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도, 지율과 시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모임 이후부터 슬슬 연말이 다가오자 시윤의 일정도 바빴고 지율 역시 졸업을 앞두고 있어 그에 대한 과제로 정신 없이 바빴다.
강의가 끝나고 지율은 서둘러 과제 할 부분을 체크 한 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윤씨가 반 차내고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온다고 했는데….!’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두 사람이 오늘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날 이였다. 얼굴을 볼 생각에 지율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전 날 장을 봐둔 것을 생각하며
가고 있었다.
무엇을 해줘야 맛있게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라는 고민과 함께 요리에 자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고민이 머릿속을 오갔다.
고민이 오가면서도 이런 소소한 고민 조차 지율은 설레기만 하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자신을 생각하면 굉장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아, 과일이 없어….!”
지율은 전날 시윤과 통화하면서 한가한 날 들리면 저녁 요리를 해주겠다고 하자, 마침 시윤이 조금 한가해 진 상황이라 다음 날 반 차를 내고 저녁 먹으러 가겠다는 소리를 듣자 마자 서둘러 장을 보러 갔는데, 요리 할 재료들만 잔뜩 사고 과일을 사는 것을 잊어버렸다.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과 함께 처음으로 자신이 요리를 대접한다는 생각에 잊고 만 것 이였다. 지율은 서둘러 마트에 들려 과일을 사서 품에 안고 집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가니 집 문 앞에, 키 큰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아직 올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키가 큰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자 지율은 이상했다.
아직 시윤이 오려면 2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이르게 도착했다는 생각에 뛰어가다 말고 천천히 살피며 걸어갔다.
“이렇게 뛰어오다니, 기다린 보람이 있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율은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누구인지 확인 하자,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서서 바라보았다.
“여기, 왜 왔어?”
그녀를 반긴 사람은 그녀가 기다린 시윤이 아니라 그토록 피해 다니던 연우가 서있었다.
“학교로 찾아가도 보기 힘들고, 한 달이나 헛고생을 좀 했더니… 차라리 찾아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누가 반긴다고… 돌아가.”
지율이 돌아가라고 말하고 무시하고 그를 뒤로 한 채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닫히려는 문을 잡고 힘으로 밀고 연우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짓이야. 왜 자꾸 쫓아다니는 건데, 학교에서도 하지 말라고만 몇 번째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신고라도 해야 그만 할거야?”
지율이 날카롭게 말했지만 연우는 그저 웃는 얼굴로만 말했다.
“여태 신고를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제대로 상대를 해줬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겠어?”
“상대를 해줬다면, 더 심하게 나왔겠지.”
“내 말을 생각도 안 해봤을 테니까 그런 거지.”
“알면 돌아가. 나 오늘 중요한 사람 오기로 했어, 내 애인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돌아가.”
지율이 시윤과 저녁 약속이 있으니 돌아가라는 말에 연우는 조금 비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은 제대로 들으려 하지도 않고 거부만 하면서 새로 생긴 그 애인과의 저녁 약속이 있으니 나가라고 통보만 하는 지율이 조금 얄미웠다.
“그 애인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왜 오빠라고 부르지 않아?”
“…..”
“나한테는 곧 잘 오빠~ 라고 하면서 애교도 많이 부리고 했는데, 그 남자는 알려나 모르겠네. “
연우의 말에 지율은 그저 무시하기 바빴다.
모른 척 들어가 거실에서 과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지율의 뒤통수를 보며, 연우는 계속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일부러 나 무시 하는 거야? 나 그래도 너 돌아보게 만들 수 있어.”
돌아보게 할 수 있다는 연우의 말에, 지율은 기가 찼지만 계속 무시하기로 했다.
“그 남자는 알아? 우리 사이는 네가 먼저 나를 좋아해서 시작된 사이라는 걸….”
연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울컥한 지율은 행동이 멈칫 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지만 멈칫거린 그녀의 모습을 본 연우는 실소를 터트리며 살며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얼굴 붉히는 네 얼굴이 예뻐서 너희 반으로 찾아가 이렇게…”
연우의 목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리자 지율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서 그를 보자 바로 앞에 연우가 서있어 식탁에 기댄 채로 지율이 서있고 연우가 내려다 보는 자세가 되었다.
“누가 들어오래.”
“거봐, 이렇게 나는 널 돌아보게 할 수 있다니까? 그래 그때도 반에 앉아 있던 너를 찾아가 이렇게 너를 내려다 보며 먼저 말했지.”
“…..”
연우는 점점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로 다가오면 올수록 지율은 허리를 더 식탁 쪽으로 뺐다.
“왜 입술에 닿을 까봐? 그런 거 엄청 싫어했잖아. 그 남자에게는 어땠어?”
“떨어져.”
떨어지라는 지율의 말에, 연우는 입술을 지나쳐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때도 너의 귓가에 대고 말했어. 사귈래? 하고.”
“……”
“그리고 지금은 입에다 무슨 짓도 안 할거야. 내게 돌아오면 하면 되는걸.”
귓가에 속삭이던 연우의 입이 다시 얼굴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예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내가 너라는 여자의 가치를 알았다면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
시간을 들여서 자신이 기다렸다면 지금 지율의 옆에는 자신이 서있을 거라고 연우는 확신했다.
그녀의 긴 머리도, 누군가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도, 사랑한다는 말도 전부 다 자신의 차지였을 거리고 생각했다. 게다가 집안의 배경도 완벽했던 그녀.
너무나도 아까운 여자, 처음 만났을 때도 배경을 몰랐을 때도 자신의 조건을 다 무시하고 만나보고 싶었던 여자, 헤어지고 나서 그저 지나가는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생각은 남았던 여자.
연우는 자신이 더 빨리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이 아까웠다.
잠시 더 내버려 두고 어느 누구도 사귀지 않는 다는 그 소문을 더 즐기고 싶었는데, 그 화가 이렇게 되고 나니 너무나 아까웠다. 자신의 우월감이 다 무너져버렸다.
무너진 우월감은, 지율을 다시 돌아오게 해서 찾으면 된다. 연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는 지율의 앞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 시키고 싶었다.
“이제, 우리 좋은 기억도 같이 나?”
연우의 말에 지율은 대답 대신 그의 몸을 밀쳐내고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짜악!
“…..”
“내가 왜-.?”
생각지 못한 지율의 행동과 말에 연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날 리가- 없지. 한 달 내내 쫓아와서 대화 좀 해보자고 하려던 그 대화가 이거야? 정말…”
보기가 거북한 사람을 마주하며 하기 싫은 대화만큼 진저리가 나는 상황은 없다.
악몽을 제공한 사람과 마주하는 것만큼 끔찍한 상황은 없다.
끝나가는 악몽을 다시 시작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당신은 내 악몽이야.”
“악몽을 준 사람이 없애 줘야지 않겠어?”
“눈 앞에서 사라져주면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은데. 같은 말 돌려줄까?”
“……”
“정말 질린다, 질려…”
“….”
“이렇게 대화 하는 것도 지겨우니까 그냥 가 제발…!”
“싫은데? 지금 그 모습도 색달라서 좋아~”
능글맞게 약 올리는 연우에게 감정이 폭발한 지율은 식탁에 놓인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라지지 않는 상처가 꿈으로 나와 자신을 괴롭혔는데 현실에 까지 나와 자신을 괴롭혔다.
이 악몽이 싫었다, 아물어가는 상처에 다시 상처가 나는 것도 싫었다.
악몽은 현실이 아닌 꿈으로도 충분했다.
현실의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요소이자 지워버리고 싶은 사라져가길 바란 기억의 조각일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춰내서 자신의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하는 그가 미치도록 싫었다.
약 올리는 그가 미웠다. 소리지르지 않고서, 물건을 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가 없었다.
“가…! 제발 나가! 여기 있지마! 내가 당신한테 남은 감정은 이것 밖에 없으니까!!! 그냥 가!!”
물건을 던지며 거리를 벌려가는 지율에게 연우는 날아오는 물건을 피해 그녀와의 사이를 좁혀만 갔다.
사정없이 날라오는 물건이지만, 이성을 잃은 사람은 목표를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닌 그저 잡히는 대로 던지는 것뿐이라 피하기는 쉬웠다.
“다가오지마!”
다가오지 말라는 지율의 말에도 연우는 멈추지 않고 다시 거리를 좁혀갔다.
“내 팔 잡지마! 놓으란 말이야!”
늘 자신을 향해 웃기만 했던 여자가, 자신의 앞에서 울기만 했던 여자가, 자신의 존재를 가장 빛내주던 여자가 이제는 자신을 보며 냉대하고 무시하고 이성을 잃기 까지 했다.
그럼에도 연우는 그녀를 두고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잃은 이성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은 이기적인 생각만이 들었다.
팔을 잡고 놔주지 않자, 거세가 저항하며 소리지르던 지율은 그대로 주저 앉았다.
지율이 주저앉자, 연우 역시 똑같이 앉아 말했다.
“그 악몽 내가 지워준다니까. “
“……”
“내게 돌아오면.”
주저 앉은 지율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하는 연우에게 다른 곳에서 대신 대답이 들려왔다.
“누가 너한테 돌아간다고 했어? 손목 놓지 그래.”
“또, 방해하러 왔네.”
대답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두 사람이 돌리자 저번과 같은 상황으로 시윤이 서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와보니…. 이런 상황이라… 게다가 방해라니? 오늘은 내가 먼저 선약인데, 방해는 그쪽이 한 것 같은데?”
“아… 그런가?”
“또 이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이번에는 참지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우습게 들리는 건지 학습 능력이 많이 부족한 건지. 궁금하네? 대학생이라면 상식은 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시윤의 표정과 목소리가 싸늘하게 바뀌어갔다.
바뀌어가는 표정에도 연우는 표정을 유지한 채 손목 역시 놓지 않았다.
놓지 않은 손목을 향해 시윤은 들고 있던 서류가방으로 연우의 손을 쳐버렸다.
손이 떼어지자, 바로 지율의 곁에 가 그녀를 보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서류가방 든 남자 중에 내가 제일 멋있지 않았어?”
그의 농담이 들려오자 지율은 방금 전까지의 지친 표정은 사라지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시윤은 다시 한번 그녀를 위한 농담이 섞인 진담을 뱉었다.
“원래는 퇴근 하고 온 남자의 섹시함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시윤의 말에 그의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바라봤다.
“그 전에, 악의 무리에서 공주님부터 구하는 멋진 기사부터 해야겠네. 또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 치고 못생긴 남자는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