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랑이 은결을 만나러 간 사이 늘 그랬던 것처럼 학교 정원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솔은 의외의 인물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즘은 인간에게 꽤나 관심이 생겼나 봐요?"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그는 길게 찢어진 눈매가 특히나 매혹적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솔이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신경 끄고 가던 길 가."
솔은 그의 붉은 머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붉음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듯이.
하지만 그런 솔의 작은 노력을 무시한 채 그는 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깨비들은 대부분 인간에게 관심이 많죠."
솔은 옆에 앉은 그를 찌푸린 채 힐끔 바라봤을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실은 제 동생이 얼마전부터 어떤 인간한테 홀딱 빠져서요. 소나무 도깨비가 모시는 분이 그나마 인간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언이라도 구할까.. 하고."
그가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하는 말에 솔은 미간을 구겼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 이번에는 똑바로 그를 향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솔을 시야에 담았다.
"시우라고 합니다. 앞으로 종종 볼 거 같은데 잘 지내보죠."
그가 내미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이 닿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불의 도깨비와 가깝게 지낼 생각 없어. 그쪽이랑 나랑은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불과 나무라서요? 에이, 너무 고지식하시다. 게다가 제가 불 그 자체인 것도 아닌데 뭘요. 솔님도 소나무 그 자체는 아니잖아요?"
그가 어찌 제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청랑님께 들었겠다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잘 지내냐는 말이야."
"아아- 그것도 그렇네요."
싱긋 웃으며 여전히 손을 치우지 않는 것을 보니, 납득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의 의견을 받아들일 의지가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한참을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끝끝내 받아주지 않자, 실망스러운 얼굴로 손을 축 늘어트린 그가 벤치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청랑산의 주인께 전해 주시죠. 시우, 시아가 뵙기를 원한다고. 그럼 아마 한담음에 달려오실 테니까요."
능글맞게 웃는 시우를 보며 솔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말이야 전하겠다만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산에 이로운 존재가 아닌 저들을 청랑님께서 가까이 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랬던 솔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날 산 가까이에 마련해둔 거처로 돌아간 솔이 청랑에게 '시우, 시아'의 이야기를 전하자, 청랑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던 것이다.
"정말요? 그 아이들이요?"
"정말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불만이 가득한 솔이 의심스러워 하며 묻자 청랑이 기쁨을 추제하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모든 시간을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르는 청랑의 인연이라고 하니 솔은 어쩐지 자신을 시우라고 소개한 그 불의 도깨비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이 인간한테 푹 빠져 있어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시아가요?"
눈을 더욱 빛내며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한 청랑이 들뜬 얼굴을 했다.
어찌 자랐을지 어서 보고싶다며 미소 짓는 그녀의 눈빛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들을 만났을 적을 회상이라도 하듯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솔이 물었다.
"대체 언제 만나셨습니까? 전 그들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쩐지 부루퉁한 얼굴을 하는 솔을 보고는 청랑이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솔님과 함께 했지만 모든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니까요. 그저 작은 인연입니다."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에 딱히 불만이 없는지 수긍한 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제야 청랑은 그녀를 학교 정원에 그대로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고는 눈매를 늘어트리며 울상을 지었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일이 생겨서.."
괜찮다고 손을 내젓는 솔을 보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 청랑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저 어두워진 하늘에, 낮에 있었던 일이 상영이라도 되는 듯 머리속에 뚜렷이 떠올랐다.
***
아주 오래.. 그를 기다렸다는 말에 동화는 한전한 카페에 도착하기 전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뭐일 것 같아요?"
그녀의 물음은 뜬금없고 당황스러웠다.
물론 사진에 찍힌 시점부터 동화는 그녀가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뭐'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글쎄요. 도깨비?"
그저 솔이 그렇기에 그렇지 않을까 하고 물었지만 청랑은 살포시 미소 지을 뿐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훑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신령이예요. 청랑이라고 합니다."
혼란스러워 하는 동화에게 그녀는 '청랑'은 산의 이름이며 산신령의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산신령. 그 단어가 동화의 뇌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산신령? 그건 우물 속에 사는 거 아닌가? 금도끼인지 은도끼인지 물어보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동화를 보며 청랑이 말했다.
"생각하는 거랑은 조금 다를 수 있어요. 우린 그저 산을 수호하는 존재이지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니거든요."
그러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아, 대단할 수도 있나?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거든요."
"네에??"
동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지 이거. 지금 소원 말하면 들어주는 건가.
소원을 이룰 기회가 지금 주어진 건 아닌지 긴가민가한 동화가 소원을 말해야 하나.. 말한다면 무슨 소원을 말해야 하나.. 하는 혼자서 김칫국을 통째로 들이키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정말 생각하는 것이 다 얼굴에 드러나는 그를 보며 청랑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은결의 말대로,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한 친구였다.
잠시 소원에 대한 고민을 하던 동화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님을 이내 기억해내고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산신령'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내려앉은 직후부터 머리속에 스멀스멀 떠오르던 궁금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나무를 자유자재로 자라게 할 수 있어요? 동물과 대화할 수 있어요? 꽃도 막 피우고? 은도끼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솔직하게 대답하면 금도끼도 막 주고?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도 들려왔지만 청랑은 그냥 모르는 척 했다.
"그럼 영원히 살아요?"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인 그 질문에는 이 전에 쏟아지던 질문들에 짓던 어색한 미소도, 얼버무리는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가 조금 일그러져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동화군. 영원한 건 없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사는 것은 맞지만, 영원은 아니예요."
또렷이 들려온 대답에 호기심을 해소한 동화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이어 제일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멍멍- 아니, 은결이랑은 언제 만난 거예요?"
물어볼 것을 예상했기에 청랑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을 뿐.
"아주.. 아주 오래전이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나는 그를 기다렸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청랑은 조금은 길 것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동화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세월을 살아왔고, 그 세월 속에 은결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죽음 뒤에 그가 다시 태어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을 그녀는 그저 기다렸다고만 했다.
함께 있는 시간은 시리게 행복했지만 찰나였고, 그를 잃었던 지독한 슬픔 속에서 아주 긴 시간 그리움에 허덕였다.
동화는 며칠 전, 그슨대를 잡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불건전한 귀신이 떠벌린 탓에 솔에게 마음을 들켰지만, 이미 들켜버린 거 제대로 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은 하기도 전에 고이 접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휘의 말에 안으로 들어섰던 동화는 불건전한 귀신이어도 마지막 가는 길, 지켜보기라도 할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다시 건물을 나섰다.
하지만 귀신통을 받아 든 휘는 그슨대를 천도시키는 대신 솔의 뒤를 따랐고, 두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꽤나 떨어져 있던 거리라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또렷이 들려온 말은 있었다.
좋은 건 짧고 그리움은 길다.
그리고 그 시간을 견뎌온 청랑은 지금 그를 다시 만나 너무도 행복하다고 했지만 그 포근한 미소가, 그저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동화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