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기타
달의 마리아
작가 : 해우Manatee
작품등록일 : 20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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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작성일 : 17-11-04     조회 : 288     추천 : 0     분량 : 4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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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작은 폭력

 

 3월의 시작은 그곳이 북반구라면 세상 대부분의 지역이 작년 마지막 추위의 퇴장을 기념하는 시기지만, 테움에서도 최북단중 하나인 보틀렌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인 전나무들이 하얀 숲을 만들었다. 북부인들은 이 시기에 외출을 꺼리기 마련이었고 그건 보틀렌 백 객정의 관리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특별한 손님의 방문 예고를 맞아 손맞이용 마차를 끌고 그들을 마중 나가는 길이었다.

 

 "도르테 백 각하를 작은 마차로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전시에 비산유를 쓰는 차는 모는것 자체가 불법이라 말입니다. 그래도 저희 객정에는 귀족원의 대임을 맡으신 가문의 분들께만 제공해드리는 특실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들에 대한 보틀렌 백의 작은 예우이니 부디 저희가 모시는 동안 불편함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올해로는 첫번째 대귀족의 방문에 당황한 상태였지만 보틀렌가의 유능한 사용인이자 객정의 관리인은 그들을 방문한 귀부인에 대한 예로서 쥰비한 그의 수인사가 썩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했다. 북부 어귀의 귀족령은 바하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자유민들이 잠시 들를 뿐 언제나 조용한 도시였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이 기차의 운행마저 끊어져 객정은 거의 텅 비기 마련이었고 뜻밖의 방문자는 그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다. 남부에서 온 귀부인은 동행하는 수행인도 없이 영지에서부터 걸어온 것 처럼 보이는데다 자유민들이나 입을 법한 주머니가 잔뜩 달린 바지에 굽이 없는 신발을 신었고 그녀에 못지 않게 초라한 옷구색을 한 귀공녀도 데려왔다. 누가보아도 피난민이 분명한 이들을 본다면, 손님이 없는 객정에서 라디오만 붙잡고 전쟁터 소식을 기다리는 녀석들은 손님들의 입에서 그들 몫의 이야기가 떨어질 때 까지 안절부절 못할 것이다.

 

 자유민들의 시끌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찬 아침의 호텔 로비에는 무뚝뚝한 하사와 그의 부하들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하사는 그들이 쫓던 여인들을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새벽이 될 때까지 그녀들의 방 근처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는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창문을 넘어 도망고 난 후였다.

 

 '당연히 고려했어야 할 경우였다.'

 

 그녀들은 이제 도르테령을 넘어갔고 분대원들은 잘게 쪼개져 한명씩 가능성이 있는 모든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하사는 눈을 비비고 다시 지도를 들여다 보았지만 그녀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역은 전쟁이 한창인 남부지역을 모두 제외해도 그의 분대원들의 수보다 많았다. 하사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을 하자.'

 

 그녀들은 이미 이곳에서 집안의 패물들을 팔아 거금을 마련했다. 더이상 지난 방식으로는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연고 있는 사람이 없다.'

 

 현재의 도르테 백작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 아니다. 하사 자신도 자작가의 혈통이지만 그것은 그저 거대한 가문의 피가 섞였다는 증거일 뿐, 현 자작의 먼 종사촌인 그는 자작위의 계승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도르테령에서 백작은 조나단 도르테와 라렐리 도르테 단 두명이었고 조나단과 이자벨라는 자유민 출신이었다. 그들은 귀족원의 최고 가문 말고는 다른 귀족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사교활동에 관심이 없는 그들은 당연히 하위 가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귀족과는 연고가 없었을 것이다.

 

 "영지를 찾아갔겠군."

 

 하사의 눈과 손이 빠르게 돌아갔고 곧 그들이 하루를 걸어 도착할 수 있는 영지들로 추격 범위가 좁혀졌다. 계속해서 지도에 대고 셈을 하면서도 하사의 눈은 바하와 이어진 철로를 주시한다. 기차는 오래전에 멈췄지만 마차 한대만 있으면 철길을 따라 바하에 도착할 수 있다. 하사는 빠르게 작전지시를 내렸고 몇분 후 그들은 바하에서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중부지역 곳곳으로 흩어졌고, 그도 상병 둘과 함께 보틀렌으로 향했다.

 

 라렐리 도르테는 한낮의 볕발에 눈이 녹은 선로에 앉아 말들이 올해의 새순을 뜯는 걸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이자벨라 고모는 관리인 아저씨에게 그들이 앞으로 먹을 열흘치의 양식을 부탁한 뒤 말들을 끌고 역으로 나와본 참이었다.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동안 고모는 도시들을 통과하지 않고 인적이 끊긴 선로를 따라 바하까지 가는 계획을 그녀에게 설명하였다. 고모의 계획에는 마차와 말이 필요했고 그들은 북부에 도착한 당일 부터 말과 마차부터 수소문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귀부인의 소식을 들은 보틀렌 백은 도르테가의 보물 몇개에 저택의 종마 네마리를 흔쾌히 내어주었다.

 

 "고모, 전 어제 백작 부인이라는 걸 처음 봤어요. 어, 고모도 백작 부인이지만 저렇게 많이 같이 있는 사람들이요."

 

 "지금껏 아빠하고만 살았으니 심심하기도 했겠구나. 로벨리아가에 가면 부인들도 많고 꼬마 아이들도 많을테니 친구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라렐리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던 습관처럼 무릎에 손을 괴고 수염이 있을리가 없는 턱을 쓰다듬는다. 저런 습관은 라렐리 뿐만 아니라 이자벨라 본인과 그녀의 오라비인 조나단 백작도 물려받았던 과거가 있어 그들이 생각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곤 했었던 행동이었다.

 

 "그게 아니구요. 부인들은 계속 자기들끼리만 말하고, 밖에 있던 사람들은 엄청 바쁘게 일하는데 막 게으르다고 뭐라고 하는게 이상했다는 거죠."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턱수염 한가득 있었을 자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라렐리를 보고 킥킥거리던 이자벨라는 조카의 검은 머리칼에 손을 집어넣어 요란하게 쓰다듬었다. 주변에 인간관계를 충족시켜줄 귀부인들이 없어 귀족과 평민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은 조카에게, 어제 저녁에 그들을 방문한 지극히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대가문의 여인들은 꽤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언젠간 겪어야 할 일이기도 했지.'

 

 귀부인들과 사용인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렇게 나빠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생각하는 조카를 보고 이자벨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도르테 백작가에서 태어나 자란 라렐리의 작은 세계는 길고양이들이 우글거리는 좁은 빌라에 살았던 과거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환상의 연장이었다. 그 시절, 도시에 몇 안되는 텔레비젼을 가진 커다란 술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고, 이자벨라와 조나단 윌리엄즈는 그들의 어머니가 일하던 그 가게에서 온 저녁을 보냈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던 그 낡은 텔레비젼에선 세계의 온 나라들이 자기네 사람들을 달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한번이라도 밤하늘의 저 월구를 밟아본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화면에 얼굴을 비춰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에 대해 설교했다. 그리고 그 해에 나오던 모든 방송에는 가난한 지질학자이자 테움 왕가의 후원으로 비행사 자격을 수료하게 된 자유민 출신 로메인 윌리엄즈의 이야기로 가득 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베르체인과 함께 월구의 한쪽 면에 인류의 4번째 발자국을 남기고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틀동안 생활하면서 온갖 조성의 월석과 월토들을 수십 파운드나 가지고 귀환하였다. 영광의 시기가 끝나갈 때 쯤, 그가 가지고온 월석들중 일부의 권리를 인정 받고 테움으로 돌아온 그와 가족들은 백작위를 받고 후계가 없는 늙은 도르테 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자벨라는 사용인들에게 한없이 인자한 귀부인들에 대한 그녀의 작은 상상에 몰입하곤 했었고 라렐리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한켠에서 꺼내온 것처럼 왕성하게도 궁금해 했고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드는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고모, 아빠가 옛날에 왕들은 정원에다가 말하고 병사들로 체스를 뒀대요. 이긴 사람이 진사람 말들을 전부 다 가져가 버려서 체스를 잘 둔다고 소문난 자유민들이 많이 잡혀 갔었대요."

 

 아마 아빠한테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였겠지. 이자벨라는 기찻길에 오래 앉아 있다 엉덩이가 다 젖은 조카를 안아 들고는, 몇일 밤낮으로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끼며 조카와 함께 말들을 걸고 체스를 두던 두 왕 이야기, 남쪽에 사는 욕심많은 남작부인 이야기, 달나라에 살던 도깨비를 만난 윌리엄즈씨의 이야기를 하며 오랜만에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객정의 특실에는 벌써 깊이 잠에 빠져든 라렐리가 있었고 이자벨라와 보틀렌의 부인들의 티타임이 있었다. 그리고 불이 다 꺼진 채 늙은 관리인이 홀로 남아 지키고 있는 로비에는 밤 늦게 묵을 곳을 찾는 제복 차림의 군인 세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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