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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마리아
작가 : 해우Manatee
작품등록일 : 20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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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5화
작성일 : 17-11-03     조회 : 485     추천 : 0     분량 : 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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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작가의 성탑

 

 아직 쌀쌀한 계절, 백작의 낡은 성탑에서는 날카로운 만담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렌지색 드레스와 노란 아얌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차림새에 어울리게 차린 만다린 차가 아깝게 식어가는 걸 모르고 이야기를 부어냈고, 그녀의 이야기 짝은 지루한 라디오 채널을 듣는 듯 무신경한 태도로 그의 향차를 홀짝였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닷새만 기다리면 남쪽 땅을 다 가져와서 영지로 보상하겠다고 하더니, 한해가 지나더니 솔거 노예들까지 데려간다고 억지를 썼었지 않은가요? 정원에 쓸 노복이 없어서 향 좋은 차가 올라오지를 못하고 있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 부랑아들이 영지 주변에서 자유민이랍시고 들들 거리고 다닐 걸 생각하면 지난번 요청도 충분히 도를 넘었었어요."

 

 은은한 레몬 향이 나는 부인은 화를 내면서도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고 어린 라렐리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곧 그녀 나름대로 곰 인형 다스 씨와의 만담을 가져야만 했기에 레몬 부인의 불안은 이내 잊어버렸다.

 

 "부인, 전쟁터를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반병 한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세 명의 보급병과 노동자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이 집에는 아직 100명이 넘는 비복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최후방에서 전장의 군인들을 지원해준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르돈 야전의 승리는 백작님께도 혁혁한 공이 될 겁니다."

 

 티타임이 늘어지고 품위 바른 신사인 다스 씨마저 지루해하지만,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온 올리 남작의 영웅담에 아무도 자리를 선뜻 뜨지 못한다. 라렐리는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에 이 지루한 남작을 다시 전쟁터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느닷없이 사용인들을 데려간다면 제힘으로는 여기 꼬마 백작씨도 모시기 힘들 거에요.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실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야 제가 아가씨 이름으로 허락 드릴 수 있어요."

 

 부인은 자충수를 뒀다고 생각한다. 한없이 느긋해 보이는 이 젊은 장교는 거저 얻은 기회를 그냥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혹여 집안 식구들이 갑자기 이렇게 사라진다면 부인께서도 생활하시기 불편하실 테니 우리 대대에서 소대 하나를 차출해 임시 사용인으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부인이 눈을 질끈 감는다.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데려가서 전쟁준비를 시키고 군인들을 데려와서 정원사를 시키겠다니.'

 

 "동의 하십니까?"

 

 역시나 너무 뻔한 일이었다. 이 멀끔하게 앉아있는 장교는 그녀와 말실랑이나 벌이자고 그의 시간을 할애하고 온게 아니었다. 여유롭지만 서툴고 과감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틀림없이 더 높은자의 하수인이 분명한 이 남자 존재가 그녀의 신분도 백작의 비밀도 도르테가의 보석도 그의 주인은 모든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현 백작님이자 대위님의 허락입니다."

 

 티타임이 고조된다. 그날의 올리 남작은 다스 씨에게 과하게 무례했고 도시의 신사 다스씨도 더이상 지루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2) 달의 바다

 

 '기어코 앉은자리에서 끝내는군'

 

 바닥에 주저앉은 광물학자의 눈은 바쁘게 움직인다. 늙은 앉은뱅이의 손은 바쁘게 목청 색이 빛나는 상자들을 돌아다니며 가장 가치 있어 보이는 보석들부터 손에 집어 들고 두드려본다. 수백 가지가 뒤섞인 간혹 손가락 -아마 무명지였을- 에 꿰인 채로 늘어진 보석을 꺼내 붉은 얼룩을 닦아내고 유침을 떨어뜨리곤 한참을 뜯어본다. 페리도트, 버델라이트, 모조석 그리고 가끔 진품 에메랄드 늙은 전문가는 상자의 보석들이 줄어들 수록 점점 식은땀을 흘린다. 그가 찾는 보석은 청광이 짙은 녹색이어야 하고, 결정의 깔끔한 패턴을 휘감는 자연광은 보석이 스스로 빛나 듯 그 모든 면으로 굴절되어 견자를 비추며, 먹빛의 부유물이 가공면의 세방향으로 빛을 삼켜 누구도 그 보석의 긍경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여기엔 없소. 망할, 이젠 아무거나 막 가져오는군."

 

 군모를 코까지 눌러쓴 것 같은 사병 둘이 늙은이를 휠체어에 앉히고 담요를 덮어줬다. 조금 더 뚱뚱한 군인이 휠체어를 밀어주려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을 하며 바닥에서 시간을 보낸 것에 기분이 상한 늙은이는 제 손으로 휙휙 밀고 나갔다.

 

 "선생님 원사님께서 이번 분기 보고를 미리 받아보시길 원하십니다."

 

 그가 있는 부대가 고르돈 야전에 투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물학자는 자신이 그 유명한 에메랄드를 찾아낼 거라고 확신했고, 하나밖에 없는 그의 아들이 당원 추쳔을 받을 거라는 기대에 차 북쪽의 고성들을 함락시키는 전투에 기꺼이 따라나섰다. 하지만 북부지역 세개 도시의 신사들과 숙녀들의 손가락을 모두 모았음에도, 시골 구석구석의 박물관을 모두 뒤지고 관리자를 데려와 추궁했음에도 그 유명한 달의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고, 주임원사는 그가 기울인 노력만을 골라서 치하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고르돈에서 일주일이 넘었군.'

 

 보석은 그를 발견하고는 멀리 달아나버릴 것이다.

 

 "선생님?"

 

 "이제야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고 전해주시게, 고르돈 북쪽에 귀족령은 하나밖에 없으니 이제 곧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을 걸세."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광물학자는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안심을 찾기 위해 하던 늘 같은 대답만을 받던 질문을 습관적으로 던졌다.

 

 "혹시 집에서 온 전보는 없는가?"

 

 "네, 없었습니다."

 

 마른 병사가 건네는 무미건조한 대답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

 

 "원사님께서는 작업 결과가 미진하면 젊은 장인을 휘하에 두어 선생님을 보조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뚱뚱한 병사가 전하는 말은 노인에게는 너무 노골적은 괴롭힘이다. 그의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는 조건이지 않았던가. 지금껏 높다고 생각했던 야전막사의 천장이 곧 무너질 듯이 그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그의 상상속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그의 아들은 적이 던진 수류탄에 휘말리고는 다리에 유탄이 박혀 괴로워 한다. 북부군이 점점 다가오지만 아무도 그를 데려가지 않아 그는 앉은뱅이 자세로 기어 도망간다. 20년 전의 전투에 그의 얼굴만 아들의 얼굴로 바뀐 상상은 3년전 남북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부터 노인의 의식 저 아래에서부터 그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었다. 스스로 휠체어를 끌고 움직인지 얼마 못 가 앉은뱅이 광물학자의 팔이 맥없이 힘이 빠지고 둘 중 조금 더 마른 병사가 휠체어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3) 남쪽의 남작 부인

 

 곧 서리가 가실 계절이 되었다는 듯이 얼음꽃 사이로 만개한 데이지 꽃들은 그 해의 빛나는 가을을 담은 무화과의 속살인 듯한 꽃잎을 아침 해를 향해 뻗어있다. 데이지의 꽃말을 닮은 소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자기들끼리 지껄이는 제복쟁이들 사이로 바쁘게 움직였다. 백작 아가씨는 서리가 가시지 않은 아침 데이지를 보고 싶어 했고 볼이 빨간 소녀는 옷소매로 콧물을 슥 닦으며 쟁반을 들고 뛰느라 바빴다. 소녀의 키 높이보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들의 몫일 뿐이지 소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대들은 조국의 부름을 받는 영예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저 소녀 역시 조국의 부름에 동등하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세상에 주여, 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어린 것입니다. 아씨의 배냇동무로 자라 이제 갓 열 살이 된 아이입니다. 어르신"

 

 "아이들이 조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네. 당연히 조국의 의무를 배울 기회를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좋은 꽃이야 틸리아. 이걸 보고 싶어서 아까부터 기다렸어. 우리 같이 루안할머니한테도 봄꽃이 왔다는 걸 보여주자."

 

 "그렇지만 아가씨, 밖에는 지금 남부에서 온 남자들로 가득 차 있는 걸요. 심지어 아까 어떤 사람은 루안 할머니를 화나게 했다구요."

 

 "루안 할머니한테 말대답했다면 낭패를 많이 봤겠는걸. 그 아저씨한테 이 꽃을 주자. 벌써 다 녹아버려서 루안 할머니한테 주면 치즈 파이에 넣어버릴지도 몰라."

 

 라렐리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흐물거리는 꽃을 두 손가락으로만 집어 들고는 키득거렸지만 틸리아는 화제를 돌리지 않는다.

 

 "아가씨, 남부에서 오는 것들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요. 작년에 햄크 아저씨랑 다른 아저씨들을 다 끌고 가버린 것도 남부고 우리가 레몬하고 크림을 못 먹게 다 가져가 버린 것도 남부래요. 남부는 우리한테서 좋은 것만 골라서 뺏어갔으면서 할머니나 못살게 구는 이상한 아저씨들을 잔뜩 보내버린 거에요. 로벨리아 부인께서 읽어주셨던 못된 남작 부인이 남부에 살고있는게 분명해요. 자기의 지루한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고 환호해줄 사람들을 납치한 거죠. 남부라는 데에 갈 일이 생기면 레몬 사탕이랑 햄크 아저씨는 꼭 구해와야해요."

 

 틸리아의 이야기가 남부로 끌려간 요리사 영감의 구출기로 새는 동안 레몬과 만다린 향기가 나는 오렌지색의 벨벳 코트를 입은 로벨리아 부인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는 표정으로 주방의 발 받침대에 올랐다. 그녀의 주변에는 이젠 여자밖에 남지 않은 저택의 사용인들이 침묵한채 몰려있다.

 

 "사용인 여러분, 전쟁터에 나가 계시는 도르테 백작님과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은 작년 이 계절에 남자 사용인들을 데려가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러분들의 헌신을 원하신다. 남부에서는, "

 

 조급증이 난 하사관은 앞으로 나오면서 부인의 말을 끊었다.

 

 "남부에서의 전쟁은 지금 이 시각에도 진행 중이다. 자네들은 조속한 노동을 위해 오전 안으로 출발할 준비를 모두 끝내기 바란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남자 사용인들처럼 귀족령을 떠나 자유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

 

 저택 안의 불안한 공기가 만드는 정적을 감지한 듯 저택의 정원에는 50여 명의 일개 소대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사용인들이 떠나길 기다린다.

 

 "우리는 중령님의 특명을 받고 이곳에 왔다. 이 저택 안주인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되 우리의 제1 목적은 '달의 바다'라고 불리는 보석을 회수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사소한 단서도 빠짐없이 보고하고 집주인들과 직접 충돌하는 일은 없도록 한다."

 

 데이지의 꽃말을 닮은 소녀는 남부로 끌려갔다. 군인들의 트럭에 오르면서 그 소녀는 이 사람들은 남작 부인이 보낸 것 같이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물에 불어터진 데이지를 들고 있는 귀족 소녀는 레몬 부인의 품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아무것도 작은 소녀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속옷 장을 뒤진 것도 그들이었고 곰 인형 다스 씨의 머리와 배가 갈라진 것도 그들의 짓이 분명했다. 아빠와 햄크 아저씨, 루안할머니에 틸리아까지 가져가 버린 남부의 남작 부인은 아직도 더 가져갈게 남았는지 그녀의 삶을 노골적으로 뒤져보고 있다.

 

 

 (4) 랜다 마야크

 

 사방 수십만 헥타르의 거대한 땅에서 옥수수를 만들어 베르체 인구의 반을 먹이던 비옥한 대지이자, 겨울의 아침에 생기는 붉은 수평선과 양들에게 피리를 불어주는 외로운 양치기의 이야기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낭만적인 들판으로 모두 유명한 고르돈 평야는 수천 명의 사람과 수만 마리의 양의 피로 물들어 그의

 야트막한 대지에 고혹적인 붉은 얼음꽃을 만들었다. 고르돈의 넓은 평원에서 양치기 개들이 길을 잃지 않고 다닐 수 있게 평원 어느 끝에서든 어렴풋이 찾을 수 있는, 그의 좁고 높이 서 있는 모양새를 따 양치기들의 언어로는 랜다 마야크 - 땅의 등대 - 라 불리는 이 야산의 존재는 일 년에 걸친 테움군 두 개 사단의 고르돈 공략에 겨우 베르체군의 일개 여단이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고르돈의 전투는 개전 초부터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평원지역을 전부 손에 넣었지만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한 테움군은 공중으로부터 산으로 떨어뜨리는 보급을 차단할 수 없었고, 제공권은 장악했지만 넓은 평원을 장악하고 베르체인 민간인들과 섞인 채 전선을 형성한 테움군을 베르체군은 폭격할 수 없었다. 남부와 북부의 기이한 교착상태는 그들이 더이상 서로를 먼저 공격하지 못해 굳어진 상태로 겨우내 이어졌다.

 

 테움군은 사실상 고르돈 평원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고지를 손에 넣지 못했고 이 사실은 리오 중장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남쪽에는 테움군이 밀어낸 베르체군 일개 사단이 전선을 만들고 기회만 있으면 고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전선이 랜다 마야크까지 밀린다면 테움이 평원을 차지할 기회는 이제 다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고르돈의 자유민 출신 군단장의 지휘부 내의 열악한 입지는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귀족가의 장성들이 공군의 투입을 정치적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적으로는 반도 안되는 적을 상대로 5만이 넘는 군단을 일 년 가까이 묶어놨던 전투가 패배로 이어진다면 그의 경력은 고르돈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평원의 남쪽 어귀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베르체군 사단의 1만5천여 군 사이로 퍼져나가는 술렁임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지경까지 치달았다. 작년 가을 제공권을 쥐게 된 이후로부터 베르체 군에 한없이 불리하던 전투의 양상은 일방적으로 남하하던 테움의

 대군이 수만의 민간 베르체인을 끼고 평원에 주저앉게 하며 크게 바뀌었다. 랜다 마야크에는 로페르트 대령의 당 직속 사관학교 동기이자 사령부 내에서는 그의 흘륭한 지지자인 페닝 중령과 그의 2천여 여단이 모든 거점을 점령하고 두 계절을 버텼다. 하지만 테움군과 비교하면 그의 사단의 병력은 여전히 열세였고 조국의 국민과 섞인 적의 군단에 그는 폭격을 지시할 수 없으며 적 중장이 작정하고 소모전을 펼친다면 고지를 억지로 탈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령부 내에서만큼 당내에서도 유력한 인사인 이 젊은 대령은 상황적 열세에도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한다. 그는 이제 리오 중장을 안다.

 

 '그 훌륭한 바보는 절대 손해는 못보지.'

 

 로페르트 대령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가문의 모든 남자들은 당 간부였다. 조국은 그의 조상들의 남다른 헌신을 오늘날의 그에게 압도적인 공군력의 지원으로 보상했으며 곧 도착할 공수부대 두 개 대대로 다시한번 치하할 것이다. 그리고 대령의 어린 딸이 좋아하는 예려꽃이 아직 시들기 전에, 그의 후원을 받는 주임원사와 자기 아들에 미친 광물학자는 고르돈 북쪽의 고성으로 가 그의 것이 될 에메랄드를 받아올 것이다.

 

 

 (5) 붉은 평야

 

 한 차에 40명씩 욱여넣은 트럭은 차를 처음 타본 노파들의 토 냄새, 어쩔 수 없이 차에서 해결한 인분 냄새로 들끓었다. 정오도 되기 전에 출발해서 이젠 땅거미가 내린 지 오래인데 트럭은 가끔 10분 정도 멈췄다. 끊임없이 남쪽으로 내달린다.

 

 "이젠 11시야."

 

 주방장용 회중시계를 가져와 그들에게 2시간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노파의 목소리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을 떨림이 가득하다고 틸리아는 생각한다. 원래는 겨울철 벽난로에 햄 냄새가 끊이지 않던 도르테 저택의 주방은 원래 그녀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란 하얌을 쓰고 레몬과 만다린을 심은 화단을 직접 가꾸던 백작 부인도, 그녀가 상상도 못 한 장난들과 다과 세트를 차려놓고 주방에서 심부름을 하던 그녀를 끌고 와 티타임을 갖던 백작 아가씨도 그녀가 이 트럭을 잃으려 만들어낸 허상이다. 사실 그녀는 트럭 트렁크에서 태어나 평생을 냄새나는 노파들 사이에서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녀의 아빠는 냄새나는 그녀를 트럭에 남겨두고 남부로 떠나 자유민이 되어 자유민인 딸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불쌍한 우리 아빠'

 

 틸리아가 5살이 될 때까지 틸리아의 아버지 슈텐하이머는 그녀를 업고 떠돌며 귀족 집안의 하인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돈을 모아왔다.

 

 '그때가 훨씬 힘들었어'

 

 그녀의 아버지는 어떤 집에서도 두 달을 넘게 머물지 않았는데 가끔은 두 달이 되기 전에도 경찰이 그를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경찰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가둬놓고 그녀에게 엄마의 머리칼도 그들과 같이 붉은색인지 아버지가 원래 군인이었는지 그녀는 원래 베르체란 곳에서 살던 게 아닌지 캐물었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그들은 빈털터리로 풀려나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르마르크 성이란 곳에 머물렀는데 그 저택의 귀족은 자기의 붉은 머리 하인을 직접 채찍질해 쫓아내었다.

 

 '고르돈으로 가자 틸리아. 거기에는 우리처럼 붉은 머리를 한 양치기들이 양에서 짠 우유를 먹고 양들한테 자장가를 불러주고, 옥수수밭은 너무 넓어서 항상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더구나 그것도 빨간 머리는 환영한다더구나.'

 

 그렇게 몇 날을 제 딸을 등에 업고 절뚝거리며 걷던 슈텐하이머는 국경선 근처의 어느 영지에서 오랜 여정에 지쳐 나이에 맞지 않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딸에게 목말을 태워주며 말했다

 

 '딱 두 달만 저곳에서 지내보자꾸나. 저 정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즐거워 보이는 게 인심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우리한테 따뜻한 빵을 나눠줄지도 몰라'

 

 "도착했다. 내려라."

 

 머리에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어 오고 현실감이 돌아온다.

 

 '잠깐 잠이 들었었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눈을 노리고 내리쬐는 햇볕에 틸리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집과 텐트들이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섞여있는 아주아주 넓고 단조로운 마을이었다. 트럭의 주변에는 그녀의 저택을 찾아왔던 사람들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있는데, 그들은 여인들이 트럭에서 내릴 때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근거리며 킥킥된다. 그녀는 눈이 갑작스러운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실컷 비비고 난 후 그들에게 험악한 말을 퍼부어주려 하지만 이네 넋이 나간다. 그녀가 딛고 있는 돌멩이 하나 밟히지 않는 고운 땅은 그녀의 눈이 닿는 곳 끝까지 뻗어있고 그 위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먹일만한 양의 옥수수를 기르고 있었다. 하늘과 닿아있는 붉은 옥토는 아침의 태양과 어울려 그녀의 머리와 눈썹만큼 샛붉은 지평선을 만든다. 그리고 옥수수 짚으로 만들어진 금빛 울타리 안에서는 저 지평선만큼 붉은 머리칼을 가진 목동들이 피리를 불거나 아직 덜 자란 보더콜리 강아지들에 싸여 거닐고 그들의 붉은 머리 아이들을 등에 업고 그녀의 아버지가 부르던 양치기 노래를 읖조린다. 먼저 남부로 떠난 그녀의 아버지는 사실 그녀를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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