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문제는.. 내가 연락을 먼저 하느냐, 안 하느냐, 가 아닌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하던 동화가 그녀의 증상을 떠올리고는 낮게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다시 연락한들.. 그 문제는 그대로라.. 아무것도 바뀌지가 안잖아.."
그렇다. 이별을 고한 옛 연인의 마음을 붙잡는 일.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로의 연애에 진정한 장벽. 바로 그녀의 필레마포비아, 키스 공포증이었다.
머리를 헝클던 동화가 고뇌하며 술잔을 비웠다.
"혹시.. 병원엔 가봤어요?"
"갈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여우들은 다쳐도 회복력 빨라서 굳이 갈 필요도 없어."
"그렇겠죠?"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웠다.
병이라면 병원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데.. 그것이 불가능하니.
인터넷 검색에도 그다지 좋은 방법 같은 건 없었다.
한숨과 함께 술잔을 비우던 두 사람은 한 병, 한 병 술을 비우다 결국엔 자신들이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만취했다.
"아니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어?"
"아니지. 암. 아니고 말고."
"아니이- 어? 무서운 걸 어떡해. 어? 어?"
한껏 취한 우로는 반쯤 풀린 눈으로 자꾸만 뭐가 그렇게 아니라는 건지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 앞에서 동화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그렇게 술에 취해 있던 동화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 건.
"그만 가자."
"그래. 어우- 피곤하다."
우로가 등돌리고 앉은 그 테이블에서 수혁과 그의 친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계산을 하고 돌아가려던 그가 저벅저벅 걸어 동화와 우로가 있는 테이블을 지나치던 순간이랄까.
"....."
"....."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취한 우로를 발견한 그가 일행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에 마침 그를 올려다본 덕분에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는 잠시 미간을 구기며 동화를 보다가, 이내 한옥마을에서 본 것을 기억해내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우로를 바라봤다.
"아니이- 나도 노력하는데에- 어? 어? 안되는 걸 어떡해. 어?"
이미 만취한 우로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열심히 떠들고는 있었지만 상태로 보아, 아마도 다음날 기억을 못할 것 같은 상태였다.
"아, 저기, 이건.."
그런데 동화가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우로의 반쯤 풀려 있던 눈은 한순간에 동그랗게 커졌다.
"수.."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수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찌푸린 얼굴로 자리를 떴다.
"잠깐, 오해예요!!"
다급히 그를 붙잡으려 동화가 가게 밖까지 나섰지만 의미는 없었다.
"뭐가 오해인데요?"
까칠한 그의 물음에 동화는 제대로 된 대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아니,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하시든 오해라고.."
"저랑 우로씨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누구와 술을 마시든, 제가 뭐라고 할 권리는 없죠."
"아니, 뭘 또 굳이 그렇게 따져요.."
역시 마음이 떠난 것이라 우로는 포기하는 게 맞는 건가.. 하고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동화가 우물쭈물하는데, 그를 바라보던 수혁이 더욱 미간을 구겼다.
그러며 한걸음 다가서더니 꽤나 위협적인 투로 경고했다.
"그래도 곱게 집에 보내시죠. 제가 무슨 사이는 아니어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서잇는 동화를 보던 수혁은 역시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은 기분에 더욱 얼굴을 구기고는 빠르게 멀어졌다.
급히 걸어가버린 수혁과 자신들의 테이블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우로.
동화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 왜 일이 꼬이냐..'
그러다 수혁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린 동화는 머리를 헝클던 손을 내렸다.
'아니. 꼬이기만 한 건 아닌가?'
그건 누가 보아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곱게 집에 보내라니..
동화는 그가 우로의 진짜 나이를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절대 알아서는 안될 것 같지만.
동화가 다시 가게 안의 테이블로 들어섰을 때에, 우로는 이미 만취를 넘어선 상태였다.
"아니, 누님! 어휴.."
술잔과, 빈 병. 그리고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주홍색 머리칼.
수혁에게 들킨 것 때문에 그 짧은 사이 아주 술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동화는 서둘러 정리를 하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우로를 부축하여 가게를 나섰다.
시간은 많이 늦어졌지만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로의 팔을 어깨에 두른 동화는 그 사람들 틈사이로 낑낑대며 걷고 있었다.
"아이고, 누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저 죽어요.."
술에 취해 몸이 축 늘어진 사람이 얼마나 무거운지..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저기, 혹시.. 여우라서 이렇게 무거운 건.."
"..동화야. 내가 너까지 잡아먹어야.."
"아니,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그렇게 걷다가 몸을 축 늘어트렸던 우로가 조금 정신을 차렸을 즈음엔, 더욱 곤란한 상황이 동화를 맞이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빠져나와 조금 어두운 길을 걷던 중.
"길이 어둡네."
"그러게요."
조금 정신을 차린 거라 여긴 우로의 말에 동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좀 밝혀줄까?"
"누님이요?"
"응. 내 꼬리는 밤에 빛이 나거든!"
"예에?!"
"볼래? 볼래?"
그러더니 신이 나 앞으로 달려나가는 우로를 화들짝 놀란 동화가 미친듯이 뒤쫓았다.
아무리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가를 벗어났다고 해도, 사람이 아예 없는 길은 아니었다.
"잠깐! 서 봐요!!"
다급히 외치며 달려오는 동화가 재미있는지 우로는 꺄르륵 웃으며 더욱 빨리 달렸다.
'어우씨, 왜 저렇게 빨라?!'
여우라서 그런지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 동화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하고 주변을 힐끔힐끔 훑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꼭 감고 외쳤다.
"수혁씨다!!!"
그 목소리에 달려다가던 우로가 우뚝 멈춰 서더니 무서운 속도로 동화를 향해 달려왔다.
그 모습이 꼭 먹이를 노리는 여우 같아서 오싹해진 동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먹이가 된 기분이라.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우로는 동화의 어깨를 꽉 붙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디! 어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로를 잡은 동화는 그녀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혹시라도 꼬리를 꺼낼까 겁낸 동화가 급히 우로를 골목길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서 우로의 눈앞에 들이밀며 다그쳤다.
"절대. 절대!! 절대예요. 절대로 꼬리를 꺼내면 안돼요! 알겠어요?"
"웅웅."
알겠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우로였지만 정말 아는 건지 영 불안한 동화였다.
세번이나 절대로 꼬리를 꺼내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한 후에야 동화와 우로는 사람이 없는 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시원한 밤공기.
한참이나 걸어 드디어 술기운이 깬 우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동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추태를 보인 장본인으로서는 이 민망함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주홍빛 머리가 달빛을 받아 짙은 붉은 색으로 보였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동화는 오로지 그녀의 키스 공포증을 어떻게 극복할까 만을 생각했다.
초록창에 검색도 해봤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고..
아는 의사선생님도, 의과생도 없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동화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섰다.
"어!"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화를 한걸음 더 나아간 우로가 돌아보았다.
"왜 그래?"
"누님, 저거예요!"
***
"그래서?"
자취방으로 돌아온 동화를 맞이하던 휘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치솟았다.
"한옥마을로 출사를 간다더니 여우를 만나고 돌아왔다?"
휘의 말에 동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자, 낮에 먼저 동화의 자취방으로 간다던 시완과 휘가 귀가가 아주 늦어진 동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신을 잡아 오랬더니 이상한 걸 만나고 다니고 있네."
한숨 섞인 휘의 말에 동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동화는 휘에게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출사를 나갔던 곳에서 우연히 우로의 사진을 찍은 이야기부터, 본의 아니게 그녀의 이별 현장의 목격자가 되었다가 도와 달라며 매달리는 그녀를 못 본 척할 수가 없어 번호를 교환하였는데 오늘 낮에 학교로 찾아와 만난 이야기까지.
둘이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수혁을 미행한 이야기를 할 때엔 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줄곧 눈썹을 치켜 세우고 이야기를 듣던 시완은 동화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픽 웃었다.
"네가 연애상담을 한다고?"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동화는 반박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스스로도 연애상담을 해주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폭 내쉬는 동화를 보며 시완도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자신 없으면 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그것도 못해서 이번엔 여우를 데리고 나타나다니..
동화는 우로를 그냥 놔두기 불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완의 눈에는 동화가 그러했다.
한숨을 쉬는 두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휘가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고개가 기울어진 방향으로 은발이 흘러내려 소파에 흩어졌다.
"진짜 끝내주네요."
저도 모르게 시완이 중얼거리자, 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굳이 무엇이 끝내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온 미모였다.
미소를 머금고 시완의 감탄을 만끽하던 휘는 동화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 여우는 뭘 어떻게 해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