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동그랗게 뜬 솔이 멍하니 동화를 바라봤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없이 누군가가 좋을 수 있는지.
솔에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범위의 감정이었기 때문에.
[낄낄낄.]
혼란스러웠지만 똑바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솔은 싫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마음이 따뜻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저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내 덕에 고백도 들었으니 이제 나 좀 놔주면..]
검은 그림자의 눈이 휘어지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 눈이 옅에 붉은 기를 띄고 있었지만 완전히 붉은 색으로 물든 것은 아니라 당장 악귀가 될 위험은 없어 보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를 들은 동화는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미간을 와락 구기며 외쳤다.
"너 때문에 고백한 거 아니야!!"
아니, 저놈이 말을 꺼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는 했.. 애초에 저놈이 이미 다 말하지 않았던가?!
고백할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고백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생물체의 입에서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어물쩍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리치고도 어쩐지 분이 안 풀렸지만 그보다 허공에 대고 소리친 자신에 대한 창피함이 더 커서 동화는 두 눈을 손 아래에 숨겼다. 긴 한숨을 뱉는 동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솔이 손에 붙잡은 것을 바라보았다.
동화의 그림자에 숨어 들었었기에 동화의 실루엣으로 모습이 변해 있었다.
그에 눈썹을 치켜 뜬 솔은 동화의 손에 들려 있던 귀신통을 빼앗아 바닥에 놓고는 그 통으로 인해 드리운 그림자에 그슨대를 쑥 집어넣었다가 뺐다.
[아, 진짜!! 나 그냥 사람 모습으로 있게 해주면 안되나?!!]
"안돼."
그슨대가 동화의 실루엣인 것이 매우 거슬렸다.
귀신통을 다시 동화의 손에 쥐어 주던 솔은 흠칫하고는 손에 들린 그슨대를 바라봤다.
조금 전 청랑이 그 그슨대가 은결의 실루엣인 것이 거슬린다며 다른 모습으로 바꿔 달라고 한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런 기분이셨던 건가.'
솔에게서 귀신통을 건네 받은 동화는 뚜껑을 열고는 물었다.
"그래서 그 귀신은 지금 어디 있어? 나 이거 어디로 던지면 돼?"
[자, 잠깐, 잠깐, 잠깐!! 난 사람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 귀신이야! 그슨대는 좋은 존재라고!]
"좋긴 뭘 좋아!"
동화는 카메라 가방을 고쳐 메며 귀신통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아아악!! 잠깐, 잠깐, 잠깐!! 기다리라니까?!!]
귀신통을 던질 자세를 취한 동화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서서 물었다.
"왜. 뭐."
[그슨대는 좋은 존재라니까?! 인간들이 좋아하는 기분을 나도 좋아하는 것 뿐이야!!]
들어볼 것도 없었다는 생각에 동화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타의로 한 고백 이후 굉장히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화를 보며 옅게 미소 지은 솔이 그슨대를 잡은 팔을 쭉 뻗었다.
"여기."
[으아악!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
무언가 다급하게 말하던 그슨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동화가 던진 귀신통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시끄럽게 떠들던 그슨대가 귀신통으로 빨려 들어가자, 급격한 침묵이 두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음.. 그만 갈까?"
"그래. 데려다줄게."
숨막히는 침묵에 동화는 그슨대를 괜히 집어넣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더욱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 같은 기분에 곧 그 생각을 다시 깊숙이 쳐박았다.
"근데.. 내가 데려다줘야 맞는 거 아냐?"
"왜?"
솔의 반문에 동화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야 여자가 더 연약하니 지켜줘야 하는 것이 맞다고 답하려던 동화의 머리에 한가지 의문이 피어났다.
과연 솔은 인간여자와 똑같이 연약할까?
"솔아, 너 힘 세?"
"글쎄. 인간여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텐데."
의문이 들자 즉시 입밖으로 그 의문을 내뱉은 동화가 돌아온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데려다줘야지. 위험할 수도 있잖아."
"실체화 안 하면 되잖아."
"...그래도."
어쩐지 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쉬운 마음에 우물쭈물했다.
남자가 힘이 더 세고 자시고를 떠나서.. 그냥 데려다주고 싶었다.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마땅한 핑계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달싹이는 동화를 솔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두사람은 모두 뜬금없었던 동화의 고백 아닌 고백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
"어?"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흐르는 두사람을 무심코 지나쳤던 한남자가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홱 돌려 그들을 돌아보았다.
녹빛 머리칼. 저 흔하지 않은 색은 나무도깨비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
산신령을 모시는 소나무 도깨비의 색이었다.
불꽃을 머금은 듯 붉은 머리칼. 매끈한 피부와 길게 찢어진 눈매.
그는 노랑색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랑 있네?"
긴 시간을 사는 소나무 도깨비. 그들은 산신령과 함께 존재하기에 산신령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존재한다.
줄곧 인간에게 무관심하다고 소문났던 그녀가 인간과 함께 있는 그 모습이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잠시 멀어지는 두사람을 바라보던 그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뗐다.
"별 일이네."
그러고보니 저 소나무 도깨비의 산신령도 인간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술을 곱게 휘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
집 앞으로 불려 나온 휘는 오묘한 분위기의 두사람을 마주해야 했다.
귀신통을 휘에게 내밀며 부루퉁한 얼굴의 동화는 지금 당장 그슨대를 천도 시켜 달라고 했다.
"무슨 일 있었어?"
시큰둥한 얼굴로 묻는 휘의 시선을 한껏 피하며 동화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냥. 불건전한 귀신이니까요."
"그래?"
여전히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동화를 보며 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동화의 손에 들려 있던 귀신통을 빼앗아 들었다.
"그래 알았어. 너 먼저 들어가."
"어? 어디 가려구요?"
"어. 마실."
어색하게 웃는 동화는 잠시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모르고 헤매다가 이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솔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갈게."
"응."
짧은 대답을 끝으로 동화가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자, 휘를 힐끔 바라본 솔도 등을 돌렸다.
손에 든 귀신통을 가만히 바라보던 휘는 그것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더니 솔을 따라 걸었다.
자신을 따라 걷는 휘를 힐끔거린 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이봐, 도깨비."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걷던 솔의 시선이 휘에게로 향한 것은 한참만에 그녀를 불러 세웠을 때였다.
대답없이 올려다보는 솔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휘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인간의 일에 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 뻔한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잠시 고민하던 휘는 이내 머리를 헝클며 입술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