 슬슬 짜증이 나는지 고운 미간을 살포지 찌푸리며 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카메라가 흡수한 내 힘만 돌려놔! 시간이 많지 않다고!"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왜 못해? 그런 물건을 소지하고 있으면 다른 힘은 얼마든지 모을 테니까 내 힘은 돌려줘."
"아니 그러니까!!!"
동화가 답답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곧게 펴 카메라를 가리켰다.
"이 카메라가 뭘 어쨌는 지는 몰라도 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요!"
이에 휘의 눈이 당혹감과 함께 크게 떠졌다.
"뭐?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왜요! 모를 수도 있죠!!"
"그럼 난 어쩌라고!!"
"그걸 왜 저한테 그러세요! 스스로 알아서 하세요!!"
신경질적인 동화의 말에 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끌어 올린 입꼬리가 고운 선을 만들어내며 휘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여서 동화는 문득 자신이 난데없이 나타나 허공에까지 앉아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짜증을 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등골이 오싹해져 부르르 떨었다.
"그럼 내가 널 어떻게 해도 너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지?"
"...예?"
*
"사진을 찍어보면 어떨까요?"
무릎을 꿇고 앉은 동화가 소파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다리를 꼬고 앉은 휘에게 물었다.
"그건 아까 해봤잖아."
"이걸로 셀카를.."
"내가 못 만지잖아."
잠시 고민하던 동화는 한손에는 카메라를, 다른 손에는 휘의 손을 잡았다.
"..뭐하냐 너."
"뭐, 뭐라도 해보려고.."
깊은 한숨을 내쉰 휘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방법은 없었다. 오늘안에 힘이 회복되지 않으면 명계로 돌아갈 수 없거늘.
아마도 힘들 모양이다. 하지만 명계에 기별도 없이 갑자기 잠적하면 일이 너무 커질 테니 방법이라고 한다면..
"너. 이건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뭐라도 해야 돼."
"..예..?"
***
휘오오오오
괜스레 바람이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폐가. 동화는 덜덜 떨며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나마 한밤중이 아니라 이렇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동화는 심호흡을 하며 굳게 마음을 먹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주변을 빙 돌며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은 동화는 구석진 곳에서 벌벌 떨며 사진을 확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에 귀신은 없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동화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미친듯이 폐가에서 도망쳐 나왔다.
일이 어찌된 고 하니.
그날 갑작스레 집에 나타나 허공에 걸터앉던 끝내 주게 잘생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야광귀'라고 한다. 혹시나 해서 초록창에 검색해 보았지만 인터넷에 나와 있는 뜻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자신을 저승의 길목에서부터 명계의 입구까지 영혼들을 천도하는 이라고 했다.
자신을 빛냄으로써 길 잃은 영혼들을 이끌어 주는 존재라던가.. 과연 빛이 나게 잘생기기는 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그는 정월 16일이라는 날에 유희를 즐기러 지상에 내려오는데, 그날 하필이면 길에서 부딪혀 카메라가 그의 힘을 대부분 흡수했고, 힘을 잃은 그는 명계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음 정월 16일을 기다려야 하는 그는 명계에 소식을 전하기라도 하려면 조금이라도 힘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 말과 함께 이상한 죽통 같은 것을 건네며 거기에 귀신을 모아오라고 했다.
그는 본래에 길을 잃은 영혼을 천도하는 이. 그러니 귀신이 이승에 남아 있으며 가졌던 힘을, 귀신을 승천 시키고 자신이 흡수하여 하루라도 빨리 명계에 소식을 전해야 하니 이 일에 책임이 있는 자로서 시키는 일을 하라는 것.
그리하여 동화는 인터넷으로 귀신이 나온다는 폐가 같은 곳을 찾아 다니며 휘가 가르쳐준 대로 사진을 찍어 귀신이 있는지 확인하고 귀신이 있다면 죽통의 뚜껑을 열어 그곳에 던졌다. 그러면 귀신이 죽통에 흡수되고, 그저 그것을 휘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폐가를 나선 동화는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것을 느끼며 이런 식으로는 절대 휘가 원하는 만큼의 귀신을 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동화는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훑으며 괜스레 으스스한 느낌만 주는 사진들을 전부 삭제했다.
'그나저나.. 산 사람은 찍히지 않는 카메라라니..'
할아버지도 참.. 말도 안되는 물건을 보내셨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넘기는데, 눈에 띄는 사진 한 장.
학교 정원의 그 여자 사진이다.
"크흠.."
아무도 없는데 눈치를 보며 서둘러 사진을 넘겼다.
스스로를 귀신이라고 했었지만.. 어쩐지 그녀를 휘에게 넘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방금 그 사진 뭐야."
"으아악!!!"
갑작스레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화는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한 카메라를 더욱 꼭 움켜쥐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소린 지르고 그래? 내 얼굴이 어디 가서 그런 반응을 받을 만한 얼굴은 결코 아닌데."
시큰둥한 표정의 휘가 동화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방금. 오늘 갔던 데는 수확이 없나?"
"아무것도 없었어요."
짧은 한숨을 뱉은 휘가 곤란한 듯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 모습마저 너무나 고결해보여서 아마 지금 있는 곳이 인적이 드는 길가가 아니라 강남 한복판이었으면 누군가 한사람은 마음 먹고 다가와 번호를 물어봤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되겠어? 적어도 다음 보름달 전까지는 내가 말한 양을 다 채워야 한다고."
그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귀신 10명분의 힘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자연적으로 힘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것까지 계산해서 보름달이 뜨는 날까지 그만큼을 받아야 가능해진다고.
그렇기에 저런 소름끼치는 폐가를 살펴보는 것만 벌써 네번째. 딱히 이렇다할 수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폐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귀신을 발견해서 이제 한 명.
'아무리 이 이상한 카메라가 있다고 해도.. 10명을 무슨 수로 채워..'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동화를 보며 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힘들면 네가 대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윽.."
질색하게 만드는 휘의 말에 동화는 얼른 얼굴에서 근심을 지워냈다.
'산 사람은 어차피 못 데려가지만.'
속내를 숨긴 휘가 코피 터지게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근심은 지워냈지만 여전히 한숨을 막을 수 없는 동화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직 창창한 대학생이랍니다."
"어차피 인생 살아봐야 수심만 가득하다. 돈, 돈, 돈. 그럴 바에는 돈이 없는 명계로 나쁘지 않아."
장난기 품은 휘의 말에 동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아직 안 살아봤는데 진짜 그럴지 어떨지는 모르잖아요. 전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픽 웃은 휘가 동화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뭐야.. 자기가 데려가려고 해놓고..'
뚱한 얼굴로 휘를 힐끔거리던 동화는 행여나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며 괜한 해코지를 하기 전에 얼른 표정을 풀고 길을 걸었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사와."
"예?"
그 말 만을 남긴 휘는 허공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건 분명 걷기 귀찮아진 것이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사람이니까. 아니, 사람이 아니던가.
'귀신은 편하구나..'
정월 16일. 일명 귀신날이라고 불리는 그의 유희날 이후, 그러니까 동화의 카메라 때문에 명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후로 휘는 동화의 자취방에 기거하며 그날그날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하거나, 방금처럼 불쑥불쑥 나타나 놀라는 동화를 구경하거나,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타의로 명계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승에 남은 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휘의 말에 의하면 힘을 흡수해버린 그 카메라는 정말 신기하게도 산 사람이 찍히지 않는 카메라라고 했다. 즉, 카메라에 찍힌 사람 형태를 한 모든 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 카메라가 멋대로 휘의 힘을 모두 빼앗은 바람에 이렇게 폐가를 전전하고 다니는 것이지만..'
한숨과 함께 길을 걷던 동화는 얼핏 시야에 스친 오묘한 색깔에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사람들 틈 사이에 얼핏 그친 연한 녹빛 머리칼. 이제껏 본 것 중에 유난히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녀.
놀란 동화는 두 눈을 부비적거리고는 다시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딱히 시선을 끄는 머리색은 없었다.
"잘못 봤나.."
요즘 귀신 생각에 자꾸만 학교 정원에서 보았던 그 여자 귀신이 떠올라 아무래도 헛것을 보았겠거니 싶은 동화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sns를 활용하면 귀신이 좀 모이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귀신을 모으는 방법을 강구하던 동화는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을 잊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
"야, 너 요새 수업 끝나고 어딜 그렇게 다니냐?"
"어?"
핸드폰으로 귀신이 나온다는 장소를 뒤지던 동화는 시완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그런 그의 이상 행동에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짙어졌다.
"뭐냐. 심히 수상한데."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동화는 대놓고 시완의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휘에 대한 것도, 폐가에 귀신을 찾으러 다니는 것도, 무엇 하나 시완의 화를 돋우지 않을 것이 없었다.
헛소리라며 믿어주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사기당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쫓아올 것이 뻔했다.
하지만 어떻게 사기라고 하겠는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귀신을 요구하는 데다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허공에 붕 떠서 앉아있기까지 하는데.
한참이나 의심의 눈초리로 동화를 노려보던 시완은 더 이상 자신의 골칫거리가 늘지 않기를 바라며 동화의 바람대로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은결이가 오늘 좀 보자던데."
"멍멍이가? 왜?"
"고민상담."
시완의 말에 동화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고민 상담?"
"응. 요새 어떤 이상한 여자가 쫓아다닌다던데."
"뭐? 그게 왜 고민이야. 감사할 일이지."
한심하다는 얼굴로 동화를 바라보던 시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이 말한 문장에서 '이상한'이라는 단어를 듣지 못한 건지 인지하지 못한 건지.
도대체 어떤 여자가 은결을 쫓아다니는지 궁금해진 동화가 어서 가자고 시완을 재촉하려던 찰나.
지이잉. 핸드폰에 진동이 울려왔고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떡볶이랑 순대 사와]
휘에게서 온 문자였다. 매년 유희를 즐기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냈던 탓에 인간들의 문명에 아주 익숙한 휘였다.
동화는 잔머리를 굴려 이따가 들어가면서 사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으려는 찰나.
[지금]
마치 지켜보고 있기다로 한 것처럼 다시 도착하는 문자. 아니, 진짜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동화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는 시완에게 말했다.
"미안. 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다. 멍멍이한테는 내일 가볼게."
"ㅇㅇ. 그러던가."
요만큼의 아쉬움도 없이 보내주는 시완에게 어쩐지 서운함을 느끼며 동화는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걸음을 옮기며 인스타에 귀신을 잡아준다는 홍보를 하며 한숨을 내쉰 동화가 다시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걸 본다면 시완이 또 기겁을 하고 달려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자신을 짤짤 털 것이 훤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엇고, 제보를 받는 것이 일을 끝내기에는 더욱 유용한 방법이었다.
터덜터덜 순대와 떡볶이를 사기 위해 학교를 벗어나려는데, 동화의 시야 한끝에 독특한 머리칼이 감지되었다.
전에 길가에서 얼핏 보았던 바로 그 녹빛. 학교 정원 벤치에서 사진에 찍힌 그 귀신의 건과 같은 머리색.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냅다 달려간 동화는 홀린듯이 긴 녹빛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걸어가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돌아선 그녀의 얼굴을 본 동화는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