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있겠지만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가만히 휘를 바라보던 솔이 미세하게 미간을 구겼다.
"무슨 말이죠?"
"오동화.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는 말이야."
"왜죠?"
"설마 몰라서 묻는 거야?"
이번엔 휘의 미간이 뚜렷이 찌푸려졌다.
올곧은 솔의 시선은 정말 모르는 듯 하여 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도깨비는 여우들이랑은 다르다고. 여우들이야 여우구슬로 사람이 도리 수도 있다지만 도깨비는 그게 아니잖아."
"그래서요? 제가 꼭 사람이어야만 오동화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끝이 뻔한 걸 시작하지 말라는 소리야."
휘의 말에 입을 다문 솔이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사람과 적당선을 지키는 것이 좋다. 그다지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으니 지금껏 사람의 일에 관여한 적도 없었지만 그것이 안 좋은 일이라고 인식해본 적은 없었다.
바로 곁에서 청랑을 지켜보았기에.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었다.
솔은 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휘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휘의 표정을 보며 솔은 짧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 없군요. 이 세상에 끝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끝날 것이 뻔하니 가까이 하지 말라는게 무슨 말이죠?"
그녀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 휘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솔을 내려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면 설명해 줄게. 나는 딱히 어느 한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야."
"그럼요? 사람이 아니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난 다르지. 마음을 내어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난 사후에 만날 수 있는 존재니까."
그의 말에 솔이 입을 다물었다.
휘는 솔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훑었다.
"사람은 언젠가 다 죽지. 하지만 그거 말고도 인간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존재야. 도깨비는, 아니. 나무 도깨비는 산을 닮아 우직해서 하나밖에 모르지. 네가 한번 마음을 주면 그 마음, 다시는 너에게 돌아오지 못할 거야. 도깨비들은 그런 존재니까."
"마음..?"
"그래. 네가 마음을 주면, 인간이 배신을 하건, 널 이용하건, 그 인간이 죽어버리건. 네 그 마음은 다른 이에게 옮겨가지도 못하고 네가 존재하는 한 그 사람에게 있을 거야. 수명이 짧은 인간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결국 네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좋은 건 짧고 그리움만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야."
마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솔을 내버려두고 휘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생각 잘해."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멀어져 갔다.
마음이라..
솔은 한번도 그런 것에 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든가.. 그런 것들.
마음을 내어주면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후에 스스로에게는 그리움만 남는 다는 것도.
그리고는 곧장 청랑을 떠올렸다.
'청랑님은 어땠지?'
그 긴 세월. 그녀는 어찌 지내왔는지..
솔은 알 수 없어졌다.
***
"어?"
습관처럼 카메라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동화. 그는 학교를 나서다 의외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바로 은결과 솔의 곁에 있는 걸 본 적이 있는 그녀였다.
"학교 가?"
"응."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결에게서 시선을 돌린 동화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자, 은결은 그가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소개를 했다.
"아, 전에 너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못 본.. 그... 희우라고 해."
차마 '나를 쫓아다니던'이라고 제입으로 말할 수 없던 은결은 대충 얼버무렸다.
'희우?'
그녀의 이름을 들은 동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동화라고 합니다."
동화는 예의 바른 어린이처럼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동화 너 그거 카메라야? 샀어?"
희우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동화의 어깨에 매달린 카메라 가방을 발견한 은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어."
고개를 끄덕이던 동화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 분명한 은결의 눈을 보고는 흠칫 뒷걸음질쳤다.
다정다감함이 특기인 이놈은 가끔 이렇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생기면 마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는 한다.
물론 시완과 동화는 이 눈빛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
"왜, 왜."
"그거로.. 나랑 희우 사진 한 장 찍어워."
"어? 뭐? 야, 잠깐-"
당황한 동화가 무슨 말도 하기 전에 희우를 이끌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은결이 어서 찍으라는 듯이 서서 반짝이는 눈으로 재촉했다.
'이거... 안 찍힐 텐데..'
이 곤란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버둥거리고 있는데 은결이 다시 재촉했다.
"빨리! 나 수업 가야 돼."
수업?
"어, 그래. 잠깐만."
그렇다면 찍기만 하고 도망치면 되겠군. 하고 생각하는 동화였다.
'얼른 수업이나 가라며 등 떠밀고 이 사진의 존재를 잊을 때까지 만나지 말아야겠다.'
카메라를 꺼내 든 동화는 긴장한 얼굴로 렌즈에 두사람을 담았다.
뭐, 여차하면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사람이 찍히지 않는 카메라다, 하고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니 믿겠지 하는 생각을 하던 동화가 그 사진을 그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잠깐만..'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머리속을 스치는 사실이 한가지 있었다.
은결의 옆에 서서 미소를 머금은 포근한 분위기의 여자.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분명 솔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리고 솔은 사람이 아닌 도깨비이다.
'에이.. 설마.'
동화는 애써 머리속에 떠오른 사실 한가지를 부정했지만 사진을 확인한 후에 곧 그 생각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봐봐. 잘 나왔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온 은결이 사진을 보려고 하자 소스라치게 놀란 동화가 얼른 카메라를 품속에 감췄다.
의아한 얼굴을 하는 은결에게, 동화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야, 야, 너.. 너 너무, 그, 상태가, 안 좋아, 서.. 다음에 다시 찍자. 그, 상태, 멀쩡할 때?"
대신 심하게 부들부들 떨며 말을 더듬었지만.
"뭐라는 거야. 봐봐."
"아니, 여, 기 풍경이 너무 별로, 별로다. 다음에 더 멋, 있는 데서, 찍어줄, 찍어줄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은결이 온화한 표정으로 동화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즈음.
"너 수업 있잖아. 얼른 들어가."
은결의 팔을 살포시 손끝으로 건드린 희우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곱게 휜 입술을 바라보던 은결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응. 이따가 봐."
그리고는 동화에게는 무슨 말도 없이 서둘러 학교 쪽으로 달려갔다.
은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화가 다시 품에서 카메라를 꺼내 조금 전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역시나. 돌담과 함께 사진에 찍힌 것은 한사람 뿐이었다.
동화는 조심스레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그녀를 힐끔거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러다 차분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카메라를 품에 감춘 동화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없는 건 아니지.'
그러다 침을 꿀떡 삼킨 동화는 큰맘 먹고 그녀를 향해 카메라를 내밀었다.
조금 전 찍힌 사진을 확인한 그녀는 그저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옅은 갈색의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칼. 하얀 피부 위에 따스함을 잔뜩 들이부은 듯한 눈.
이다지도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고민마저 하게 만드는 얼굴이다.
담벼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인데도 충분히 예뻤다.
문제는 그녀만 사진에 찍혔다는 것.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를 똑바로 향하는 동화의 시선에 그녀는 다시 카메라를 그를 향해 살포시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카메라군요."
고개를 끄덕인 동화에게 좀 걷자는 말을 건넨 희우가 먼저 걸음을 뗐다.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걷게 된 동화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혹시나 그 한숨에 그녀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먼저 걸음을 뗐던 그녀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눈빛으로 땅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동화를 향해 물었다.
"내가 그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전에 만났다면.. 어쩌시겠어요?"
동화는 조금 전 그녀의 말을 혀 위에 굴리며 되새겼다.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전.. 이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 씁쓸한 미소마저 마치 햇빛이 그녀만을 비추는 듯 눈부셨다.
"나는 아주 오래.. 그를 기다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