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감한 상황에서 동화를 구해준 것은 뜻밖에도 휘였다.
"저, 전화가 왔네!!"
튕겨 나가듯이 전화를 받은 동화는 시아의 질문을 어물쩍 넘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앞에 있었다면 휘를 숭배라도 했을 것 같았다.
심부름을 재촉하며 동화의 생명을 걸고 하는 협박의 말들이 그렇게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이제 목숨이 그다지 아깜지 않은 가봐?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눈썹을 한껏 치켜 올렸을 것이 빤한 휘의 목소리에 동화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휴, 전 제 목숨을 참 소중히 한답니다. 지금 당장 가면 될까요?"
부러 들리게끔 크게 말했다. 당장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대신 사오라던 족발과 소주의 양은 두배가 되었다.
'아.. 내 돈.'
눈물을 머금고 지출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통화를 마친 동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하하.. 지금 안가면 전 생명이 위험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생명의 위협..?"
허둥지둥 나가려는 동화의 등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 감히..!'
주먹을 움켜쥐는 시아를 시우가 진정시키는 사이, 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동화의 뒤를 따랐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십시오. 나갔다 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랑을 확인한 솔이 쫓아 나오려는 시아와 그런 그녀를 저지하는 시우를 한번씩 훑고는 동화를 다라 그곳을 나섰다.
***
"음.. 처음 본 건, 한창 비가 쏟아지던 때예요."
청랑의 얼굴에 한줄기 의문이 떠올랐다가 일전에 솔이 그슨새를 언급한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라..'
그녀 역시 비오는 날에 추억을 가지고 있다.
이제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오로지 그녀만의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그슨새를 쫓아가더라구요.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쫓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슨새는 상태가 좀 위험해 보였는데.. 그 그슨새가 쫓은 인간에게 다가가서 운전을 천천히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구요."
시아는 그 모습이 아주 신선했다.
지금껏 보아온 인간.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고, 하물며 귀신을 위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말까지 하다니.
동화에 대한 시아의 관심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
"그거 때문에 생명이 위험했던 거야?"
동화의 손에 한아름 들려 있는 족발과 소주. 배달시키면 될 것을 도대체 왜 굳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진상을 알게 되면 열만 뻗칠 것 같아서 확실하지 않은 채로 두었다.
솔은 생명이 위험하다는 그의 말을 믿었던 건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만일 휘가 공격이라도 한다면 지켜줄 심산으로 쫓아 나온 것이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곤란하던 차에 잘 됐지 뭐."
가만히 동화의 손에 들린 묵직한 봉지를 바라보던 솔이 시선을 옮겨 동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화는 그 시선이 느껴졌으면서도 끝내 모른 척했다.
"근데 요새 왜 정원 안 와?"
"어?"
당황한 동화는 고개를 홱 돌려 솔을 외면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빴어서."
"그래?"
되묻는 솔의 목소리는 못들은 척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과 같았지만 그에 대해서 솔도 동화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묵묵히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데, 한참을 무슨 고민을 하는지 조용하던 솔이 다시 동화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슨대가 말한 날 좋아한다는 건?"
생각해보면 제대로 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동화가 그의 입으로 좋아한다고 뚜렷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으니.
우뚝 걸음을 멈춘 동화가 저도 모르게 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한 동화는 서둘러 다시 고개를 돌림으로서 그녀에게 고정되어버릴 것만 같은 시선을 억지로 떼어냈다.
"날 좋아해?"
그 질문에 동화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나 거짓말을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거짓말이라는 걸 들킬 테니까. 그러니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들킬 수도 없었다. 이 관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
속으로 심호흡을 5783927번 정도 한 동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돌아온 대답에 솔이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려던 그 찰나.
"우로 누님도 좋아하고, 시완이도 좋고, 은결이도 좋고." -끝내 휘는 언급하지 않았다
덧붙여진 동화의 목소리에 솔이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그건 친구로서 좋다는 의미?"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다.
속으로 안도한 동화는 정면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똑바로 솔을 내려다봤다.
"응."
사실이니까. 친구로서 좋았다.
다만 거기에 다른 좋아함이 더해져서 그렇지 그녀가 친구로서도 좋은 건 사실이었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시선. 그 시선이 원망스럽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솔은 미미하게 좁혀졌던 미간을 풀고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걸음을 내디디는 그녀는 앞으로 눈에 띄는 모든 그슨대를 없애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
그날 이후로 동화는 한동안 솔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루종일 주고 받던 시시콜콜한 문자도 없었고, 동화는 정원을 찾지 않았으며, 솔도 굳이 동화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삶의 활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며 강의를 마치고 시완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 나오던 동화는 건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주홍색 머리칼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동화가 반가운 기색을 담아 손을 흔들려는데, 그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동화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동화야!!"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나더니 이내 대성통곡을 시작한 우로 때문에 동화는 진땀을 빼야 했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불편한 시완은 은근슬쩍 도망가려 했지만 우로의 다른 손에 자신의 옷자락도 붙잡힌 것을 발견하고는 얌전히 포기했다.
"누, 누님? 무슨 일이예요?"
한참을 목놓아 울어댄 그녀는 울음을 달래 보려 안절부절 못하는 동화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완을 훑고는 코를 훌쩍이며 당당히 말했다.
"나 술친구 해줘."
지금 대낮인데..
사건은 이러했다.
수혁씨와 조금씩 더 가까워진 우로는 용기 내어 키스공포증을 극복하고자, 굳게 마음을 먹고 그와의 입맞춤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고 한다.
홀짝 조그만 잔에 든 투명하지만 알코올 냄새가 폴폴 나는 술을 단숨에 들이킨 우로는 동화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절대로! 사진 찍어서 확인하지 마. 그러면 정말 잡아먹을 테니까."
이런 말은 동화의 궁금증을 더욱 유발한다는 사시을 모르는지 그렇게 말한 그녀가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발그레해진 볼을 테이블에 올린 손에 기댔다.
동화는 실체화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꼬리가 보일 리가 없는데도 괜스레 눈을 부릅뜨고 꼬리를 보려 애썼다.
"그렇게 결과가 나쁘지는 않은 거 아닌가?"
대낮부터 술판을 벌인 우로를 바라보던 시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시완의 중얼거림에 반쯤 감겼던 우로의 눈이 번쩍 뜨이고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야!!"
"아, 깜짝아."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시완을 노려보던 우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꼬리가 아니야.. 아악.. 수치스러워.."
"뭘 또 수치스럽기까지."
우로가 잔뜩 술에 취할 때까지 얌전히 그녀를 관찰하던 동화는 이내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정신을 못 차리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시완과 시시한 말싸움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동화는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걸음쯤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들어 자리에 앉아있는 우로를 렌즈에 담았다.
이 거리면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지, 하는 생각에 벌린 거리였건만 정작 동화는 그녀가 '여우'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했다.
찰칵.
그 짧고 작은 소음에 고개를 푹 숙였던 우로가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확인한 동화의 표정이 웃음을 꾹 참느라 요상해진 것을 발견한 우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하지 말랬잖아!!"
그렇다. 수혁씨와의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로가 얻어낸 것은 토끼의 것과 같은 아주 작은, 꼬리가 되려면 더 자라나야 할 것 같은 그 무언가 였다.
"푸, 푸흡, 아니, 누님 잠깐- 그게 아니라-"
달려드는 우로를 피해 동화가 높이 치켜 들은 카메라를 자리에서 일어난 시완이 빼앗았다.
"아니,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나도 몰라!!"
잔뜩 부루퉁한 얼굴을 한 우로가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며 소리쳤다.
가만히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응시하던 시완이 이내 다시 동화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귀엽네."
시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우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턱을 괴며 투덜거렸다.
"너 지금 날 우롱하는 거니?"
"그거 뜻은 제대로 알고 쓰는 거지?"
"우이씨."
"풉."
시완에게 카메라를 다시 건네 받은 동화는 찍힌 사진을 다시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매섭게 동화를 노려보던 우로가 다시 동화에게 달려들었다.
"너 진짜 잡아먹어 버린다!!"
콩콩콩 하는 느낌으로 때렸겠지만 우로의 주먹은 크기와는 다르게 매우 매서웠다.
퍽 퍼억.
"어억, 누님 잠깐, 미안- 이제 안 할게요!"
동화의 애원에도 술에 취한 우로의 주먹이 쏟아지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한 여자가 동화에게로 떨어지는 우로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머, 폭력은 안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