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을 포함해 다른 녀석은 아직도 발코니에서 놀고 있었지만 이엔은 평소처럼 어울려 노는 대신, 숙소로 돌아왔다.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니, 역시나 이엔이 예상했던 대로 이건혁이 침대에서 쭈그려 앉아있었다. 그 꼴을 보자, 이엔이 미간을 찌푸리곤 물었다.
“뭐하냐?”
“왜 왔어.”
“뭐라는 거야. 여긴 내 방이기도 하거든?”
“.......애들이랑은 안노냐?”
“목소리가 떨리네. 새X. 울었구만. 정말 멍청한 만큼 알기쉬운 놈이라니깐.”
“.......”
이건혁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끌어안은 무릎에 처박는다. 그리고 이엔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가벼운 목소리로 주절대기 시작했다.
“놀다 왔지. 밥도 먹고, 아이린이랑 통화도 했지. 아아, 정말 행복한 하루야. 물론 아이린 덕분이지. 내가 사는 이유.”
“.......”
“하아....... 이 찐따 새x가.......”
여전히 쥐며느리처럼 몸을 동글게 만 채 묵묵부답인 이건혁을 보곤 결국 이엔의 짜증이 새나오기 시작했다.
“총수님도 말했잖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에겐 조금 위험한 장소였다고.”
“근데 넌 무사했잖아. 다들 무사했고.”
“너도 무사하지.”
“.......네가 구해줬으니까.”
“다른 애들도 내가 구했지. 2 팀 녀석들 말야.”
“......”
다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엔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난 너 위로해주려고 온 거다? 대장으로서의 책무도 있긴 하지만 같이 방 쓰는 놈이 세상 죽을 상을 하고 방에 처박히면 그 옆에서 자야하는 나는 어쩌라고?”
“그래, 그럼 내가 나가면.......”
“아오 이 병X새X가.”
결국 이엔의 입에서 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정말 짜증나는 기분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한국어로 내뱉어 보는 이엔이었다.
“말 했잖아 등신아. 누구라도 다 똑 같았을 거라고. 그냥 네가 재수 없던 거라고. 그리고 내가 유달리 강했던 거고. 알잖아? 예전에 인정했으면서. 난 천재라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지X이세요?”
스스로의 생각보다 말이 조금 세게 나온 이엔은 속으로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평소라면 여기에 울컥했을 이건혁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래....... 좋으시겠네. 축복받고 태어나서....... 인생도 축복 받겠네. 난 집에서도....... 여기서도 항상.......”
“그래, 나 빡돌게 만들고 싶었니?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주 멋지게 성공했어.”
이엔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고개를 무릎에 박고 있는 건혁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뭐......”
“축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개X같은XX야. 만약 내가 축복 받은 탄생이었으면 나이나 이름도 모르고 9살 때 냉동육이 되기 직전까지 가진 않았겠지. 아,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 덕분에 아이린을 만났으니까 그건 그걸로 퉁칠 수 있어. 아니, 퉁치고도 넘치고도 남지. 근데 말야?”
“......”
“내가 정말 축복 받은 인생을 받았다면....... 내 가족....... 내 양부가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야.”
“......”
“어떻게 생각해?”
“.......미안.......”
“아, 이 새X. 왜 울어 또. 미치겠네. 오늘 왜 이렇게 여기저기서 눈물바다야. 남자새끼가 내 눈을 보며 엉엉 울어도 설레지 않아. 기분 나쁘다고 미친X아.”
“흐흑.......젠장. 알아. 한심 한 거 안다고. 그래도 어떻게 해? 난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래 누가 봐도 넌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지.”
평소의 못된 버릇대로 비꼬아 대는 이엔이었으나 이건혁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는 듯 울먹이며 말을 뱉어냈다.
“가정환경이 개판이었어도 그렇게 믿었어. 오히려 더 드라마틱하게 성공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다고! 근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까....... 흐흑....... 개판이야. 더럽게 약해. 더 짜증나는 것이 뭔지 알아?”
“몰라 새X야. 그 따위로 말하면 오히려 더 듣기 싫어지니까 그냥 말해. 뭐가 그렇게 짜증나는데.”
“젠장....... 아직 그 감촉이 잊혀지지가 않아.”
“뭐?”
“살인 말야!!!! 난 한 명 죽이는 정도는 조금 찝찝하고 말줄 알았어! 그렇게 훈련받았잖아! 근데 이건 뭐야? 전투로 죽인 것도 아니고. 그것도 한심하게 허둥대다가 손에 걸린 벽돌로 찍고, 또 찍어버렸다고!!!”
“하아.......”
“흐으....... 게다가 헬리콥터를 추락시켰을 때, 멀리서 총을 쏠때는 이런 걸 느끼지도 못했어! 난 뭐야? 눈앞에서 피를 안보면 자기가 뭔 짓을 한 지도 모르는 병신이었냐고! 흐어어엉......”
이엔이 생각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 이전에 적과 싸우다 적을 사살한 주제에 눈 앞에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인 것만이 충격인거냐고 비아냥거리려던 이엔은, 그것을 스스로 말한 이건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니콜 총수님이 해주신 말씀을 하나 새겨주지.”
“??”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 익숙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며, 언제나 힘든 것이 당연한 일이다. 네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견디고, 적의 목숨을 가볍게 하지 마라. 기억나지?”
“응.......”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오리지날로 새겨주지. 네 목숨이 걸렸는데, 네 동료 목숨이 걸렸는데 알게 뭐야 시X. 막말로 네가 그놈을 처리 안했으면 너도 죽고 그 다음엔 친구들을 정리하러 갔을지도 모르지. 네가 잘했다고 추켜세우는 건 아냐. 근데 말야? 네가 말했잖아. 넌 약하다며?”
“응.......”
“자비라는 건 힘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베풀 수 있는 거야. 우린 힘이 없고. 힘이란 것이 평화롭고 조신한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네가 만약 생명을 지키고, 적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싶으면 질질 짜지 말고 강해지라고! 그만두고 싶어도 늦었어!”
화가나서 큰 소리로 길게 말을 쏟은 탓인지 조금 숨이 차는 이엔. 그러나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밥 처먹어! 나와!”
마무리가 애매해서 그냥 끊어버리는 이엔. 항상 이랬다. 말을 길게하는 건 그렇다쳐도 마무리가 어색해질 때가 있는 것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엔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야.”
“왜 등신아?”
음, 욕할 필요는 없었나?
“고마워.”
“뭐가?”
“구해줘서.”
“아 소름끼쳐. 소녀에게 듣는 거라면 나름 뿌듯했겠지. 아이린에게 듣는 거라면 그 넘쳐나는 삶의 보람과 성취감, 인생의 가치를 새삼스레 느끼며 졸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넌 아냐 이자식아.”
“........”
“아무튼 그거야 당연히 느껴야하는 거고. 나오기나 해. 아직 요리가 더 나온대. 지금이 10시 정도 되었으니...... 한 시간 정도는 더 나오겠군. 음식이 나온다고 바로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가도 충분히 배도 채울 수 있어. 난 먼저 간다.”
“기다려.......쿨쩍.”
“아 진짜 더럽게 징그럽네. 남자가 그렇게 붙잡아도 설레거나 하진 않거든?”
“넌 말이 더럽게 많고 말야.”
“그러니까, 싫다고. 눈물자국이 남은 채 훌쩍이며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건 아이린 뿐이라고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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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핫!!! 저 자식 울었어!!!”
히스파닉계.......라기보단 라틴계라고 하는 것이 옳은 걸까? 어찌되었건, 그쪽 계열에 덩치도 커서 ‘돈’이라는 어감이 왠지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닥쳐.......”
“건혁, 힘내.”
올가가 짧고 심플하게, 그리고 힘을 주어 말했다.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거겠지만 한국어 어투가 딱딱했던 탓에 그다지 위로로 다가오지 않는 다고 생각한 이엔이었다.
“한심하긴. 총수님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그 말씀대로 즐길 줄 알아야지.”
“아, 빅토르 이 새끼 또 시작이네.”
“그래!! 건혁아!! 너무 신경쓰지마!!!”
이엔 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멀끔하게 생긴 호소카와가 건혁의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근데 이제 슬슬 다른 화제로 넘어가면 안될까? 저놈한테 자꾸 각인시키고 있잖아.”
이건혁을 두고 한마디씩 걸고 넘어지는 동료들을 보며 이엔이 한탄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듣지 않았다.
“사내자식이 울긴.......” “어쩔 수 없잖아. 죽을 뻔했는데. 이해해.”
짓궂게 말하는 짧은 머리칼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년 마오, 무표정으로 말하는 리우. 이 놈들도 참 눈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엔은 포기 한 채 눈 앞의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힘내요 건혁. 당신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요. 우린 다들 미숙했는 걸요.”
이 예의바른 말투는 레이첼일 터. 덩치도 작은 소녀가 돈의 바로 옆이라 이엔에겐 갈색머리카락만 겨우 보이고 있었지만.
“왜 부대장 자리에 그렇게 구애되는지. 괜히 멘탈만 다치게 말야.”
위로인지, 건혁의 약한 멘탈을 돌려 까는 건지 애매한 말투의 인도출신 소년 싱.
“에이! 힘내 건혁아! 이엔한테 도움 받았다고 너무 그렇게 침울할 필요 없어. 우린 다들 미숙하잖아? 물론! 이엔이 좀 대단하긴 하지만! 아하하하!”
“마리아. 칭찬은 정말 고마워. 그런데 상황 좀 보면서 하자?”
결국, 겨우 달래놓은 이건혁이 또 울음이라도 터트릴까 두려운 이엔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때, 옆에서 아이신이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하! 일대일 대련은 나랑 승률 비슷하거든?”
“그래, 이건혁에게서 타겟이 벗어난 건 고마워. 근데 전투는 일대일 대련만 있는게 아니잖아 멍청한 형 새X야.”
“우욱...... 미안....... 훌쩍...... 내가 팀장이었는데.......”
오늘은 이 개자식을 달래고 띄워주는데 한 시간 정도는 쓰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콜라를 집어드는 이엔이었다.