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아빠는 슬슬 아슬아슬]
“다녀왔다.”
“왔어? 조금 일찍 왔네.”
“그러게......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 일은 없었고?”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나른하다는 듯이 배치되어있는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쭉 폈다.
아샤는 내 옆으로 ‘그래, 별 일 없었음 됐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번쩍 뜨며 나에게 아까보다 다른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뮤트라.”
“왜 그래. 갑자기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고.”
난 저 표정을 안다.
심지어 방금까지 겪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아내의 얼굴.......
“허브 향.”
“어, 어?!”
“뮤트라의 몸에서 허브냄새가 나. 그것도 앞쪽에만......”
허브냄새를 두른 여자가 내 앞쪽만 안았으니까.
아니, 내가 안겼구나......
“뮤트라, 칼 차고 나가더니 여자 만나고 온 거였어?”
“아, 아닌데?!”
“여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날 속이려고 일부러 칼을 차고 갔다거나.....”
“그건 아니고........”
“신분을 속이려고 칼을 차고 간 다음 모험가다 뭐다 하면서 평민의 신분으로 여자를 꼬셨다거나........”
“그것도 아닌데.....요.”
아샤 씨......
그러고 자꾸 쳐다보면 되게 부담되는데요......
“그럼 뭐야, 허브 제배지라도 갔다 왔다는 소리야!? 아니잖아!!”
“확실히 그건 아니긴 아니네......”
“뭐야, 조금은 제대로 답을 해달라고.....”
아샤는 매우 슬픈 얼굴로 나를 제대로 응시하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아, 아샤?”
“손 치워!”
아샤의 뺨에 손을 얹으려던 나에게 아샤는 내 손을 뿌리치며 나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살기보다는 원망이 많이 들어간 그런 얼굴로.....
“최악이야......”
“아샤!!”
아샤는 끝내 여관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마음속으론 쫒아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나만 시간이 정지된 듯 아샤의 발소리 외에는 고요했고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정말.......최악일지도.”
내가 지금 1년간 돌봐야하는 건 아샤다.
140년 전에 죽었고 지금 나를 적으로 돌린 내 아내가 아니라.....
하지만 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아샤에게 반박하지 못했고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도 아샤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후룰룰룰.....(이하 생략)을 찾아갔다.
“주인장, 있어?”
“어, 있으니까 얘기 해.”
“댁 아들은?”
“2층에서 쉬는 중. 올라갈 거면 올라가도 되고.”
“알았어, 고마워.”
여전히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뭐, 나오라고 하면 여전히 아래에서 나올 것 같지만.....
“여긴가.”
2층으로 올라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곳에 ‘베일 그랑리우스’라고 적힌 문이 있었다.
-똑똑
“베일, 안에 있냐?”
“어, 어!? 안에 있긴 한데?!”
“들어간다.”
“자, 잠시만!!”
뭔 사내놈이 들어가는데 잠시 기다리라고 말을 하는지에 의문을 품긴 품었다만 이미 늦었다...... 베일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샤는 그 침대의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베일을 간호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두, 둘이.....왜 같이 있어?”
“하......저질러버렸네.”
“뮤, 뮤트라?”
천계에 있을 때 벨리이르가 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힘든 시기에 자신의 처지를 쉽게 이해해주고 같이 욕해줄 사람을 찾게 되기 때문에 실연당한 여자는 곧바로 새로운 남자를 찾기 쉽게 되고 그 때를 노려서 공략하면 빠르다.‘라고......
“지금 둘이 뭐 했어?”
“아니, 아무 것도 안 했는.....”
“뮤트라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베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도중 아샤는 베일의 말을 끊어버리고 건방진 태도로 나에게 말을 하였다.
“.......뭐?”
“뮤트라도 다른 여자랑 놀고 왔잖아, 나도 다른 남자랑 조금 놀아도 되는 거 아니야?”
“아샤, 나는 네가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내가 뮤트라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더라고. 실질적으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일방적으로 내가 좋아하기만 했으니까 뮤트라가 뭘 하든 내가 욕할 처지는 아니었어. 미안해.”
“아니, 아샤.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나도 슬슬 힘들다.......내가 이런 남자가 뭐 좋다고 따라다니는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만 혼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것 같고.....”
아샤는 찢어진 가슴에서 흘러나온 눈물을 결국 참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미안해, 이런 상황 되니까 뮤트라한테 사과할 것 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억지로 끌고 나온 거, 때 쓰고 다닌 거, 싫은데 억지로 어울리게 만든 거. 정말 미안해.”
아샤는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사과를 하는 도중에도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나 정말 몹쓸 짓만 하고 다닌 것 같은 기분이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아샤, 일단 돌아가자. 돌아가서 전부 설명을.......”
“아니, 나는 왕궁으로 다시 돌아갈게.”
“뭐? 지금 뭐라고.....”
“더 이상 민폐 끼치긴 싫어서. 그냥 돌아가 보려고. 업무를 맡기고 나온 제킨한테도 미안해지고.”
“아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내 얘기를......”
“뮤트라, 난 뮤트라의 장난감이 아니야. 가지고 놀고 싶을 때 가지고 놀고 버렸다가 다시 심심하면 가지고 노는 그런 장난감이 아니야.”
아샤......그렇게 얘기하지 마.
난 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안해.
머릿속에 별가지 말들이 다 생각난다.
하지만 무엇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단지 ‘이대로 떠나는 거야?’라는 의문감만 계속해서 들고 있다.
“그랑리우스 씨. 그만 가 볼게요.”
“어? 어어......조심해서 가고.”
아샤는 베일 그랑리우스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인 후 방을 나가버렸다.
난 또 그렇게 혼자 서 있기만 했다.
이기적인 새끼.......
“저기 말이야......”
“뭔데.”
“내가 끼어 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일단 나 쟤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런 것쯤은 알아.”
“그럼 왜 정작 중요한 건 모르는 건데.”
중요한 거라니.......
그런 게 뭔데.
내가 모르고 있다고?
“저 아이, 평상시에도 맨날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지? 왜 그러겠어.”
“그냥 나한테 맞추려고 하는 거 아닐까.”
“널 좋아하고 너한테 민폐가 되기 싫어서잖아.”
“.......그게 무슨.”
“결정하나 할 때에도 너한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어도 네가 싫어하면 바로 생각 자체를 접어버리고 최대한 널 존중하고 있었다고.”
전혀 몰랐다.
누군가 뒤에서 둔기로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난......난 단지 아샤가 원하는 것만 마음대로 하고 내 의사 따위는 무시한 채 자신의 결정만 밀어나가는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난 결국 정말 나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겉에 보이는 행동에도 전부 날 생각해서 맞춰주고 자기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전부 베일 그랑리우스의 말 그대로다.
“그, 그러니까 잘 해보라고......”
“갑자기 뭔 소리야.”
“너희 둘은 마음에 들었거든. 절대 우리 부모님처럼은 되지 마라.”
“되더라도 안 깨질 자신은 생겼다. 빨갱이.”
“그놈의 빨갱이, 빨갱이. 그만 하라고!! 방금 엄청 멋진 말까지 했는데 감성이 전부 박살나 버렸잖아!!”
나는 잔소리하는 베일을 뒤로한 채 다시 여관으로 향했다.
이제야 조금은 알 듯한 기분이다.
내가 르베이나 아샤라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