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벌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동화에게 휘는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던 두 사람 사이에 딱히 대화는 없었다.
돌아가는 내내 그 질문을 건넨 것을 마지막으로 동화는 입을 다물었다.
휘는 동화에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지 않았기를 바래야지."
사람을 해친 것으로도 이미 명계로 천도 후에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빼앗은 죄는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저 그 작은 뒷모습이 해쳤던 사람이 살아있기를 바래야 한다고.
"....."
집으로 돌아온 후 줄곧 말없이 고개만 떨어트리고 있는 동화를 시완이 불편한 얼굴로 응시했다.
어째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보다 더 우울해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앉아있어도 별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시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에 다시 올게."
시완이 돌아가고도 한참동안 동화는 아무 말없이 소파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그렇게 있었다.
침묵 속에 스스로를 가두듯이.
***
동화가 다시 기운을 차린 건,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나서였다.
아니, 기운을 차렸다기보단 과제와 시험에 치여 정신없이 지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도서관?"
"응."
대답하는 것도 지치는 듯이 턱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을 자랑하며 동화와 시완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과제를 다 불태워버리고 싶은 기분을 맛보며 공부를 하던 동화는 옆자리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와 멈칫했다.
"쟨 진짜 전생에 공부 못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독하다, 독해."
고개를 든 동화는 수군거린 학생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듣지 못하는 건지, 못들은 척 하는건지 꼼짝도 않고 공부하는 학생을 가만히 바라보다 동화는 슬그머니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너 뭐하냐?"
그러다가 눈썹을 치켜세운 시완이 묻자, 동화는 다시 조심스레 카메라를 내렸다.
"어, 아냐. 아무것도.."
귀신이란 단어에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다시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은 동화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아예 귀신 생각이 들지 않게 이어폰으로 소리를 차단한 채로 과제에 몰두했다.
"아,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동화가 도서관 밖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엔 어느새인가 늘 메고 다니게 된 카메라 가방이 있었다.
가방을 챙겨서 뒤늦게 나온 시완이 한층 퀭해진 얼굴로 동화에게 다가왔다.
"다 했냐?"
고개를 끄덕이는 동화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쉰 시완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직 다 못 끝낸 모양이다.
자라버린 머리가 시야를 가려 번거로워진 시완은 조만간 머리를 자르러 가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동화에게 말했다.
"야."
"왜."
"나 안 잊었다."
"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동화가 의아한 얼굴로 시완을 바라봤다.
"나 이거 다 끝내면 다시 제대로 그 인간 보러 간다."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동화는 시완이 말하는 '그 인간'이 휘임을 깨닫고는 곤란함에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간다."
시완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짧은 인사를 내던지고 걸음을 서둘렀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동화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휘 때문에 집에서는 과제를 할 수 없어 도서관에 머물다 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동화는 걷다 말고 솔을 만났던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없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동화는 그 정원으로 향했다.
어스름이 달빛이 비추는 어두운 정원은 낮보다 어쩐지 으스스하고 음산했다.
과연 학생들은 물론 교수님들까지 피해가는 정원이었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전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고 햇는데 그건 전부 솔이 그런 걸까?
문득 드는 의문에 의아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처음이야 무서웠는데 이제는 무섭다기 보다는 무거웠다.
고개를 젖혀 시야의 일부를 차지하는 나뭇가지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 일이야?"
화들짝 놀란 동화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벤치에서 솔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 동화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쪽이야말로 어쩐 일이예요? 없을 줄 알았는데.."
솔을 보고 마음을 추스른 동화가 다시 벤치에 털썩 앉았다.
시간도 늦었고, 어쩐지 당연하게도 없겠지.. 싶어서 확인도 안 했었다.
솔은 조금 전 동화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젖히며 답했다.
"그냥. 시간 때우기."
다시금 픽 웃은 동화가 다시 고개를 젖혀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원한 밤공기. 적막 속에 들려오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흩트려 놓는 소리.
이 순간이 어쩐지 너무나도 평온했다.
결국 검게 물들어버린 그슨새가 사람을 해쳤던 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솔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동화는 솔이 혹여 그 일에 대해 묻기 전에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 정원은 이상한 일이 생긴다면서 학생들도, 교수님들도 피하는 정원이예요. 귀신 들린 정원이라던데.. 그거 그쪽이 그런 거예요?"
웃음기를 머금은 동화의 말에 입술을 비죽 내민 솔이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원래 여기 있던 귀신은 이미 천도 했어. 이제는 아무 일도 안 생겨."
"아, 맞다. 도깨비라고 하셨죠?"
이번엔 대답대신 흠칫 놀란 솔이 사래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그 모습을 본 동화가 작게 웃었다.
고개를 번쩍 들어 기침을 하던 솔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동화를 흘겨봤다.
그러자 어깨를 으쓱인 동화가 말을 이었다.
"그냥요. 도깨비면 도깨비 방망이도 있나 궁금해서요."
입술을 툭 내밀며 흘겨보는 그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동화는 어쩐지 얼굴이 달아올라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괜스레 하늘만 올려다봤다.
대답없이 동화를 흘겨보기만 하던 솔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벤치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젖혀 동화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깨비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난 나무도깨비야. 소나무의 도깨비."
"나무도깨비요?"
"응. 나무도깨비는 나무와 함께 태어나. 그 나무가 수명을 다하면 작은 새싹을 남기고 죽지. 사람한테서 아주 간절한 마음이 담긴 물건을 받고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는 종족이라, 옛날엔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도깨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 서글픔이 어리자, 동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사람들이 나무를 많이 죽여서."
돌아온 솔의 대답에 동화는 눈썹을 늘어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님에도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이다.
그런 그를 힐끔 본 솔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좀 특별한 나무도깨비라 아직까지 있는 거고."
"특별해요?"
"응."
동화는 어떻게 특별한지 물었지만 솔은 웃을 뿐 그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못하는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고, 그를 아는 동화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사소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밤이 깊도록 함께 있었다.
공기는 시원했고, 밤하늘은 예뻤다. 물론 옆에 앉은 솔도.
그렇게 평온했던 시간은 왜 집에 돌아오지 않냐는 잔소리로 가득한 휘의 전화가 걸려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
밤하늘만큼이나 반짝이는 빌딩 숲.
저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찾아 이 밤을 헤매고 다니는 걸까.
해가 지고 하늘은 어두웠지만 도시는 여전히 불을 밝힌 이들로 인해 반짝였다.
하늘과 가까울 만큼 높은 빌딩의 끝자락.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선 휘의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불빛으로 가득한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휘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앞으로 손을 뻗자, 그 위로 공기가 일렁이더니 이내 동그랗게 빛으로 테두리가 생겼다.
그 너머로 면류관이 어스름이 비치자 휘가 예를 갖췄다.
***
시간은 흘러. 동화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했던 상황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저번에 인사 드렸던 차시완이라고 합니다."
"휘라고 해."
친절한 얼굴을 가장하고 싱긋 웃는 휘를 보며 동화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나 두 얼굴일 수가 있지. 아, 사람이 아니구나.
"실례지만 동화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인가요? 제가 얘를 꽤 오래 봤는데, 한번도 뵌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얼마전에 어쩌다 알게 됐어."
"얼마전에 어쩌다 알게 됐는데 동화 자취방에 얹혀 사신다고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게 그렇게 되죠?"
생글생글 웃고는 있지만 두 사람 다 확연히 짜증이 나 있었다.
웃고있는 입가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게다가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저기, 그게-"
"넌 일단 가만히 있어봐."
만류하려는 동화를 시완이 밀쳤다.
"보아하니 동화보다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왜 이러고 계세요?"
"내가 소개를 잘못 들었던가? 동화 친구가 아니라 동화 보호자였나? 내가 왜 그런 걸 말해야 하지?"
"아시다시피 얘가 좀 띨빵해서 무슨 말하면 다 속아서요."
"그래 좀 띨빵하긴 하더라."
어쩐지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동화가 미간을 구겼다.
"아, 나, 이사람들이.."
"가만 있어봐. 같이 살아봤으면 아시겠지만 얘, 뜯어먹을 것도 없어요. 괜히 뭐 좀 뜯어먹을까 하고 접근하신 거면 이쯤 해두는 게 좋아요."
"그래? 근데 너 혹시 그만 살고 싶은 생각 있니?"
곡선을 그리며 곱게 미소 지은 휘의 등골 오싹해지는 발언에 동화가 다시 나섰다.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콧방귀를 뀌며 모른척하는 휘를 향해 시완이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귀신은 왜 잡아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질문에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느낀 동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로 휘를 바라보는 시완.
휘는 가만이 그런 시완을 내려다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탁, 하고 가볍게 뛰어올라 동화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허공에 걸터앉았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뜬 시완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자신의 두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동화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턱을 떨어트렸다.
"그야.. 내가 귀신이니까."
머리를 쥐어뜯은 동화가 휘에게 버럭 소리쳤다
"말하면 안된다면서요!!"
"응. 너는 말하면 안된다고. 나는 말해도 돼."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싱긋 웃는 휘의 태도에 동화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제부터 이 사람, 아, 아니. 이 야광귀가 하는 말을 믿으면 내가 등신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화의 옆에 선 시완은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놀라 움직이지 못한 것일 수도.
그에 비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휘가 턱을 치켜들고 깔보듯 동화와 시완을 내려다보았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귀신이랑은 좀 다르지만."
그날 동화는 휘를 믿지 말아야겠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