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솔과 청랑의 거처에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청랑과 시우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아, 시아가 왔나 보네요."
시우의 말에 청랑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왔다면 필시 그녀가 푹 빠져 있다는 인간도 함께 왔을 터!
하지만 그녀보다도 한발 먼저 문 근처에 서있던 솔이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선 두사람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열어주는 거예요? 요즘 세상엔 조심해야 돼요."
시우와 꼭 닮은 얼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곳에 서있었다.
***
"저기.. 괜찮으세요?"
그 목소리에 시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 방법은 사실 타인의 일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방법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시아가 지켜본 그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예상대로 말을 건 것이다.
물론 이 방법으로 대화를 트게 되면 그후로 그 사람과 어떻게 잘해볼 생각 따위는 접으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지만 시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일단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나면 안 넘어올 수 없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부들부들 떨며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 몸짓으로 시아는 말로 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했다.
"발목 다치셨어요? 병원 가야하는 거 아니예요?"
그의 목소리에 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고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좀 도와주실래요?"
그 곁을 지나던 다른 이들은 어째서 괜찮냐고 먼저 손 내민 것이 자신이 아닌가 하며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일렁이는 태양 같은 머리칼에 우로만큼이나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미모.
하지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이들의 손톱만큼도 그녀의 미모에 관심이 없던 그는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시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연신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난처한 얼굴로 눈썹을 늘어트린 시아가 멍한 얼굴로 그저 그녀를 부축하는 것에 충실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쩌죠.. 오빠가 전화를 안 받네요.. 정말 죄송한테 약속장소까지 데려다 주시면 안될까요?"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딱히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물론 조금 신경 쓰이는 전화를 받긴 했었지만.
동화는 휘의 심부름 전화를 살포시 무시하며 이렇게라도 소소한 복수를 감행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대차게 넘어져서 발을 삐었는데 어찌 그냥 두고 가겠는가.
핑계거리가 생긴 김에 심부름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베푼 작은 호의는 동화를 아주 요상한 상황으로 끌어들인다.
***
"...오동화?"
발목을 다친 그녀를 부축한 채로 도착한 약속장소인 집에서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솔이었다.
"어? 솔아?"
어리둥절한 것은 동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솔은 그것의 배는 혼란스러웠으며 기분마저 상했다.
분명 시우의 말에 의하면 그의 동생 시아는 그녀가 '푹 빠진 인간'을 데리고 온다고 했다.
그런데 함께 나타난 것이 동화라니.
"시아야."
솔의 등뒤로 시우가 그녀를 부르자, 시아는 그를 닮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넘어져서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이분이 여기까지 부축해주셨어."
물론 부축을 받아야할 만큼 나약한 몸뚱이가 아니었지만 시아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시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인간이 아니니 넘어져 발목을 삐었다고 해도 금세 회복될 터였다. 부러진 것이 아니고서야..
시우는 그런 시아의 시선을 받고 질렸다는 얼굴을 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동화는 그녀를 오빠로 보이는 남자에게 넘겨주며 슬쩍 솔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발견한 순간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굳었다.
게다가 설핏 미간을 구기는 것이, 기분이 나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동화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동화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동화를 청랑이 불렀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같아서 생각이 뒤죽박죽인 와중에, 그 이야기를 들려준 장본인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또 만나다니.
동화는 놀라서 눈을 홉떴다가 다시 솔의 눈치를 살폈다.
"들어와요."
"아, 아니, 저는.."
"들어와."
"네."
안으로 들어오라는 청랑의 말을 거절하려는데 솔이 단호히 말했다.
동화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까지 하며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솔과 마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느데.. 이러한 상황에 놓이다니.
이렇게까지 불편한 상황에 마주할 줄 알았으면 아마 양심에 찔리더라도 넘어진 그녀를... 아니다. 도저히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 같으니 병원으로 데려다줬어야 한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는 동화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거실에 빙 둘러 앉았다.
이번에는 솔도 떨어진 곳에 있지 않고 감시하듯이 동화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화는 휘가 했던 말, 그리고 청랑이 했던 말이 머리속을 휘젓고 다녀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건 혹시 야광귀의 심부름을 무시해서 일까..
말도 안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너무 신기하다! 인연인가 보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청랑과 동화를 바라보는 얼굴이 퍽 사랑스럽다.
하지만 청랑, 솔과 친분이 있는 이 붉음이 가득한 두 남매.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듯한 분위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자리에 앉아있던 동화는 솔이 내어주는 차를 받아 들며 눈치를 살폈다.
그녀를 보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긴 그리움.'
청랑도 휘도 그렇게 말했다.
좋은 건 짧고 그리움은 길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환생이라는 방법이 있는가 하고 잠시 희망을 품었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동화의 이 마음은 그냥 답이 없는 마음이었다.
아니 잠깐, 그보다 그리워해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스로를 타박한 동화가 애써 한숨을 삼켰다.
비록 그슨대가 떠벌려서 솔에게 들켰지만 이후로는 절대 입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동화는 그렇게 결정했다.
"저기.. 그런데 저는 왜..?"
동화는 자신이 이 자리에 끼어 있는 것에 강한 의문을 느끼고는 청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청랑은 그제야 동화의 존재를 다시 상기한 것처럼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흘리더니 웃었다.
마치 몇시간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실은 이미 머리속에서 지운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반면 동화는 청랑을 볼때마다 그 이야기를 상기하는지 표정에 혼란이 엿보였다.
"이쪽은 오빠인 시우, 동생인 시아. 제가 아주 아끼는 아이들이예요. 마침 이 아이를 도와 주셨다니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죠."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화는 그녀가 소개한 두사람을 힐끔 바라봤다.
어쩐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시아를 지나쳐, 시우를 바라본 동화는 이상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어머, 청랑님 아시는 사이예요?"
'정말 인연인가보다.' 하고 중얼거리며 두 손을 모은 시아가 방긋방긋 웃었다.
시우에게서 떨러지지 않던 동화의 시선은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오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동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알면서도 부러 솔을 빤히 바라보던 시우는 그 시선이 떨어져 나가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슨대 사건 이후로, 휘의 말 때문에 한동안 정원에 가지 않았던 동화이기 때문에 솔은 그를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업이 끝나면 정원으로 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는데 갑자기 혼자 그곳에 있으려니 솔은 어쩐지 허전함 마저 느꼈다.
"...오랜만이네."
"응."
나지막한 솔의 목소리에도 동화는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무언가 불만인 듯한 표정의 솔이 동화를 뚤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또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우.
동화는 시우의 시선이 줄곧 솔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몹시 거슬렸지만 이제는 어떤 간섭도 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에 애써 머리속에서 지웠다.
"근데.."
그리고는 평소처럼 머리속에 맴돈 작은 호기심으로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른 생각은 뒤로 밀려나도록.
"이분들은..?"
"조금 전에 소개하지 않았나요?"
말끝을 흐리는 동화를 놀리듯이 청랑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잠시 망설이던 동화는 이내 짧은 심호흡 후에 물었다.
"어떤 사람인가요?"
요상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초면에 이따위 질문을 묻다니.
동화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젠장..' 하고 스스로를 욕했다.
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시우가 이내 푸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이들은 도깨비랍니다."
청랑의 말에 시아는 더욱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그녀를 향해 의문을 표했다.
"청랑님..?"
사람이 아니냐고 차마 물어보지 못한 동화를 보며 픽 웃은 청랑이 입술을 뗐다.
"나와 솔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동화군, 이들은 불도깨비라고 하는 존재예요."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은 시우와 시아가 사람일 경우, 청랑과 솔이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질문이다.
그렇게 묻지 않고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질문을 고민하던 동화는 결국 저런 바보 같은 질문을 뱉어낸 것이다.
시아는 청랑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를 알고 있다.청랑과 솔과도 아는 사이처럼 보이니 그들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는 뜻이었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시아의 볼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이 몹시 거슬린 솔은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청랑님. 모시는데 일손이 모자라시지는 않나요?"
"안 모자랍니다."
청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솔이 대답을 가로챘다.
"아쉽네요. 그 핑계로 솔님을 좀 더 자주 볼까, 했는데."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능글맞게 웃는 시우의 시선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지 솔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시했다.
애써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는 동화의 미간은 움찔했지만.
염병.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며 동화는 스스로가 도대체 왜 이 자리에 끼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곳을 빠져나갈 구실을 찾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청랑은 어쩐지 관계가 복잡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청랑님, 어때요?"
이번엔 시아가 청랑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고보니 더욱 복잡해질 것 같은 관계를 만드는 이가 하나 더 있었다.
시우의 반대편에 앉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동화를 힐끔거리며 수줍은 얼굴로 입을 뗐다.
"제가 요새 푹 빠져 있는 인간이요. 괜찮아 보이나요?"
"상대는 널 알고?"
"이제부터 알면 되죠!"
자신 있게 말한 시아는 대뜸 동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설렘을 담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시선만은 동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