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학교란 곳에 가십니까?"
"하하. 그렇게 싫으면 굳이 이렇게 매번 동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님."
"그건 안되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어딘가 심란한 기분이 드는 것을 무시한 솔이 청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앞에 빠르게 달려가는 검게 물들어가는 우비를 쓴 그슨새와 그 뒤를 쫓는 듯 보이는 동화가 나타났다. 그를 발견한 솔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청랑님, 저는 잠시.."
"예. 편히 다녀오세요."
끝까지 말을 듣지도 않은 청랑이 곱게 입술을 휘며 솔을 배웅했다.
그녀의 허락을 기다렸던 듯 솔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즉시 달려나가는 동화를 쫓아갔다.
***
잔뜩 증오로 물들은 듯한,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소름이 끼친 동화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벌거렸다.
"잠깐.. 잠-"
보이지도 않는 그슨새를 찾으려 걸음을 내딛던 동화는 갑작스레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이에 의해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뭐해?"
우산을 받쳐들고 나타난 것은 솔이었다.
긴 녹빛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오늘은 또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솔을 발견한 동화가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 그슨새가 보인다고 하셨죠? 지금 어디 있어요? 이 근처에 있을텐데.."
솔은 점점 더 검정색으로 짙어 지는 우비를 힐끔 바라봤다.
아까 보았던 것처럼 달려가거나 하지 않고, 차가 출발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오래 두면 위험해질 것이다.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게 좋아."
돌아온 솔의 말에 동화는 눈썹을 늘어트렸다.
"..왜요?"
"좋지 않은 상태야. 관여하지 않는게 좋아."
솔이 말한 '좋지 않은 상태'가 휘가 말했던 악귀로 변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아서 동화는 더욱 미간을 좁혔다.
"왜요? 좋지 않은 상태면 도와야 하잖아요. 왜 말려요?"
이번에야말로 동화의 눈빛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 적에도 보이지 않았던 눈빛.
솔은 그 눈빛을 마주하자 붙잡았던 동화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악귀로 변하면 명계로 가도 벌을 받는다고 했어요. 짓궂은 장난이었지만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게 해준 거잖아요. 아무 잘못 없는 어린애잖아요.."
동화는 가방에서 휘에게서 받은 죽통을 꺼내 들었다.
"악귀가 되기 전에 여기에 넣으면 천도 시킬 수 있을 거예요."
솔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동화가 내민 죽통을 바라봤다.
"어디 있는지 보이면 말해줘요. 제가 할 테니까."
가방 속에 들고 있던 요상한 물건이 귀신을 담는 거였구나..
죽통을 내려다보던 솔이 다시 동화를 마주봤다.
동화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고집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린애를 외면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
철컥.
동화의 집으로 들어선 시완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관부터 내부를 둘러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부적 같은 건 없네.'
귀신을 들먹이는 걸 보니 사기꾼이 아닌 미친놈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부적을 팔아먹으려 들러붙는 사기꾼 점쟁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부적이나 이상한 물건은 딱히 없었다.
딱히 뜯어갈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다 이상한 사람이 꼬였는지 참..
탐탁치 않은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며 안으로 들어선 시완은 고고한 자태로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있는 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어렵게 발견하기에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빛이 날만큼 아름다운 존재.
"....."
"....."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시완을 올려다본 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얜 뭐야?'
그리고 시완은 당신이 동화의 자취방에 눌러앉은 사기꾼이냐고 다짜고짜 판을 벌일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꾹 참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럽게 잘생겼네.'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은 시완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동화 친구 차시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입수를 곱게 휘며 세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아, 동화 친구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동화는 아직 안 왔는데 앉아서 기다릴래?"
무표정일 때도 잘생겼지만 웃으니 정말 빛이 나는 듯 했다.
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완벽한 한사람을 만들었다면 그게 이 사람일 것만 같았다.
"근처에 있을 거예요.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고 했거든요."
"볼일?"
돌아온 시완의 대답에 휘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전날 그슨새에 대해 묻던 동화를 떠올리고는 잠시 고민하던 휘가 물었다.
"지금 밖에 비 오나?"
시완은 창문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걸 굳이 묻는 휘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소를 지웠던 휘는 이내 다시 친절한 얼굴을 가장하고는 말했다.
"무슨 일인지 내가 가봐야겠네. 잠시만 기다릴래? 내가 금방 데려올게."
***
"직진."
"아저씨 직진이요!"
택시를 잡아탄 솔과 동화는 그슨새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차를 뒤쫓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차를 쫓는 그슨새를 쫓고 있었다. 동화는 귀신이 보이지 솔의 지시에 따라 그슨새를 쫓았다.
절대로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울상을 짓는 동시에 그슨새를 놓치면 안되니 초조한 얼굴로 재촉하는 동화 때문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는 택시기사 아저씨는 괜한 손님을 태웠다며 깊이 후회했다.
솔이 일러주는 방향으로 택시를 타고 뒤쫓던 두 사람은 이내 도로위에 찢어질 듯이 울려 퍼지는 아주 불길한 소리를 듣게 된다.
끼이이이익!!!!
바퀴가 빗길에 미끄러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절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음이 귓가를 찌르고, 도로위를 빙글빙글 돌던 자동차 한대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아이고! 사고가 났네! 총각! 얼른 119 불러! 얼른!!"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에 동화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하며 서둘러 119에 전화를 했다.
"가까이 가서 세워주세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솔이 굳게 입을 다물고 말을 바라봤다.
본네트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택시에서 내린 동화와 솔은 단번에 사고가 난 차량에 다가갔다.
그는 동화가 그슨새를 뒤쫓다 마주한 편의점에서 나왔던 그 남자였다. 그슨새를 화나게 만든.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웅성거림 사이로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쓰러진 남자가 보였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는 동안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의 손에 의해 차에서 구조된 운전자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다.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차츰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가로수에 들이받은 차량 옆에 검게 물들어 가는 노란 우비.
솔은 말없이 그 우비를 바라봤다.
"어떡해.. 많이 다쳤을까요?"
울상을 짓는 동화가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는 솔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저, 저기.. 솔.."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고민하던 동화가 표정이 무섭게 가라앉은 솔의 눈치를 살폈다.
"저, 솔..님..?"
어쩐지 '님'자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험악하게 얼굴을 굳힌 솔이 한곳을 계속해서 노려보자, 의아한 얼굴로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동화가 카메라 가방을 꾹 움켜쥐었다.
솔이 저지할 새도 없이 카메라를 꺼낸 동화가 솔이 노려보는 곳을 렌즈에 담았다.
찰칵.
짧은 소음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 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
막으려 했지만 이미 동화는 사진을 확인한 후였다.
보지 않기를 바랬다. 검게 물든 저 아이의 뒷모습을.
노란색이었을 우비는 어느새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사고 난 차량을 바라보는 그 뒷모습은 어쩐지 다른 악귀들이 그러하듯이 불길하다거나, 음침하다거나, 악의 구렁텅이 같은 느낌은 없고 그저 슬퍼 보였다.
우비가 검게 물든 것은 어쩌면 개나리꽃처럼 노랗게 피어난 저 아이들의 마음을 할퀴고 상처 내어 저렇게 변한 것일 지도 몰랐다.
사진에서 시선을 뗀 동화가 그슨새가 서있을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나지막하게 귓가에 울려오는 목소리에 동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검게 물들기 전에 휘에게 전해 천도 시키고 싶었다.
만약 그슨새가 눈에 보였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만약 그 남자를 조금 더 강하게 붙잡아 운전하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목소리가 들리게 해주고, 사진도 찍히는 카메라. 휘에게 받은 귀신 담는 통.
모든 것이 제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기분에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여기 있었네."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타난 은은히 빛나는 은빛 머리칼.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우산 없이 나타난 휘.
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더니, 검게 물든 아직 작기만한 뒷모습을 응시했다.
본네트에서 피어 오르는 매캐한 연기에 그 뒷모습이 흐려졌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했다.
그가 동화의 머리를 대충 헝클고는 슬쩍 밀어냈다.
갑작스런 등장에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보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달빛 같은 머리를 늘어트리며 검은 뒷모습에 다가간 휘가 무릎을 굽히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췄다.
"아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동화는 의외라는 듯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정말 그가 길 잃은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검은 기운이 피어 올라 만지기 꺼려지는 검은 우비를 스스럼없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