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자고 일어난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벌써 12월 말이 다 되어가는데, 시윤씨 연말에도 바쁘겠지?”
연말이 다가오자, 지율은 시윤과 같이 연말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호텔 같은 경우는 연중 무휴일뿐더러, 아무리 시윤이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연말은 항상 바쁜 업계였다.
“연말에도 바쁘겠지만, 지금처럼 조금 무리 해서 한다면 말일은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아…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다가는 시윤씨 건강이 나빠질 거야.”
“그래도 우리 만나면서 처음 보내는 연말이잖아. 조절해가면서 할게 걱정하지마 나 믿지?”
“세상에 가장 믿으면 안 되는 말이, ‘오빠 믿지?’라고 하던데…”
지율의 말을 듣자, 시윤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연상이잖아…”
연상이라는 말에, 시윤은 밥을 먹다 멈추고 지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이 참에, 한번 오빠라고 불러봐.”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시윤이 말하자 지율은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목에 걸려 도무지 넘어오지를 않았다.
“오…오…”
아무리 시도해도 나오지 않는 ‘오빠’라는 말에 결국 지율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못하겠어. 처음부터 시윤씨라고 불러서 그런지 이게 더 편해. 꼭 오빠라고 불러야 애정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럼 굳이 부르지 않아도 애정이 넘친다는 뜻도 되는 거네?”
시윤의 갑작스러운 말에 지율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시윤씨 좋아하니까 당연히 애정이 있지. 시윤씨 생각보다 많이.”
“정말 다른 대화는 다 솔직하게 말하면서 꼭 이렇게 말하면 부끄러움을 탄단 말이야? 그래도 많이 솔직해 졌어, 전에는 말을 돌리기 바빴는데.”
시윤은 지율이 표현에 정말 많이 솔직해졌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말을 아예 하지 않거나, 돌리기 바빴는데 요즘은 조금씩이라도 인정하기도 하고 직접 표현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며 시윤은 더 행복해져 갔다.
지율이 자신의 곁에 있고 나서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시윤은 만족했지만, 그녀는 곁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노력하면 같이 노력하려고 했다.
혹시나 자신으로 인해 맞춰줘야 하는 부담감이 생길까 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점점 노력해갔다. 그런 지율을 보며 늘 드는 생각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사랑스러운 행동만 골라서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어쨌든 연말까지 또 보기 힘들겠네?”
“주말 중 하루는 같이 있으려고 노력해 볼게.”
주말 중 하루는 자신의 곁에 있도록 노력해 본다는 시윤의 말에 지율은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아니, 어차피 2주 남았는데 연말도 마침 주말이고 한 주 정도는 나도 괜찮아. 집에서 쉬었으면 좋겠어.”
“난 보고 싶은데…”
보고 싶다는 시윤의 말에 지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돼, 정말 나 시윤씨 집에서 쉰다는 소리 한번도 못 들었어. 정말 몸을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내일이랑 다음 주는 꼭 쉬어.”
“난 널 보는 날이 내 피로를 푸는 날인데?”
“정말 나랑 미래를 함께 하고 싶으면 관리하라고 할 때 해. 나 안 그러면 바로 대학 졸업하자마자, 엄마한테 부탁해서 해외 인턴으로 보내달라고 해버릴 거야.”
해외 인턴이라는 초강수를 지율이 무기로 들고 나오자 결국 협박에 진 시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주 주말은 집에서 쉬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너는 그 주 주말에는 뭐 하려고?”
“나 금요일에는 오래간 만에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집으로 오라고 하셔서 주말 동안 본가에서 지낼 것 같아.”
집에라도 있으면 쉬었다고 하고 찾아오려고 했더니 지율이 본가로 들어간다고 하자 무척 아쉬움이 밀려오는 시윤이었다.
시윤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자, 지율은 새침하게 시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오려고 했지?”
지율의 말에 조금 찔린 시윤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수상한데.”
“아니야, 정말 집에서 쉴게. 해외로 도망가면 어떡해…”
결국 시윤이 스스로 집에서 쉬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자, 지율은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식후 간단하게 과일까지 먹고 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다시 새로운 한 주를 위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코트를 입고 신발을 신고 현관 앞에 서자, 시윤은 물론 오늘 따라 지율까지 더 울적해졌다.
헤어짐이 늘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 따라 더 헤어짐이 아쉬운 두 사람은 서로 꼬옥 끌어 안으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조심해서 가요. 밤이니까 운전 특히 조심하고.”
“알았어.”
“월요일부터 다시 파이팅!”
“너도 시험이지?”
“응, 난 자신 있어. 열심히 해왔는걸?”
“널 믿어, 열심히 하고 밥 꼭 챙겨 먹고.”
“시간 나는 날은 연락 줘요. 점심 같이 먹어.”
그녀의 말에 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푹 쉬어.”
“응, 도착하면 연락 줘야 해.”
시윤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고 돌아갔다.
시윤이 돌아가고 뒤를 돌아 자신의 집 안을 보니 잠시 지내다가 갔을 뿐인데도 허전한 느낌이 돌았다. 그 허전한 느낌을 지우고자 지율은 서둘러 뒷정리를 시작했다. 뒷정리를 끝내고 침대로 돌아와 누워 시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히 가고 있겠지? 사고 나지 않게 갔으면 좋겠다.’
그의 안전을 바라며 지율은 핸드폰을 자신의 옆에 둔 채, TV를 켜고 아무 채널이나 돌려 보고 있었다.
***********
- 딩동.
벨을 누르자, 바로 인터폰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어머니, 아들이요. 문 열어주세요.”
“어머, 너 오늘은 카드 키 들고 가지 않았니? 잘 들고 다니지… 들어오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으로 들어오자, 미연은 시윤을 맞이해 주었다.
“저녁은?”
“지율이랑 먹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잘했구나, 한번 데려오지 그러니… 엄마도 보고 싶은데.”
“조만간 데리고 올게요.”
조만간 지율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에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피곤하지? 얼른 씻고 푹 쉬렴.”
“네 어머니 푹 쉬세요. 저는 그럼 올라가 볼게요.”
시윤은 미연에게 인사를 한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어 걸어놓은 뒤 침대로 가서 먼저 몸을 뉘었다.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바로 지율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그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도착했어, 도착하자 마자 전화 한 거야. 뭐하고 있었어?”]
뭐를 하고 있었냐는 그의 질문에 지율은 TV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TV를 보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쉽게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침대에 누운 채 보고 있는 그녀는 참 귀여울 것 같았다.
[“벌써 보고 싶다.”]
[“나도…”]
[“내일은 뭐해?”]
[“집에 있지? 아! 시윤씨 분명 나는 쉬라고 했어!.”]
혹시나 자신이 찾아올까 봐 바로 지율은 쉬라고 했다며 엄포를 놓자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니까-.”]
그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지율은 그에게 씻고 온 거냐 물었다.
[“아직, 곧 씻으러 가야지.”]
아직 씻지 않았다고 말하자, 지율은 빨리 씻고 와서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알았어 그럼 씻고 다시 연락할게.”]
[“알았어요~”]
[“사랑해.”]
시윤이 사랑한다고 하자 잠시 전화기 너머로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시윤씨 많이 사랑해.”]
긴장을 많이 한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 자신을 말에 답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느라 말이 없었던걸 생각하니 다시 한번 더 시윤은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나 이제 진짜 씻고 올게.”]
[“다녀와~”]
[“씻는 사이 자는 거 아니야?”]
[“빨리 씻고 오기나 해-. 기다려 줄 테니까.”]
기다려준다는 그녀의 말에 시윤은 알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 샤워하러 갔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시계를 보자, 시간은 어느덧 11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지율에게 바로 전화를 할까 싶었지만, 오늘 유난히 피곤해 보였던 지율의 표정을 생각하니 전화보다는 먼저 메시지를 보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 유난히 피곤해 보였는데 먼저 보내보고 전화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시윤은 지율에게 아직 일어나 있는지, 뭐하고 있는지의 내용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잠시 기다리며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들리는 소리는 시계의 시침 소리뿐 핸드폰의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이 진동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소리모드로 바꾸고 뒀기 때문에 못 들을 리도 없었다.
그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메시지에 결국 그는 핸드폰을 잡아 켜보니 30분째 답이 오지 않았다.
‘자나…?’
시윤은 다시 메시지를 보내볼까 싶었지만, 오랫동안 답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가 생각하기에 지율은 잠이 들은 것 같았다.
그녀의 답만 기다리던 시윤은 작은 한숨을 ‘휴’ 한번 내쉬고 핸드폰 알람을 맞춘 뒤 책과 함께 옆의 작은 서랍에 올려두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우리 공주님… 기다려주겠다고 해놓고는… 먼저 자버리네…”
그렇지 않아도 지율과 보지 못하는 시간도 많은데 쉬라면서 내일도 보지 않겠다고 하는 그녀와 통화라도 오래 하고 싶었던 그는 내심 그녀가 일찍 잠들어 버린 것이 조금 서운했다.
“얼굴도 못 보는데,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했더니…”
서운하면서도 그래도 잠이 들면 푹 자길 바라는 그의 바램, 그 역시 눈을 감은 채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악몽을 이겨내면서 잘 수 있기를, 그녀의 꿈에 자신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자신의 오늘의 꿈에도 그녀가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그도 긴 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뚜뚜뚜뚜뚜-. 뚜뚜뚜뚜뚜-.
전날 그가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람 소리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시간을 보니 10시, 일어날까 더 누워있을까 찰나의 고민을 하던 시윤은 오래간만에 집에서 쉬는 김에, 조금 더 자고자 다시 핸드폰을 두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하려 하자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뒤집어 쓴 자신의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해서 쉬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보러 직접 본가까지 주소 물어봐서 찾아왔는데 잘 거야?”
그가 매일 보고 싶어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놀라 이불을 걷어내고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