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면 이상한 일이 생기고는 한다.
정말 말도 안되게 차가 쌩하고 달려 물웅덩이가 튄다든가.
그리 깊지 않을 것이 분명한 물웅덩이를 밟았는데 발이 흠뻑 젖는다든가.
새로 산 우산이 바람 한점 불자 휙 뒤집혀 비에 쫄딱 젖는다든가.
흔히 사람들이 '재수가 없어서' 생기는 일이라 치부해버리는 그런 일들.
하지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그런 일들 덕분에 더한 사고를 피했다고 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믿을까?
***
'그슨새야.'
그렇게만 설명한 솔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뒤돌아 가버렸다.
집에 돌아온 동화는 휘에게 그슨새라는 귀신에 대해 물었다.
"비가 오는 날 나타나는 어린 귀신이야."
그들은 비가 오는 날, 조금만 조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짓궂은 장난으로 더 큰 사고를 방지하기도 한다고 휘는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장난을 그날 조금 조심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친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려는 걸까?
노란 우비에 노란 장화. 휘가 설명한 그들의 겉모습은 그러했다.
동화는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살피며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봄인데 일기예보에 이번주는 내내 비가 온다고 되어있다.
비가 오면 또 그 귀신이 나타날까?
파전도 막걸리도 사오지 않았던 동화가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휘는 동화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슬쩍 보고는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오래 놔두면 악귀가 되기 마련이야."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에야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동화가 휘를 바라봤다.
"예?"
"지금은 큰 사고를 막아주는 착한 아이들일지라도 오래 놔두면 악귀가 되기 마련이라고. 그슨새는 어쨌든 비가 오는 날 다른 이의 손에 희생된 아이들이니까."
휘는 동화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다 알고 있는 듯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람들을 구해주는 귀신이라면 그냥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동화는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 사고를 막아주는 거라는 걸 안다면 그런 작은 장난 정도는 웃으면서 넘길 테다.
귀신이라고 하여 잡아서 휘에게 넘기기엔, 그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예?"
"너라면 널 죽인 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원망하지 않을 자신 있어?"
동화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일기예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못했을 것 같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사람들을 보호하기 보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이를 원망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응징하기를 바랬겠지.
다시 긴 한숨을 내쉬는 동화의 머리를 휘가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에 물들어. 그 아이들한테는 여기보다 명계가 더 편안한 안식처가 될 거야."
동화가 다시 고개를 들어 휘를 바라봤다.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명계에는 돈도 명예도, 인간들이 집착하는 그 무엇도 다 소용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누군가를 보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휘가 그들을 천도시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제일 좋은 안식이 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듯 입을 다물고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동화를 보며 휘가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나가서 파전이나 사와."
..이 야광귀는 진짜 분위기 파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
"청랑님."
부드러운 옅은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전날부터 시작된 빗줄기는 차츰 줄어들었다, 다시 굵어졌다를 반복하며 그칠 기미 없이 내리고 있었다.
솔의 부름에 나뭇잎에 맺히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산속의 작은 정자. 사람은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곳.
언젠가는 존재했던 산이자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산.
이제는 이 산도 그 크기가 많이 줄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꾸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사라져갔다.
산을 둘러보던 청랑이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그만 갈까요?"
청랑의 물음에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솔이 그녀의 물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그슨새는.. 결국 사람을 해치게 되죠?"
솔의 질문이 의외인 듯 청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이 아주 오래전과 변함없이 고왔다.
청랑은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빙그레 웃고는 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기한 일이네요. 솔님이 그런 것들에 관심을 다 갖고. 그때 만났던 그 '아는 사람' 때문인가?"
솔은 청랑이 꺼낸 얘기에 괜스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아 거짓말을 못하는 그녀이기에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들 역시 사람이 만들어낸 존재. 서로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살폈더라면 그들이 생겨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 그슨새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정당하다 보십니까?"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던 솔이 돌아온 의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랑은 탐스러운 입술을 곱게 휘어 미소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존재가 무엇이든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을 어찌 정당하다 하겠습니까. 다만 인과응보의 두려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슨새와 같은 존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벌하는 것은 명계의 일이니, 그슨새와 같은 존재는 구태여 손을 더럽히지 말고, 본디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다면 벌을 받는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일.
솔은 청랑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란 인간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영혼이 맑은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 죽은 이가 되어서도 산 사람을 돕지 않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들이 안식을 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린시절 이후로 줄곧 어느 것에도 관여하지 않던 솔이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신선하여 청랑은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
빗줄기가 굵어지면 한차례 거리로 나와 노란 장화에 빗방울을 튀기며 걸어 다닌다.
비를 맞지 않지만 늘 비에 젖어 있는 그들은 그슨새라 불리운다.
나이를 가늠케 하는 조그마한 몸집. 노란 우비를 뒤집어써 코까지 가려진 얼굴. 조그마한 손과,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발을 감싼 노란 장화.
하지만 이승을 떠도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개나리꽃처럼 노랗던 우비는 점점 색이 바래 검게 물들어간다.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이승을 떠돌면 위험하다는 일종의 신호.
비가 오는 날에만 나타나고 몸집이 작아 잘 숨는 덕에 명계에서 파견한 이들이 그들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먹구름에 가려 어두워진 탓에 거리에 나타난 그슨새 하나의 우비가 더욱 어둡게 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웃지도, 거리를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찰박찰박 빗길을 거닐 뿐.
색이 많이 바래 어두운 노란색과 검정색이 뒤섞인 우비.
그의 곁을 빗속을 뚫고 속도를 내 달리는 차 한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숙여 빗길을 내려다보며 걷던 우비가 빠르게 멀어져 가는 차 뒷면을 보며 조금 더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
카메라용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동화가 우산을 단단히 쓰고 학교로 향했다.
비가 오니 혹시나 목소리가 들려올까, 하고 카메라를 챙긴 것이다.
시완과 은결의 추궁에 대해 휘에게 물은 결과, 카메라에 관해서는 무어라 얘기해도 상관 없지만 휘에 관해서는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시완은 카메라에 관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결국 SNS계정에 올린 글에 대한 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적다.
거짓말도 못하는데 추궁해올 시완을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동화는 그냥 말할 수 있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고민하는 것도 피곤했기에.
"그래서."
물론 그걸 들은 시완의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네 그 이상한 카메라 때문에 지금 누가 네 자취방에 얹혀살고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뜬금없이 귀신 타령했던 것도 그 사람 때문이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동화가 횡설수설 떠들어댄 말을 시완이 간단하게 정리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화를 보며 시완은 더욱 미간을 구겨야 했다.
"그 사람 사기꾼 같은 거 아냐?"
예상했던 말이 나오자 동화는 그것만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사기꾼이냐 의심을 할 수가 있을까. 돈이 아닌 귀신을 요구하는데 말이다.
고개를 젓는 동화를 보며 시완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기꾼이라기 보다는 미친놈이 맞을 거라며.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는 듯 하여 동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강의가 끝난 후였다.
"나도 가자."
"응?"
"네 자취방."
자취방에 눌러앉은 그 미친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것이 시완의 주장이었다.
"그, 근데 난 오늘 볼일이.."
"뭔데. 그럼 나 먼저 방에 가 있는다?"
잠시 고민하던 동화는 정말로 먼저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하려는 시완을 다급히 붙잡았다.
"아, 아냐 그래.. 같이 가자."
한숨을 폭 내쉰 동화가 우산을 펴 들고 앞장 섰다.
아직 봄인데 비가 이렇게 온다며 투덜거리는 시완을 뒤로하고 동화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어깨에 둘러멘 카메라 가방을 꼭 쥐었다. 혹시라도 그슨새의 목소리를 놓칠까 귀기울여 주변 소리에 집중하며 걸었다.
추적추적 빗길을 걸으니 어쩐지 사람이 감성적이 된다.
그슨새는 비가 오는 날이면..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나.. 빗길을 위험하게 달리는 오토바이.
이런 것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직 면허가 없었지만 후에 만일 면허를 따게 되도 절대로 비 오는 날 빠르게 달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동화였다.
[안돼.]
주위에 들려오는 다른 소음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동화의 자취방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사방이 시멘트인 커다랗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한 말처럼 웅웅 울리는 듯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카메라 가방을 꽉 움켜쥔 동화가 목소리가 들려오자 걸음을 멈췄다.
[그만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동화의 망설임은 짧았다.
"시완아, 먼저 방에 가 있어. 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금방 갈게!"
그리고는 시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뛰었다.
[계속 그러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뚜렷이 들려왔다.
[벌을 받을 거야.]
갑작스레 확연히 가까워진 목소리에 동화가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동화 앞으로 편의점을 나선 한 남자가 우산을 쓰고 지나쳤다.
[빨리 달리면 안돼. 위험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의 곁에서 확연히 들려오는 그슨새의 목소리.
동화가 남자를 시선으로 쫓자, 그는 곧장 인도를 가로질러, 세워 놓았던 차에 올라탔다.
[비가 오잖아! 위험하단 말이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방금 차에 올라탄 그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들었던 목소리는 줄곧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는데, 이번만은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목소리였다.
'화를 내기 시작하지.'
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어린아이들 그 자체. 장난을 침으로써 큰 사고를 막아주는 아이들.
그슨새가 점점 악귀로 변화하는 시점. 바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화난 듯한 그슨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동화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주차되어 있는 차로 다가가 창문을 두들겼다.
비가 오기 창문을 아주 조금 열은 그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동화를 바라봤다.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동화는 횡설수설 말을 꺼내 놓았다.
"저기.. 운전 조심하세요.. 비도 오고, 빗길에 위험하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운전해주세요. 부탁드릴 게요."
"예?"
동화의 말에 남자는 눈에 띄게 얼굴을 구겼다.
"위험하잖아요. 비도 많이 오고..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운전해주세요."
남자는 헛웃음을 뱉아내고는 창문을 닫았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짜증스런 한마디를 남긴 남자는 보란듯이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미친놈처럼 말했다 싶은 동화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걱정스런 얼굴로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동화의 귓가에 발끝부터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목소리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벌 받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