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1-베류나의 기억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왔니?”
“엄마, 들어봐. 오늘 엄청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래, 그래. 씻고 와서 천천히 말해.”
“치이.....알았어.”
평온했다.
시간은 이대로 영원히 흐를 것만 같았고 그 누구도 내 곁에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있잖아, 그 아저씨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런 일이.....위험하진 않았지?”
“하하하! 역시 내 딸이군. 아주 대담해.”
걱정해주고 웃어주는 부모님이 계셨다.
음악을 배우는 나에게 필요한 건 실력이었다.
감성 따위가 아니라.....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쉬어라.”
“아빠도 담배 그만 피우시고!”
“하하.....그게 쉽게 안 되네.”
“정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가족.
흔한 가족에 흔한 딸.
흔한 생활에 흔한 삶.
그게 내 전부인 줄 알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였다.
처음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그래, 좋아하는 남자애가 음악을 매우 사랑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처음 음악을 시작하였다.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도 있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마력을 세밀하게 컨트롤하여 보다 아름답고 특유한 음색을 내고 싶었기에 마력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음악을 배우며 그와 점점 친해지기도 하였고 서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까지 가게 되었다.
각종 대회에 같이 출마하기도 하며 꽤나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날을 보내던 어느 여름.
그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음악을 선보이며 나에게 고백을 하였다.
우리는 음악으로 맺어져 음악으로 같은 인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해가 지날수록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매우 어려워졌고 나와 그는 더욱 열심히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서로 만나는 일도 줄어들 정도로 나는 열심히 연습했다.
그에게 어울리고 그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
“당신 개인의 재능은 좋지만 파트너의 실력이......”
“파트너요?”
“네, 당신의 실력은 저희 심사위원도 놀랄 정도의 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좋지 않아 그런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 파트너를 버리겠다고 약속하면 저희 쪽에서 아낌없는 서포트를 해드리죠.”
“...........”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심사 위원에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간 그를 기다리며 내가 들었던 얘기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음악으로 그를 완벽히 꾸며주겠다는 그런 내 마음이 실력에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연습하고 연습해서 재능은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결국.....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미안, 그리고 고마워.”
“아.”
“우리 그만하자.”
“아아아......”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하늘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새까만 빛으로 변해버렸고 나의 삶 자체가 끊어진 느낌이었다.
울부짖어도, 울부짖어도......지금의 이 마음은 전혀 내 가슴에서 떨어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떨어뜨리려 할수록 더욱 강하게 내 심장을 부여잡고 나를 아프게 조여 왔다.
음악과 그를 생각하던 게 전부인 내 인생에 모든 것이 끊어지고 단절되었다.
주위의 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도 나에겐 불행이고 고독이었다.
가능하다면 소리라는 것 자체를 모두 없애버리고 싶었고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 단절된 세상에 살고 싶었다.
“----. 오늘도 안 나올 거니?”
“엄마, 미안.”
“그래.....알았어. 밥은 여기에 두고 갈게.”
시간이 약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내 마음은 점점 가면 갈수록 악화될 뿐이었고 심장은 찢어발겨졌다.
이제 한계라고 손을 놓은 순간, 더 이상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감정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그런 세계.
이 세상은 마치 시작부터 썩어빠져 있었고 선과 악의 경계로 물들어 있었다.
-콰광!!
“뭐야.....”
눈앞에서 집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덤덤하게 ‘뭐야.....’라는 두 글자를 말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고독하게 있는 공간을 무너뜨렸다는 화난 감정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통이 필요하니?”
“누구야.”
어느새 내 방에 들어온 한 금발의 여자.
머리에 뿔이 있는 걸로 봐서 악마인 것 같았다.
“날 죽이려는 건가?”
“네가 원한다면 너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사람?”
신 같은 건가.....애석하게도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신......만약 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라면.....나는 신을 찢어발겨 죽여 버릴 것이다.
“그쪽이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다는 거지?”
“뭐든지. 힘, 권력, 재물, 복수, 야망. 모든 걸 들어줄 수 있어.”
“뭐든지.....말인가.”
“그래, 뭐든지......”
달콤하다.
너무 달콤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난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아니, 누구와 계약을 하던 나는 대답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름이 뭐지?”
“이름? 난 그런 거 없어. 내 이름은 이미 한 번 죽었을 때 지워져버렸거든.”
“그럼 뭐라 부르면 되지?”
“간단하게 그레이스라고 불러.”
이미 한 번 죽은 존재라......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 같지만 꽤나 마음에든 것 같다.
“그레이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후훗, 좋은 선택이야. 따라와. 너에게 맞는 아이를 소개시켜주지.”
“크큭......”
“왜 웃는 거지?”
“아무 것도 아니야.”
왜 웃긴......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고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웃길 따름이지.
“너는 이름이 뭐지?”
“나.....----.”
“그래, 넌 앞으로 베류나라고 부르지.”
“하필 내 이름과 전혀 상관도 없는 이름인건가.”
“넌 나랑 닮았거든.”
바꿀 이름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다.
단지, 지금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이 조금 이상한 기분이지만.....
“그럼 가지, 베류나.”
나는 그렇게 그레이스라는 여자에게 혈마를 소개받았다.
강제로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내 허락을 맡아야 성사가 되는 계약.
내 피를 매개체로 계약을 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난 저 혈마에게 먹혀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목표를 이뤄 그 남자가 다시 날 돌아보게 만들 수만 있다면........
뭐든지 이뤄내 보이겠다.
“--, ----?! 너 ----야?”
“그런 이름. 내다버렸어.”
“나.....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아, 내 예전 남친이자 파트너.”
“기,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무슨 용건이야.”
과거에 내 파트너였던 그 남자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실실 웃으며 나에게 제안을 하였다.
“너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도 실력은 되는데.....혹시 너만 괜찮다면 다시 예전처럼 파트너를....맺지 않을래?”
분명히 내가 바래왔던 결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볼품없고 겁쟁이에 단지 추악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파트너를 맺어서 내가 얻게 될 이익은 뭐지?”
“베류나, 혹시 너만 괜찮다면 다시 사귈 생각도 하고 있어. 그날 그렇게 버리고 가서 미안해.....정말.....”
“그래, 사귀자.”
역겹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워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싶다.
남들 앞에서 위선을 떠는 지금의 모습도 날 이용하려고만 하는 속내도 전부 맘에 들지 않는다.
마치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지금의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저, 정말? 고마워 ---.....아니, 베류나.”
“아니야,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니.....?”
순간 밝아졌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정말 속물인 인간.....
“죽어줘.”
“으, 으아악!!! 사, 살려...!!”
“너 같은 인간.....정말 불쾌해.”
“.........”
그건 내가 원한 해피엔딩으로 스토리를 이어나갔지만 그 엔딩은 누구보다 슬프고 누구보다 잔인한 그런 새드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